인간과철학

인간의 일관성

아이루다 2015. 9. 14. 08:42

 
명품 브랜드 중에 구찌라는 상표가 있다. 그런데 이 많이 들어 본 상표를 가진 회사에 흥미로운 이야기 한 편이 전해진다. 그것은 바로 남편을 살해한, 아니 살해하도록 지시한 한 여자의 삶에 대한 것이다.
 
그녀는 구찌 브랜드를 가진 회사의 상속자였던 남편을 살해 교사한 혐의로 29년의 형을 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가석방의 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그녀는 노동을 하는 것을 조건으로 건 가석방을 거부한다. 즉, 그녀는 일을 하느니, 감옥에 있겠다고 선택한 것이다.
 
사실 그녀의 그런 결정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녀의 화려한 시기에 '자전거를 타고 행복하기 보다는 롤스로이스 안에서 울겠다' 라고 말했던 전적이 있다.
 
이 한 마디는 그녀의 모든 것을 표현해주고도 남으며,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말을 안하고 있을 뿐,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 중에서 적잖게 그녀에게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을 듯 하다.
 
이런 그녀에 대해서 좋지 않게 평가한다면, 그것은 바로 황금 만능주의, 즉 배금주의에 쪄든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녀는 오직 그런 것이었을까?
 
만약 그녀를 오직 그런 시선으로만 보았다면, 그것은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녀가 자전거의 행복보다는 고급 차의 불행함을, 노동을 하면서 자유로운 것보다는 일하지 않으면서 제약을 받는 것을 선택한 것이 단지 돈 때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조건' 이다. 다른 말로 하면 환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조건이나 환경은 우리가 우리일 수 있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이유이다. 문제는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산다는 점이다.
 
우리는 누구나 고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나름대로의 일관성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사실 그래 보이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그러니까 말이다. 어제 김씨였던 사람은 오늘도 김씨이고 내일도 김씨일 것이 틀림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 일관성 있게 살아간다고 믿어진다. 물론 조그만 감정적 기복은 있다. 즐겁거나, 슬퍼하거나, 노여워하거나, 행복해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감정적 기복은 '그 사람의 정의' 안에서 머문다. 즉, 우리는 어떤 사람의 모든 감정적 상태를 경험해봄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그렇다면 이런 일관성은 어떤 식으로 유지되고 있을까? 우리는 사실 이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기도 하고 절대로 변화되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자신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살아가다 보면,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너무 변해서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기도 한다. 왜 그들을 변했을까?
 
그런데 이 질문이 정말로 타당한 것일까?
 
왜 그들이 변했을까를 생각하기 보다 그 질문 자체가 타당한지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누군가 변한 것이 신기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변하지 않는 것이 더 신기한 현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들 대부분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은 마치 우리 인간들의 고유 특성처럼 보이고, 변한 사람은 이상해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변하지 않았을까를 생각 해보는 것이, 우리가 왜 변하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변하지 않는 이유를 안다면, 변한 이유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변하지 않을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려 보자. 사실 그러면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우리답게 해줄 수 있는 조건 혹은 환경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운 곳에 가면 옷을 벗고, 추운 곳에 가면 옷을 입는다. 이것도 일종의 변화이다. 우리는 우리 몸을 지키기 위해서 옷을 벗었다가 입었다가 한다. 이것을 가지고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체온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남편을 살해한 아내는 그 죄로 감옥에 갔을 것이고 아마도 가진 재산을 모두 잃었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녀가 다시 자유를 얻는 조건은 바로 '노동' 이었으며, 그녀는 살아 생전 단 한번의 노동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노동은 변화였으며, 그것도 참혹한 변화였다.
 
아마도 그녀는 살아 생전에 노동을 하고 사는 사람을 끔찍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노동을 하고 사는 삶이 가진 조건이나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녀의 삶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변화였을 것이다. 그보다는 감옥이 더 나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우리는 그녀와 무엇이 다를까? 우리는 그녀보다 조금 덜 극단적일 뿐이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모습은 바로 우리를 우리답게 해주는 조건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집을 구하고 직장에서 매일 일을 하면서 얻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일상이다. 이 일상은 밥 먹고 자고 싸는 행위를 포함해서 여행을 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외식을 하는 것까지 모두 포함한다. 더해서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도 일상이 된다.
 
어제 친구의 결혼식에 온 사람이 오늘 또 다른 친구의 결혼식에 오질 않으면, 친구들은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걱정하는데, 그 걱정이 바로 조건의 파괴인 것이다. 직장을 잘렸거나, 이혼을 했거나, 집이 경매로 넘어 갔거나, 키우던 아이를 잃었거나 하는 것들이다.
 
아무리 우아하고 도도한 여자라도 삼 일만 가둬놓고 폭력을 가하면 개보다도 못한 자존감을 갖게 된다. 이것이 고통이 가진 힘인데, 사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평생 그런 조건에 놓이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또한 평생 동안 그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노숙자나 장애인 등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의 정체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동정심도 느끼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들처럼 될까 봐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는 그럴 때 그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면서 마음이 안정되길 바란다.
 
우리 인간은 사실 조건이나 환경에 완전히 종속된 존재들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현재의 모습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런 조건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건들이 잘 변하지 않으니 평생 동안 그 모습이 자신이 의지적으로 만든 모습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생각의 차이는 예상보다 크다.
 
우연히 만들어진 것과 의지적으로 만들어진 것의 차이, 이 말을 조금 생각해보면 꽤나 많이 들어 본 충돌이 생각나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시대에 생명의 탄생에 대한 거대한 싸움인, 진화론과 창조론의 입장이다.
 
진화론에서 인간은 우연히 만들어진 산물이다. 하지만 창조론에서의 인간은 신의 의지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 만큼이나 이 두 입장의 차이가 크다.
 
우리는 사실 조건에 예속되어 우연히 만들어진 결과인데, 우리 자신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서 만들어 놓은 존재라고 여기게 되면 세상을 보는 방법과 시야가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라고 믿으면 믿을수록 좀 더 강압적인 시선을 갖게 되며 또한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매우 고정된 판단을 하기 쉽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사는 이유가 바로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삶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더 강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열심히 산 사람일수록 스스로 해냈다는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하는 것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열심히 할 수 있었던 성격이다. 과연 그 성격도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어 놓은 것일까?
 
우리는 누구나 어떤 환경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변화되기 마련이다. 시장에서 오래 살면, 사람들과 어울리고 크게 웃고, 크게 싸우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고, 부자들만 모여서 사는 조용한 주택가에서만 평생 살면 혼자 지내고, 우아하며, 조용히 사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어느 장소에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맞다. 하지만 어떤 장소에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 중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없다. 그것은 외모나 지능, 성격 등이 아주 크게 영향을 미치는데, 그 조건들은 모두 태어나면서 결정되어 있다. 설령 그 후에 부모의 노력에 의해서 달라질지라도 부모 자체도 선택이 불가능 하다.
 
그러니 우리는 무의지적으로 부자 동네의 주택가에서 살거나 높은 아파트에서 살거나 시장에서 산다. 그리고 각자가 그곳에 맞게 살아가게 된다.
 
소심하고 말도 잘 못하던 사람이 영업 분야에서 20년을 구르면, 부침성 좋고 능글맞은 사람으로 변한다. 최고의 교육을 받고도 20년간 살림만 한 여자는 그야말로 가정 주부가 된다.
 
누군가의 말처럼 서는 곳이 다르면 보이는 것이 다르다. 정직하고 고지식하던 사원은 출세를 거듭해서 사장이 되면 어느새 권위적이고 자신이 잘난 줄만 알고 산다.
 
예전에 이런 조사가 있었다. 부자들에게 더 많은 벌게 해주면, 그들이 낙수 효과를 일으켜 경제를 더욱 더 잘 돌아가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과연 진짜인가에 대한 것이다.
 
물론 이 조사가 맞는지에 대해서 타당성은 보장할 수 없다. 단지 그래도 꽤나 똑똑한 사람들이 분석한 내용이니 참고할 만 하다.
 
부자들이 더욱 더 부자가 되면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가 조금 더 중요해졌으며,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들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한심하게 느낀다고 한다. 왜 자신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저렇게 사는 것인지 심지어는 화가 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이 이룬 부를 빼앗는다고 느낀다고 한다. 즉, 많은 세금을 내서 복지를 하려고 할 때, 그들은 기꺼이 그것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당하게 번 돈을 가난하고 게으른 존재들을 위해서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진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눈 앞에서 구걸을 하는 거지들에게 아무런 동정심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 부자들이 더욱 부자가 되면, 그들이 번 돈을 내놓아서 낙수효과가 일어난다는 것은 처음부터 헛소리라는 셈이다. 물론 이 나라는 아직도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다수인 듯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그들이 부자가 아니었을 때부터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아니다' 이다. 당연하게도 그들이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변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들의 말처럼 가난한 존재들은 노력하지 않고 게으른 존재들일 뿐이어야 한다. 그것은 부자들이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 의지적이고 당연해야 하는 것의 필요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산다는 말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일관성이 있게 살 수 있는 조건을 지켜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4년마다 운명이 바뀌는 국회의원의 삶을 보면 이해가 된다. 그들은 당락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일관성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일관성 있는 해주는 조건을 지켜내는 존재들이다.
 
물론 일관성을 위한 조건이 '신념' 이나 '믿음' 일 경우엔 다르다. 신념이나 믿음은 물질적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변하지 않는 조건이 바로 신념과 믿음을 가진 경우가 된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이들 역시도 조건이 그럴 뿐이다. 물질적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변할 가능성이 적을 뿐이지, 조건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관성이 조건에 종속된 것임을 인식하게 되면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일명 '똥 고집' 이 없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룬 것들에 대해서 불필요한 자부심을 갖지 않을 수 있다. 즉, 겸손해질 수 있다.
 
또한 그 무엇보다도 조건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자신의 일관성을 주장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핑계를 댈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어제 자신이 신경질을 낸 이유는 바로 잠을 잘 못자서이고, 지각을 한 이유는 간 밤에 악몽을 꿨거나 알람 시계가 고장 나서 그렇다는 식의 핑계들 말이다.
 
물론 그런 핑계들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그 어떤 것의 탓을 하면서 넘겨 버리는 짓을 하는 것은 그리 좋은 태도가 아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사물이나 상황이 아닌 사람일 경우엔 더욱 더 그렇다.
 
어떤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자신이 좋지 않게 되었음을 설명하는 순간, 모든 잘못은 그 사람에게 전가가 된다. 그 잘못이 반반이었거나 사실은 자신의 실수가 대부분의 이유였을지라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살짝 스치기만 했는데 그렇게 정색하고 화를 내더라' 라든가 '나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데, 그렇게 기분 나빠하느냐' 라는 등의 말을 한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과 다르게 사실은 일관성이 거의 없는 존재들이라서 주어진 조건에 따라 끝없이 변한다. 그리고 그 변한 모든 것은 우리들 자신의 이상한 모습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모습들이다. 그것을 끝없이 한 가지 모습으로 주장하려니, 끝없는 핑계가 필요하다.

 

이런 변화는 사실 예비군 훈련장에 가 본 사람이라면 쉽게 경험한다. 세상 속에서는 모두 다르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군복을 입히고, 통제를 하기 시작하면, 하루 종일 언제 끝날까를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훈련에서 열외가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일관성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사실 많은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일하기 보다 감옥을 선택한 여자가 얻지 못한 자유로움이다.
 
사실 일관성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제공하는 일종의 '자기 사용 매뉴얼'이다. 우리 모두는 예측 불가능한 사람보다 예측 가능한 사람을 훨씬 선호하기 때문이다. 관계는 이득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그 매뉴얼대로 사는 것이 자신을 위해 좀 더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게 해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는 자기 정체성을 위해서도 일관성 있기 바란다. 어제는 사과가 싫다고 했다가, 오늘은 사과를 좋다고 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변덕이 심하다고 여긴다.

 

이것이 확대되며, 무엇인가를 한 번 비판하면 평생 동안 그것을 바꾸지 않고 비판해야 한다고 믿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자신과 자신의 판단을 자기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사실 이것은 꽤나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리하면 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이중적인 사람이 되기도 한다.

 

즉, 남들에게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로 자신의 모습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끝없이 자신을 합리화하고 용서한다.
 
우리가 믿는 것과 달리 일관성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사실 일관성은 도덕과 같은 개념이다. 우리는 도덕적이지 않기에 도덕을 교육받아야 하고,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일관성에 가치를 둬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냐는 다른 문제이다. 

 

사실 일관성을 위해서 우리가 지켜야 할 아주 중요한 가치 중 하나가 바로 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일관성을 지켜냈다고 해서 우리가 원하던 행복을 얻었을 수 있었지는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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