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왜 사는가를 묻지 말자

아이루다 2015. 9. 2. 06:03



살아가보면, 가끔 어떤 궁금증이 든다. 그것은 바로, 왜 사는지를 알고 싶은 궁금증이다. 좀 더 유식한 말로 표현하면, '존재의 이유' 를 알고 싶은 마음이다.
 
뭐, 평생 동안 단 한번도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사람도 태반이니,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 질문이라고 말하기는 그렇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존재의 이유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과, 그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놓는 사람들을 접하곤 한다.
 
그리고 이 답을 찾는 것을 전문적으로 하는 학문을 인문학, 그 중에서도 철학이라고 한다. 또한 이것은 단지 학문적 영역에서만 답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철학에서 내놓는 답은 좀 궁색한 것이 태반이다. 오히려 학문하고 별로 관련 없어 보이는 종교 쪽에서 훨씬 구체적이고 명확한 답을 내놓고 있다.
 
철학은 수천 년 동안 계속된, 인간의 역사상 꽤나 오래된 학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우리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답을 내놓지는 못하니 생각하는 법만 알려준 후, 각자 답을 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어설픈 마무리를 한다.


하지만 종교는 그 진위에 상관없이, 우주와 지구,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꽤나 정확히 답을 준다. 그리고 영혼이나 사후 세계 혹은 윤회와 같은 개념을 이용해서 우리들 존재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이 땅에 있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가르쳐준다. 그러니 당연히 존재의 이유도 명확해진다.


물론 모든 철학이 그런 것은 아니다. 철학도 동양철학이냐 서양철학이냐에 따라 다른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철학들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한 서양철학이고, 서양철학은 대부분 답이 없다. 하지만 생각할 거리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동양철학은 좀 더 본질적인 면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답을 준다. 물론 그 답이 맞는지 틀리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마치 종교처럼 확인한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서양철학과 달리 동양철학은 논리나 이성적 접근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이성적 사고에 대한 가치를 가져왔기 때문에, 과학이든 철학이든 모두 명제를 만들고 증명을 하는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하지만 동양철학은 다르다. 동양철학은 사실상 종교에 더 가깝다. 그들은 그냥 설명을 할 뿐,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철학은 서양철학이고, 이것은 과학처럼 답을 내고 증명을 하고자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결국엔 일반 사람들에게 답을 스스로 찾으라고 떠넘긴다.
 
이것은 마치 우주엔 에너지 보존 법칙이 있다고 말한 후, 아무런 증명이 없이 당신이 알아서 받아들여라 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과연 왜 사는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철학의 입장처럼 많은 생각을 하면서 그 답을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각종 종교 중 하나를 골라서 그 종교의 경전에 설명된 것처럼 세상의 존재 이유와 그 속에 속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이것은 어려운 선택 같지만, 생각보다 쉽다. 이 설명은 일단 가장 흔한 종교 중 하나인, 기독교를 기준으로 해보겠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론을 믿지 않고 좀 더 과학적 입장인 진화론을 믿게 될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은 하등 동물에서 고등 생물로 진화한 생명체이다. 그래서 우리의 본질은 그냥 머리 좋은 동물이다. 그러니 아메바가 존재 이유가 있어 보이지 않듯, 우리 인간 역시도 존재의 이유는 없다.
 
만약 우리가 존재 이유가 있으려면, 지금 방 안 어딘가에서 숨어 사는 바퀴벌레나 혹은 아마존 정글에 있는 이름 모를 벌레도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다 같은 동물이기 때문이다. 동물뿐만이 아니다. 모든 잡초들도 존재 이유가 있어야 한다.
 
반대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종교에서 이미 다양한 존재의 이유를 정의해줬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영혼도 있고, 사후 세계가 있어서 죽음 후 천국이나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단지 기독교에서 나오는 설명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모든 종교는 바로 그 종교만의 세계관, 영혼의 존재,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따져보면 비 종교적 입장에서도, 종교적 입장에서도 우리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아무런 존재의 이유가 없거나 혹은 존재의 이유가 명확하다. 이것은 단지 종교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차이만 될 뿐이다.
 
또한 종교는 그 종교의 경전에서 설명하는 존재의 이유를 전혀 증명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 가지고, 왜 무턱대고 그것을 믿느냐 라고 종교인들을 공격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들은 선택을 한 것뿐이다. 그래서 자신이 진화론을 믿는다고 해서 창조론을 믿는 종교인을 비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종교인들 역시도 창조론을 믿는다고 해서 진화론을 믿는 사람을 비난할 필요가 없다. 혹은 창조론이 맞으니 진화론은 거짓이라고 주장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그냥 완전히 서로 다른 영역이다. 이것은 비단 기독교의 문제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에 그 종류만 다르게 모두 적용 가능하다.
 
우리 자신이 창조론을 믿든, 진화론을 믿든, 과거의 진실이 달라질 것이 없다. 또한 우리는 아직까지 과거에 일어난 생명 탄생의 비밀을 완전히 알 방법도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과학에도 관심이 없고 종교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비율로 보면, 이런 사람들이 가장 많은데, 이들의 특징은 처음부터 왜 사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원래 어떤 것을 알고 싶을 때, 그 궁금증을 풀어줄만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된다. 반대로 알고 싶은 것이 없다면, 관심을 가질만한 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과학에도 종교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은 원래부터 존재의 이유 따위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 이 글의 제목처럼 이미 왜 사는지 묻질 않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글을 통해 말하고 내용에 대해 이미 대상이 아니다.


일단 이런 사람들은 제외하고, 그것이 과학이든 종교든 간에 상관없이, 우리는 왜 자신이 믿는 것을 남들이 믿길 바랄까? 사실 그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다.
 
우리는 혼자서 믿어서는 확신이 안 서고, 그러면 스스로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제대로 믿지 못할 때, 다른 이들의 의견에 기댈 수 밖에 없다. 또한 자신이 믿는 것과 반대의 입장에 있는 의견을 기회가 될 때마다 비난하거나 틀렸음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100% 믿는다면,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반대 의견 따위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즉, 만약 기독교인이 진화론을 부정하는 말을 한다면, 그 말은 결국 스스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 된다. 정말로 자신이 믿는 종교를 100% 확신한다면, 사실 진화론을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면서 측은하게 여겨져야 정상이다.
 
반대로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진화론을 제대로 믿는다면 그냥 창조론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그냥 헛소리로 취급하면 된다. 하지만 이들 역시도 그렇지 못하다.
 
물론 둘 모두 단지 그 이유로 인해 그러지만은 않을 것이다. 종교인이라면, 자신이 믿는 종교를 더욱 많은 사람들이 믿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을 것이고, 비 종교인이라면 사람들에게 파고 들어서 사람들의 이성적 사고를 막아버리는 종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며 산다는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보면, 결국 종교인이나 비 종교인이나 모두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즉, 어떤 대의적 이유를 대면서 서로를 공격하더라도 결국엔 자신이 이득을 위해서 그러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인은 자신이 믿는 것을 더 많이 믿을수록 더 강한 믿음을 갖게 될 것이고, 비 종교인은 종교인들이 무리를 지어 이득을 얻는 행위를 보면서 자신이 입게 되는 손해에 대한 반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과학 기술은 끝없이 발달하고, 우리는 우리가 속한 우주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종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어떤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과학은 절대로 그것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과학은 우리 인간을 점점 더 동물의 영역을 몰아 세우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 자신이 그저 아무런 의미 없이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으면 모두 사라져버리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무척 힘들다. 설령 죽음 후 아무 것도 없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가치를 느끼는 그 모든 것이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고, 최고의 가치인 자신의 생명조차도 아무런 가치가 없어서 언제 죽어도 된다는 말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우리는 종교를 믿든 안 믿든, 살아 생전에 자신의 삶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은 스스로 행복을 걷어 차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원래 가치가 없는 삶은 행복하기가 무척 힘들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스스로 의미가 있어야 하는 우리는, 가치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종교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어쩌면 과학이 점점 더 우리를 무의미한 존재로 몰아붙일수록 우리는 점점 더 종교 쪽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 그 종교가 반드시 기독교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기독교 말고도 불교와 같은 몇 가지 좋은 종교들도 있다. 그리고 그런 종교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우리의 존재가 과학에서 말하듯이 우연이 태어난 산물이라고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데 스스로 왜 사는지 물을 필요가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과연 무엇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 물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한데, 그렇게 살면 사실 가슴에 늘 폭탄을 가지고 사는 셈이 되기 때문에 불안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의 이유에 대한 것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철학을 배우지 않고 어떤 종교를 믿고 있질 않아도 자신의 존재에 대한 본능적 가치를 느낀다. 즉, 누구나 자신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의미가 있거나 가치가 있거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누군가 찾아와서 당신의 몸을 지금 모두 분해하면 20명의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줄 수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하면, '미친 놈' 이라고 대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런 생각 없이 살다가 보면, 문득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아무런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문득 문득 불안해지고, 이것은 불행함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그것이 설령 어처구니 없거나 혼자만 주장하는 것이라고 해도 살아야 할 자신만의 이유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미 말했듯 왜 사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답을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왜 사는지 보다 어떻게 살지에 대한 생각을 해야 한다. 그것이 현재로써는 가장 현명한 생각이다.
 
왜 사는지는 이유에 대한 관점이지만, 어떻게 살지에 대한 것은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긴 하다. 문제는 그것이 매우 상황에 종속적이고 사건마다 단편적이란 것이 문제이다.
 
즉, 자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큰 흐름의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대부분은 상황에 따라 임시적으로 대처하고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각 상황에 따라서 매우 다른 반응을 나타나게 할 수 있어서 스스로 혼란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운전을 하기도 하고, 보행자의 입장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운전자의 입장일 때와 보행자의 입장일 때가 다른 반응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혹시나 사람과 차가 사고가 날 수 있는 상황이 생기면 서로를 욕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였느냐에 따라 반응이 다르다. 사원일 때와 사장일 때가 다르고 젊었을 때와 늙었을 때가 다르다. 물론 이런 변화는 당연한 것이긴 하다. 모든 상황에 동일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문제이다. 특히나 늙었을 때 젊었을 때의 모습이 그대로 있는 것도 문제다. 늙으면 좀 더 현명해져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근본적인 변화가 아닌, 그냥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급변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지에 대한 좀 더 본질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스스로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나름대로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즉, 왜 사는지에 대한 대안의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어떻게 살지에 대한 많은 도움말들이 있다. 그것은 책으로 강의로 영화로 연극으로 나오고 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끝없이 접하면서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오직 우리들 자신의 판단이 될 것이다. 단지, 어떻게 살 것인지에 생각은 평생을 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미리 결정을 하고 살아가게 될 경우, 우리는 일관성이란 명목 하에 고집불통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정답을 낼 수 없다. 그래서 평생 동안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사고의 유연성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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