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나를 보는 방법

아이루다 2015. 8. 10. 08:33

 
일반적으로 인간은 육체적 존재와 정신적 존재로 구성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이것은 많은 이견이 있기 때문에,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현 시대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보통 육체적 존재로써 인간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정신적 존재로써 인간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 인간이 가졌다고 알려진 정신이란 영역은 좀 더 큰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신을 그냥 흔히 말하는 '생각'을 하는 능력 정도로만 가정한다면,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정신이 육체처럼 명백한 분리된 실체인, '영혼'의 존재라는 것을 주장하게 될 때, 수 많은 이견이 표출될 수 있다.
 
세상에는 영혼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 반대로 이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실증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과학 쪽에서는 영혼을 부정하는 편이고 반대로 종교 쪽에서는 영혼의 존재를 긍정하는 편이다. 또한 일반 사람들 역시도 영혼이 없는 것보다는 있다고 믿는 편이 더 낫기 때문에, 동일한 상황이라면 있다고 믿길 선호한다.
 
하지만 사실 영혼이 없다고 해서 인간의 정신적 영역이 완전히 부정 당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영혼의 존재가 믿어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우리 정신이, 그것이 담겨 있는 육체의 죽음 후 별도로 존재할 수 있을지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 생전에도 죽길 바라지 않고, 죽은 후에도 사라지길 바라지 않는다. 아니, 바라는 수준이 아니라 두려워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꽤나 두려워한다.
 
영혼의 목적이 그런 것이기에, 우리는 정신을 영혼의 존재 유무로 무리하게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 그래서 영혼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정신적 영역이 없다는 뜻은 아니며, 또한 그래서 우리를 육체적 관점과 정신적 관점으로 나누어 바라보는 것이 그리 무리한 시도는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 두 가지 형태의 우리 자신을 어떤 식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물론 이런 과정을 육체적 행위인 '본다' 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육체도 그렇고 정신에 대해서는 특히 본다는 뜻이 매우 관념적인 표현일 수 있다. 사실 그래서 본다라는 표현보다는, 인식한다라는 뜻이 더 적합할 것이다.
 
즉, 이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인식할 수 있을까? 로 바꿀 수 있다.
 
우선 육체를 인식하는 방법은 무척 쉽다. 그것은 바로 거울을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몸을 거의 그대로 반사해주는 거울을 보고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이것을 상상이란 말을 쓴 이유는, 그 보통 우리가 쓰는 거울은 대부분 그 모습을 역으로 반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뒷모습을 정확히 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대충만 살피게 된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방법이다. 거울에 비해서 이 기술은 아주 최근에 개발된 방식으로, 많은 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담는 방법으로 이용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사진이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럼 이제 두 번째인 정신을 인식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과연 우리는 자신의 정신적 영역을 어떤 식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런데 먼저 이런 생각도 든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듯, 자신의 정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를 했을 지에 대한 의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거울을 통해 매일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듯, 자신의 정신 세계를 매일 바라보고 있을까?
 
이미 말했듯, 바라본다는 행위 자체는 원래 육체적 행위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오직 눈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눈 역시도 대상 사물을 보는 주체는 아니다. 눈은 단지 빛을 모아서 뇌에 전달하는 기능을 가진 신체적 장치일 뿐이다. 
 
그래서 본다라는 행위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바로 뇌의 영역이다.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신적 영역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인식' 이란 단어를 써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육체를 바라보는 것은, 육체를 정신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대상과 관찰자가 다른 상황일이라서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신을 바라보는 것은, 정신이 정신을 바라보는 행위이다. 즉, 대상과 관찰자가 동일한 경우라서, 사실 그것을 해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아니 상상하기도 힘들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사실상 정신을 바라본다는 행위 자체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처음 본 고양이와 같다. 고양이는 인간과 달리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바로 자신임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깜짝 놀래서 도망치기도 한다.
 
비록 우리 인간에게 고양이의 이런 행동은 재미있고 귀여울지는 모르지만, 사실 고양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 고양이는 정말로 어떤 두려움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이 고양이는 누군가 다른 고양이를 통해 거울이란 도구를 바라보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임을 배우기 전까지는, 계속 도망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바라볼 수 있다는,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고양이가 자신의 모습이 거울을 통해 반사될 수 있음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듯,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꽤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정신적 영역일 수 있는, 성격, 사고방식, 철학, 신념, 선악 등에 대해서 스스로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살아간다. 즉, 자신을 어느 정도 바라본 결과물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잘 바라보지도 않고서 그것들을 잘 알고 있을까?
 
이것은 육체적 존재로써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해봄으로써, 그것에 대한 의미있는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사진이나 거울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육체적 영역을 인식한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일까? 물론 사실 거울은 거의 완벽하게 우리의 모습을 반사한다. 하지만 이미 처음부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실제의 모습과 달리 좌우가 반전되어 있다. 즉, 우리는 늘 자신의 모습을 좌우로 뒤집어서 보고 있는 셈이다.
 
물론 사진은 그렇지 않다. 사진은 제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사진과 거울이 다르게 보이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자신의 사진을 자주 찍어 본 사람이 아니면, 가끔 거울과 사진의 얼굴이 달라서 이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보통 우리의 얼굴이 완전히 좌우대칭이 아니라서 나타나는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사진 역시도 빛을 담은 것 뿐이지, 결코 실체는 될 수 없다. 특히 그것은 기술적 차이로 인해서 많은 차이를 보일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모르지만, 사실 거울은 반사체이기 때문에, 우리를 완벽히 동일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 즉, 실체엔 거의 가깝지만 표면적인 완벽하게 매끈한 것이 아니라서 100% 동일한 것은 아니란 뜻이다. 이것은 사진도 마찬가지다. 그 모습들은 모두 유사한 수준일 뿐, 실체는 아니다. 사실 그래서 그림이나 거울이나 사진이나 모두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다.
 
즉, 우리는 그 어떤 수단을 이용해서도 자신의 진정한 실체를 볼 수 없다. 그나마 팔 다리는 볼 수 있지만, 우리는 절대로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아니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하면, 우리는 늘 실체가 아닌 무엇인가에 반사된 가짜를 보고 있는 셈이 된다.
 
이런 분석을 이제 정신적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에 대입시켜 보자.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적 영역을 어떤 과정을 통해서 정의할 수 있게 되었을까? 딱히 정신을 인식하는 과정도 밟지 않는데 말이다.
 
이때, 육체에 있어서 거울이나 사진의 역할을 하는 존재가 하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타인이다. 즉, 우리는 타인의 평가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정의가 된다. 흔히 말하는 타인이 자신을 비추는 거울인 셈이다.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렇게 정의된다. 물론 우리는 다른 이들의 평가와 상관없이 스스로 용감하다고 하거나, 정직하다고 하거나, 활발하거나, 외향적이거나, 나쁜 사람이거나, 거짓말쟁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은 타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혼자서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라고 우겨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하면 결국 거짓말쟁이가 된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고 하는데 혼자서 계속 정직하다고 주장하다가 보면, 정신병원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연기라도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정직한 듯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정직하다고 평가를 할 때, 비로소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즉, 우리는 좀 더 남을 잘 속일수록 정직해진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정말로 정직해진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더욱 남을 잘 속이는 사람이 되었을뿐이다. 즉, 더욱 더 정직하고 멀어진 것이다.

 
하지만 남들이 모두 정직하다고 인정했으니, 우리는 스스로를 정직해졌고 또한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의 정신 세계를 인식할 때 생겨나는 아주 흔한 현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에 대한 거대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원래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을 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즉, 남들이 인식하고 평가한 결과물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 인식한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리 쉬운 시작이 아니다. 이것은 과정도 힘들지만, 시작은 더욱 더 힘들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이미 다른 사람의 평가 속에서 자신을 충분히 보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울을 본 고양이가 그것이 자신의 모습임을 인식하는 과정처럼 힘들다. 한 번이라도 그것을 알게 되면 쉽지만,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상황에서 고양이가 거울 속 고양이가 자신의 반사된 이미지란 것을 알게 되긴 쉽지 않다. 특히 겁이 많으면 더욱 힘들다. 왜냐하면 도망치기 바빠서 앉아서 바라보려고 하는 시도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 역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실 살면서 많은 고민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고민의 대부분은 바로 자신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고민 내용을 보면, 누군가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걱정, 누군가 자신을 불필요하게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걱정, 누군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잘 안돼서 걱정,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 매력을 덜 느낄까 봐 걱정한다.
 
이것은 성격에 대한 고민, 능력에 대한 고민, 외모에 대한 고민 등으로도 나타나며, 이 모든 것은 자신의 경쟁력이나 혹은 매력의 측면에서 다뤄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모두 우리 자신의 문제이면, 타인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들이다. 즉, 우리는 모두 관계 속에서, 그 관계가 잘되길 바라기에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면서도 아닌 것이 된다. 이것은 사실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인식을 통해서 반사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즉, 우리가 관계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실제로 자신 스스로 보게 되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인식을 보는 셈이 된다.
 
그래서 이것은 육체를 인식하는 것에 비해서도 훨씬 더 비 실체적이다. 즉, 우리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상관없이 늘 반사된 것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특히 그 중에서도 정신적 영역에 대한 익식이 훨씬 더 심하게 왜곡되고 뒤틀려 있다.

 
물론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 인간이란 존재가 원래 그런 것이며,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식하는 것에 있어서 평생 동안 그렇게 사실상 거짓인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왜곡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스스로를 위해 좋은 일일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긍정적 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외모나 성격과 능력 등이 다른 이들에게 충분히 인정받을만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런 타인의 인식을 통해 자신이 정의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이 인정받을수록 더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사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더 많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자신의 모습에 대한 아주 깊고 오래된 열등감과 자기비하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세월이 지날수록 숨겨지고 변형되어서 그 원래 모습을 유추하기는 힘들지만, 잘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부터 겪은 패배감, 열등감 그리고 자기비하의 모습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대부분 다른 이들에 대한 분노, 비난, 비웃음, 멸시, 조롱, 비하, 무시 등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그 대상만 다를 뿐, 타인에 대해 이런 감정을 느낀다. 단지 오래된 훈련에 의해서 그것들을 대놓고 표현하지 않으려고 할 뿐이다.
 
이것을 좀 더 학문적 표현으로 하면, 우리가 느끼는 모든 우월감은 사실 열등감으로부터 발생하고 있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즉, 잘난 척을 많이 하거나 남을 자주 비웃는 사람일수록 속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비하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에게 거울은 아주 좋은 물건이다.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외모가 그리 잘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거울이나 카메라는 그다지 선호하는 물건이 아닐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타인의 의견은 행복함을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칼날로 베는 듯한 고통을 야기 시킨다.
 
우리는 그렇게 상처 입게 된다.
 
그래서 이런 상처를 방지하려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일단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행동이다. 그것은 육체적으로는 화장이나 성형수술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정신적인 영역에서는 흔히 말하는 착한 척, 친절한 척, 남을 위하는 척 하는 방법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자신을 더욱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화장을 진하게 하면 할수록, 화장을 지운 후 자신과 더욱 더 거리가 멀어진다. 그런 면에서는 성형수술이 좀 더 낫다. 하지만 그것은 부작용의 위험과 큰 돈이 든다. 특히 나이를 먹을수록 심각해질 수 있다.
 
정신적 측면에서 보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어떤 척을 하는 것 역시도 많은 스트레스를 유발시킨다. 착하지 않은 사람이 착한 척 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원래 그 자신일 때, 행복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 두 번째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비록 정신적 영역에 대한 접근이지만, 잘되면 정신적 영역뿐만 아니라 육체적 영역까지 좋은 효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자신에 대한 정의를 스스로 내리는 것이다. 물론 근거 없이 스스로를 정의 내리는 것은 이미 말했듯 정신병원에 가기 딱 쉬운 조건이 되고 만다. 그래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시간이다.
 
물론 이미 말했듯 이것은 과정도 힘들지만 시작조차 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설령 시작한 사람이라고 해도 하다가 지쳐서 포기한다.
 
그리고 시작한 사람이 포기한 이유는,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는 일이 생각보다 많이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미 다른 사람들의 입바른 칭찬이나 우리가 기존에 한 연기에 속아서 자신을 좋게 평가해주는 사람들로 인해 정의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진하게 한 화장을 지우고 원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과정과 같다.
 
사실 사진이 좋은 이유가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어떤 한 순간에 자신의 좋은 표정을 잡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명이나 배경 등에 따라서 많은 차이를 보이며, 만 장의 사진을 찍어서 단 한 장의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신을 대표하는 사진이 된다. 그래서 탈락된 9,999 장의 사진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이젠 버린 사진을 다시 바라봐야 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부정하고. 무시하고. 보려 하지 않았던 어리석고, 욕심 많고, 이기적이고, 유치하며, 못난 자신을 봐야 한다.
 
과연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까? 그래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한 사람들은 자기 비하에 휩싸이고, 우울해지며, 스스로 왜 사는지가 궁금할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중단하든지 포기하든지 한다.
 
그래서 시작도 어렵고 과정도 이리 힘든 이런 과정을 겪는 것이 과연 옳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비록 실패를 하더라도 남는 것은 있다. 그것은 그래도 자신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봤기 때문에 상상 속의 자신과 현실의 자신의 차이가 조금이라도 줄어든다. 이것은 화장을 좀 덜 진하게 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화장이 지워진 후, 좀 덜 충격을 받는다. 운이 좋다면, 화장을 안하게도 된다.
 
그리도 더해서 다른 이들의 평가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진다. 또한 그들 역시도 그런 벗어날 수 없는 고리에 묶여 산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들의 외부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고 무작정 동경하는 버릇도 줄어든다.
 
우리는 좀 더 우울해지겠지만 우리는 좀 더 진지해질 수 있다. 또한 보지 않고 넘겼던 수 많을 것들을 볼 줄 아는 여유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비록 그 시도가 실패하더라도 가질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오늘도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고, 남들의 눈에 비친 자신을 본다.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고 깨어나지 못하는 한, 평생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을 어떤 면에서는 실제가 아닌 가짜의 존재로써 살게 된다. 거울에 비친 상은 실체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평가되는 우리들의 모습 역시도 실체가 아니다.
 
특히나 사람들은 모두 각자 다른 평가를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평가에 더 많은 의미를 둘수록 더욱 더 혼란스럽기만 하다. 같은 사람을 두고 누군가는 착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이기적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런 평가들 중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생각하려고 무척 노력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비판에 의해서 늘 괴롭힘을 당한다.
 
우리가 마음을 쓰는 것은 백 마디의 칭찬이 아니라, 단 한마디의 비수와 같은 비판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갈등을 하고 고민을 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된다.
 
나를 바라보는 방법은 누구나 알고 있는 흔한 것이지만, 진정한 나를 바라보는 방법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금을 인식해보기  (0) 2015.08.28
지식을 받아들이는 세 단계  (0) 2015.08.18
우리가 행복하기 힘든 이유  (0) 2015.07.31
불행하지 않는 삶  (0) 2015.07.27
인간의 한계점, 욕망과 행복  (0) 2015.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