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지식을 받아들이는 세 단계

아이루다 2015. 8. 18. 07:26

 
인간은 살아가면서 평생 지식을 쌓는다. 그리고 이 지식은 단지 책을 읽거나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냥 다양한 형태의 정보를 의미한다. 컴퓨터를 다루는 법이나, 세탁기로 빨래를 하는 법, 주방 칼을 다루는 능력, 시장에 가서 어느 집에 싸고 품질 좋은 채소를 파는지를 아는 것도 모두 지식의 일종이다.
 
그런데 이 지식은 크게 세 단계에 걸쳐서 우리에게 쌓인다. 이 중, 세 번째 단계는 조금 이해가 어려우니, 먼저 앞의 두 단계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우선 어떤 것이나 무엇인가에 대해 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단순히 생각하면, 학교에서 배운 지식들을 떠올릴 수 있다. 국어 시간에 배운 연음법칙이나 수학시간에 배운 근의 공식이나 화학시간에 배운 공유결합과 같은 용어에 대한 이해는,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바나나를 까 먹는 법이나, 커피를 주문하고 마시는 법, 아몬드를 사서 먹는 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책으로, 경험으로, 이미 아는 이들을 따라함으로, 누군가의 구체적인 설명으로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해보자. 이제 학생의 입장이 아닌, 선생님의 입장에서 배움이란 과정을 보자. 그렇다면 과연 선생님은 무엇을 느끼게 될까?
 
경험이 아주 많은 선생님들은 덜하겠지만, 이제 갓 부임한 선생님은 학생들을 가르칠 때, 자신의 학창시절을 떠올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어떤 생각으로 지식을 접하고, 또한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이미 경험한 사람으로써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나나나 아몬드, 커피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을 사서 먹는 입장과 파는 입장과 실제로 제배를 하는 입장에서 그것들은 모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농장에서 바나나를 키우고 따거나, 커피나무를 키우거나, 아몬드를 재배하고 상품화를 위해 껍질을 벗겨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매우 힘든 노동을 의미할 수 있다. 그것을 파는 입장에서 바나나는 어디선가 치열한 경매를 통해 사와서 제때 팔지 못하면 결국 돈만 날린 꼴이 되는 상품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 먹는 사람 입장은 달콤한 과일일 수 있다.
 
비슷한 원리로 아이들은 보통 커서 부모가 된 후에, 자신의 부모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 아이일 때, 부모라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히 부모라는 말을 이해했고, 엄마, 아빠의 의미를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부모가 되었을 때,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부모라는 존재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봤을 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이때 엄마 아빠라는 말이 가진 의미는 완전히 새롭게 쓰여질 수도 있다. 실제로 경험을 한 후, 깊은 이해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고깃배를 타고난 후, 한달 이상을 심한 고생을 하면서 생선을 잡아 온 초보 선원은, 뭍에 내린 후 생선가게에서 파는 물고기들이 과거처럼 맛있어 보이는 횟감으로만 보이지가 않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그런 물고기는 자신이 겪은 그 심한 고생의 결과가 된다.
 
군대를 다녀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군대를 가기 전, 군복을 입은 사람들은 물론 군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군대에 있는 동안에 휴가를 나오거나 혹은 제대를 한 후 본 군인들에 대한 인식은, 그것을 경험하기 전과는 딴판으로 달라진다.
 
아이를 낳아서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부모들은, 생각보다 보도를 다니고 있는 유모차가 많이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임신을 해서 배가 나온 임신부들은 지하철을 탔을 때, 노약자 석에 앉아 있는 것이 꽤나 불편하고 눈치 보임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예를 통해서 지식을 받아들이는 두 단계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정보의 단계와 경험의 단계이다.
 
정보의 단계는 그것이 무엇이든 그냥 알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빨간색 신호등과 초록등은 도로에서 신호를 제어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것이 신호등임을 알고 있고, 각 색상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신호등이 과연 어떤 원리로 동작되고 있는지, 신호등 제어기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단지 신호등에 따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왜 신호등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조차 그다지 깊은 생각을 해보지 않는다.
 
요즘은 스마트 폰 때문에 폰을 보는 상태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이 꽤나 된다. 사실 그 순간 그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아마도 자신의 앞에 놓인 스마트 폰 속의 정보가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요즘 시대엔 그런 행동이 아주 많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것이 가능하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잠재적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는 행동이다. 횡단보도는 도로 위를 빠르게 달리는 차를 멈추고 사람이 그 길을 건널 수 있도록 해주는 방법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위험하다. 또한 신호등은 온전히 100%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해서 신호를 지키지 않는 차량은 꽤나 많다.
 
우리가 신호등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질서이기 때문이 아니다. 초록불이라서 건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노력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은 동일하다.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명은 똑같이 중요하다.
 
지식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해당 지식에 대해 표면적인 이해만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 정보를 직접 경험하고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좀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 둘은 가끔 서로 심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그것을 전문 용어로 '인지부조화' 라고 한다. 인식한 것과 아는 것이 서로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예전에 들었던 어떤 에피소드로써, 과거 한참 무상급식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두각 되었을 때, 보통 현재 여당을 지지하는 노년층에서 무상급식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지지가 있었다. 그리고 지하철 안에서 노인 분들이 모여서 그 얘기를 했던 모양이다. 그분들은 아마도 무상급식과 같은 복지를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노인 분들은 정작 자신들은 지하철을 무상으로 타는 복지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즉, 무상승차와 무상급식은 사실상 같은 목적의 복지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들이 지하철을 공짜로 타고 있다는 지식과 자신들이 반대하는 무상급식이 가진 의미에 대해 거의 이해를 하지 못하는 상황의 정보수준에서 비판을 위한 비판이 이뤄지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며칠 전 본 드라마에서, 어떤 의사에게 환자에게 매우 위험할 수 있는 검사 방법을 보호자에게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 드라마에서 어떤 의사는 상대 의사를 보호자로 가정하고 보호자를 설득할 연습을 하는데, 상대인 보호자 역을 맡은 다른 의사의 한마디에 아무 말도 못하고 포기하고 만다.
 
설득하려고 하는 의사는, 검사의 중요성과 필요함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하지만, 듣고 있던 상대 의사는 '그 검사를 당신의 자녀에게도 권할 수 있을지를 맹세할 수 있느냐' 라고 물어 본 후 상황을 끝낸다. 설득하려는 의사가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도 비슷한 상황이다.
 
의사로써 해당 검사에 대한 이해와, 환자의 부모로써 해당 검사의 이해는 천지차이가 된다. 사실 이것은 어느 정도 필요한데, 만약 의사들이 모두 환자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면, 도대체 병원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의사들은, 자신이 정말로 병에 걸렸을 때야 비로소 제대로 환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무척 큰 차이다. 우리가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를 잘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이해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보통 이해는 경험을 통해 이뤄진다. 대학과정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걸쳐 아무리 오랫동안 아이를 잘 키우는 법을 배운 사람으로써 다른 문제가 있는 가족과 상담을 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도, 실제로 자신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는 경험을 해볼 때, 자신이 알던 모든 지식이 무너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자신도 누군가에게 상담을 받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경험을 통해 이해하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해 깊은 이해가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에 좋지만,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것을 경험해보는 일은, 경험해보지 못하는 일에 비해서 아주 적다.
 
우리들 대부분은 지하철을 운행해 본적이 없다. 우리들 대부분은 버스를 운전해 본적도 없다. 우리들 대부분은 콜 센터 직원이 되어 본적도 없고, 비행기를 몰거나 100M 단거리 육상선수가 되어 본적은 더더욱 없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거의 대부분의 지식을 단지 용어의 이해 수준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은 앞에서 예를 든 무상급식에 대한 노인 분들의 입장이나, 환자를 설득하려는 의사의 입장처럼 많은 오해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정보 수준의 지식은 반드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좀 더 많은 생각과 다른 이들이 적은 간접 경험을 통해서 이것에 대해 직접적 경험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깊은 이해는 할 수 있다. 단지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책과 영화 그리고 다른 이들의 경험담을 듣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그건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좀 더 세상을 이해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어떤 지식을 정보의 수준에서 끝내는 것보다는 인식하고 이해하는 수준까지 나갈 수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다면, 실수를 줄이고, 의미를 잘못 해석해서 불필요한 고집을 피우는 일 등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사실 고집이란 말 자체가 바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이다. 우리는 그냥 행복하기 위해서 살 뿐이다. 만약 고집을 피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틀어지게 하면, 그것은 스스로 손해를 입히는 행위가 되며, 결국 불행해질 뿐이다. 고집 자체도 행복하기 위해서 한 행동인데,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 불행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제 마지막으로 지식을 받아들이는 세 번째 단계를 설명하도록 하겠다. 일단 먼저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무척 힘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 세 번째는 바로 각성이다. 이것은 정보와 이해 단계를 훌쩍 넘어서, 그것이 가진 진정한 본질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매우 어렵고 애매모호한 단계이다. 무엇보다도 이 세 번째 단계까지 넘어가서, 어떤 지식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그리고 보통 이렇게 이해된 지식은 지식의 범위를 훌쩍 뛰어 넘는다.
 
지식은 그것을 알고 이해하는 단계에서 정보가 된다. 그리고 이 지식에 경험이 더해져서 좀 더 깊은 이해가 되면 그것은 바로 지혜가 된다. 이것이 이미 많이 설명한 앞의 두 단계이다. 그리고 이 지혜가 좀 더 본질적인 이해가 이뤄지는 각성의 단계를 거치면, 진리로 변한다.
 
그리고 진리로 변한 지식은 그 자신에게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나도 역시 각성의 단계를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설명 역시도 단지 지식 단계의 설명에 불과하다.
 
보통 사람들은 밤하늘을 볼 때, 별과 별똥별을 보면서 낭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천문학자들은 별을 보고 별자리를 그리며, 어떤 자리에 있는 어떤 별의 이름이 무엇인지 또한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떠올린다. 아니, 사실 천문학자 수준이면, 눈에 보이는 별을 연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대한 망원경을 통해 눈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별들을 연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그들은 우주라는 거대한 대상을 연구 하다가 보니,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작고 연약하며 또한 존재감 없는 생명체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겸손해질 수 있다. 즉, 지식이 지혜로 변하게 되는 과정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우주 그 자체를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왜 존재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이 거짓인지 참이지 알 길이 없이, 그들은 스스로 진리를 말한다고 한다.
 
이것이 별이 정보에서 지식과 지혜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리로 변화되는 과정이다.
 
세상을 살아갈 땐, 지식을 이해하는 두 번째 단계인, 경험과 이해를 기반으로 한, 지혜의 단계에만 올라 설 수 있어도 세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고 살 수 있다. 그래서 딱히 세 번째 단계를 가려고 노력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가 가진 한계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알고 싶다면 세 번째 단계를 고민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지식에 대한 정보적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추가적으로 배우고 경험해야 할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삶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진리는 아니더라도, 기왕 사는 거, 좀 더 인간답게 살아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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