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간의 한계점, 욕망과 행복

아이루다 2015. 7. 24. 08:06

 
그간 많은 글들에서 욕망과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 그것을 단순히 표현하면, 욕망은 시작이고 행복은 끝이다. 즉, 우리는 욕망을 만들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한 후, 운이 좋다면 행복해진다.
 
물론 욕망은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욕망은 대부분 만들어진다. 기본적 욕구들인 식욕, 성욕, 수면욕, 배변욕 등을 제외하고도 어떤 제품을 사거나, 어디를 여행하고 싶다는 욕구들도 광고나 아는 지인이 좋다는 경험담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진다. 우리는 보통 그것을 능동적인 욕망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많은 욕망은 대부분 주입된 것이다.
 
아무튼 욕망과 행복은 인간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우리 인간의 삶은 그 테두리에서 단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왜일까? 우리는 왜 이런 식으로 살아가게 설계되어 있을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우리는 행복을 원하는데, 그 행복이 욕망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가끔 욕망이란 단어를 희망이나 바램 혹은 꿈 등의 용어로 바꿔서 부르면서 좀 더 좋은 것으로 포장하려고 하긴 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다를 것이 없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시작은 행복을 얻기 위한 목적이 된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좋은 친구를 만난다. 좋은 친구를 만나서 행복한 것이 아니다. 이미 현재가 충분히 행복하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다른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다른 일을 하는 이유는 오직 현재의 행복이 기대에 못미치거나, 미래에 다가올 불행함에 대한 압박뿐이다. 즉, 걱정이 되면 행복한 상황을 끝낸다. 또한 경험으로도 안다. 그토록 행복했던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지루해지고 말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보통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해서 행복하다고 착각하곤 한다. 사실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과 하고나니 행복하는 것의 차이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과 일을 하니까 돈을 버는 것으로 변환시켜 보면 훨씬 쉽게 차이점이 이해가 간다.
 
모든 것이 그렇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서 행복하다고 느낀다. 원래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할 때는 아주 큰 스트레스를 받거나 화를 내게 된다. 그나마 약간의 예외가 있다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서 안 하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생각보다 행복한 경우이다. 하지만 그 조차도 처음부터 그 행동에 대한 기대치를 낮췄기에 상대적으로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행복하기 원할까?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는 가장 중요하고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살기 위해서이다. 사실 이 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인간 자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아니 모든 생명체는 매일 죽음을 향해 간다. 즉, 우리의 미래는 생명체에게 가장 불행할 수 있는 죽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에 대항을 해야 한다. 그냥 두면 죽는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삶을 연장시킬 방안이 필요하다.
 
식욕은 아주 전형적인 예가 된다. 우리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하는 욕구도 있지만, 사실 그것은 상황이 될 때나 느낄 수 있는 욕망이다. 그리고 사실 맛있다는 판단 자체도 생존에 매우 종속적이다. 우리는 우리 몸이 더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을 맛있다고 느낀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은 모두 생존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먹지 못하거나, 자지 못하거나, 똥을 싸지 못하면 죽는다.
 
그리고 또 언제 인간이 죽을까? 잘 생각해보자. 우리는 또 언제 죽을까? 그것도 스스로 말이다.
 
우리는 불행이 심화되고 희망이 없으면 죽는다. 즉, 우리는 현재 어떤 욕망도 실현하기가 힘든 상태이고, 그것을 미래에도 그럴 것 같으면 죽는다. 우리는 우울하면 죽는다.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의욕을 느끼지 못하고, 행복을 기대하기가 힘들면 죽는다.
 
인간이 자살하는 이유를 생각하면, 우리가 왜 행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이 나온다.
 
사실 불행은 심하게 행복하기 못한 상태이다. 즉, 불행은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니라, 행복의 부재상태이다. 그것은 마치 어둠과 같다. 어둠은 빛의 부재상태이기 때문이다.
 
행복함이 없는 인간은 살아가기가 힘들다. 죽음에 대항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버티고 살다가, 감당하기 힘든 불운이 찾아오면, 그것을 버텨낼 수 없다. 그래서 가장 큰 불행을 스스로 실현한다. 즉, 자살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행복할 때, 우연히 찾아오는 불운을 견뎌내거나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몸에 있는 여분의 영양분 같다. 우리 몸은 여분의 지방을 축척해둠으로써 수십 일을 굶어도 죽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모든 종류의 행복함은, 행복함 그 자체도 좋지만 결국 어느 날 찾아 올 불운함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 그리고 이것은 생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결국 우리는 죽기 때문에 끝없이 행복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죽음이 있기에 삶이 아름다운 것과 같다. 진짜 꽃과 만들어진 꽃은 보기엔 비슷할지 모르지만, 둘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이 사실은 왜 우리 인간이 끝없이 행복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가 되어 준다. 그리고 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욕망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도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이고 그래서 죽음의 반대편으로 이동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실 어렵지도 않은 이야기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 모두가 자동으로 이동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 끝엔 누구나에게 동등하게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끝에 조금이라도 덜 가까워지려면 끝없이 이동하는 방향의 반대 편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산다고 말해지는 과정이며, 그것을 위해 행복을 추구한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 원리는 영생에 대한 우리들의 잘못된 상상을 바로 잡아준다. 진정한 의미의 영생은 저주가 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죽지 않는 자는 행복할 수도 없다.
 
그나마 영생이 행복 하려면, 죽을 수는 있어야 한다. 즉, 고통을 느껴야 하며, 늙거나 병들어 죽지는 않겠지만, 사고를 당해서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는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한 의미로는 영생이 아니다. 1억년을 살면서 단 한번의 사고를 당하지 않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서 수 많은 일을 한다. 시간이 매정하게 끝없이 흘러가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매 시간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또한 그것이 하기 싫은 일이라고 해도 하게 된다. 무한대의 미래가 있다면, 오늘 그것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있다면 재미있거나 즐거운 일이야 한다. 하지만 재미있고 즐거운 일은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는 결국 지루해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직장을 다니거나 장사를 하는 등의 각종 경제 활동을 하는 이유가 바로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나 행동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모든 것보다 우선한다. 그리고 먹고 사는 일이 어느 정도 충족되면, 이젠 본격적으로 스스로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인간은 동물과 구분된다. 동물들은 먹고 사는 일에서 멈춘다. 하지만 인간은 먹고 사는 일을 충분히 해냈고 그 덕분에 여유 시간이란 것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젠 존재의 이유를 갖고 싶어한다.
 
여기에서 존재의 이유는 사실 진리일 필요는 없다. 그냥 스스로 납득하고 감정적으로 느낄 수 있으면 된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자신의 삶이 중단되면 안 되는 이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스스로가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 이길 바란다.
 
물론 이것을 적극적으로 찾는 사람도 많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에게 그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다. 심지어 우리는 밥솥에 남겨둔 밥이 있어서 내일까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그것은 월말에 받을 월급이나, 내년에 갈 해외 여행, 노후를 보낼 계획을 가진 전원주택에 대한 기대일 수 있다. 좋은 사람들과의 교류나 읽고 싶은 책, 해보고 싶은 일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이란 존재는 최고의 가치가 되어 준다.
 
사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의 정체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가치를 정말로 가치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 가치는 스스로 납득하는 존재의 이유라고 보는 것이 옳다. 가치는 우리가 누구나 가진 자아, 즉 에고의 가장 큰 희망사항이다.
 
우리는 가치가 있기에 죽을 수 없다. 그래서 여러 명 중 한 명이 죽어야 할 때, 만약 스스로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설명하라고 한다면, 꽤나 적극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이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는데 주력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아끼는 가족 중에서 한 명이 죽어야 한다면, 자청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엄청난 가치를 부여한 존재의 사라짐을 참기 보다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치는 스스로의 죽음마저도 뛰어 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가치에 대해서 절대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즉, 어떤 가치들은 죽음보다도 더 위대하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자아의 저울질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과 중요한 가치의 부재가 가져 올 고통을 양편에 두고 저울질 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이가 죽는 것을 보는 것과 자신이 대신 죽는 것을 저울질한 후, 자신의 죽음을 감당하는 것이 좀 더 낫다 싶으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이 그 대상에 얼마나 큰 가치를 부여했는지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어떤 부모들은 자식의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아무튼 자신의 목숨과 가치를 바꾸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인간 사회에서 회자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마치 절대적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존재인 냥 착각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 인간은 절대적 가치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종교나 신념, 가족과 같은 것으로 개개인마다 다르게 포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심화될수록 마치 우리는 우리가 가진 본능, 즉 죽음을 멀리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의 모든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착각을 하기 이르렀다.
 
생명체가 생명의 가치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치는 단지 가치일 뿐이다. 그것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그것은 그저 그 자신에게만, 혹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통용될 뿐이다.
 
또한 이렇게 과대 포장된 가치는 이젠 비교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독성 물질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질투라고 부르는 감정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를 느낀 대상을 다른 사람의 그것과 비교하고는 질투심을 느낀다. 아이를 키우는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자식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한다. 돈의 가치는 훨씬 더 심각하다. 돈의 가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돈에 질투를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것에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하면, 관심이 없고, 관심이 없으면 질투를 느낄 이유가 없다. 질투는 온전히 불완전하게 충족된 가치로부터 나타난다.
 
또한 가치는 다른 이들의 가치와 충돌한다. 그래서 수많은 갈등이 생겨난다. 그래서 누구는 동성애를 지지하고, 누구는 동성애를 저주한다. 누구는 정의를 추구하고, 누구는 끝없이 자신의 이득을 챙긴다. 누구는 산을 오르고, 누구는 게임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살기 위해서 우리는 끝없이 경쟁을 해야 한다. 버스를 탈 때도, 놀이공원에 가서 놀이기구를 탈 때도, 식당에 가서도, 학교나 직장에서도, 차를 몰고 갈 때도 우리는 늘 경쟁을 한다. 그 다양한 경쟁들이 모두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그 모든 것이 모여서 우리를 생존할 수 있게 해준다.
 
결국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가치를 추구하고 행복을 원한다. 하지만 이것을 경쟁과 갈등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스트레스를 느끼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견뎌내면서 살아간다. 그나마 돈이 많거나 주어진 권력이 강하다면 경쟁과 갈등에서 좀 더 쉽게 이길 수 있기 때문에 돈과 권력에 대해서 강한 욕망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행복은 결국 찾아올 죽음에 대한 지연이고, 그것을 유지해주는 가치는 결국 그 자신만의 것일 뿐이다. 즉, 말 그대로 헛것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직 만족만 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렀을 때, 후회 없이, 회한 없이 떠나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모두 거짓이고 헛짓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사실 그렇다고 해도 칠판에 써진 글씨처럼, 써진 그 순간만큼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 시간이 오면 금새 지워지고 없어질 칠판 글씨지만, 그 수업 시간 내에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지 우리는 그 글씨가 천년, 만년 영원할 것이라고만 믿지 않으면 된다. 글씨는 언젠가 지워지고, 그 글씨를 옮겨 적은 학생들의 노트 역시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그 글씨를 본 학생들의 존재들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의 전부일까? 우리가 선택 가능한 그 모든 것일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다른 해답은 분명히 존재하긴 한다. 과거로부터 인간은 자신의 무의미성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해왔고, 좌절하고 분노하고 엉뚱한 해답을 내놓기도 했다.
 
그 중에서 아직도 명확히 검증되지 않는 해답이라고 알려진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각성이나 혹은 깨달음의 길이다.
 
사실 깨달음은 불교만의 해답은 아니다. 종교의 나라라고 알려진 인도에서 이것에 믿음은 불교와 상관없이 아주 널리 퍼져있다. 어떤 면에서 불교는 새롭게 그 해답을 찾은 것이 아니라, 인도에서 태어나 그 해답을 찾은 한 사람이 그것을 외부에 전파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부처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도 그런 존재로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 잘 살펴보면, 부처와 예수는 매우 비슷한 언행을 보였다. 그리고 그 둘 모두 자비와 사랑이란 것을 강조한 것도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이것은 미확인된 해답이다. 단지 우리는 우리 인간의 시작과 끝인, 욕망과 행복의 한계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유일한 해답의 존재의 가능성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일반 사람은 시도조차 해보기 힘든 해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임을 증명 받는 '자아'의 존재가 소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아의 소멸은 바로 욕망과 행복이란 것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고 만다.
 
사실 그래서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명확한 것이긴 하다. 우리 내부에 있는 자아를 소멸시키면 당연히 인간이 가진 한계를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 후가 된다. 자아가 소멸은 생존의 본능 자체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자아가 만들어 낸 욕구인데, 그것이 사라지면 당연한 결과이다.
 
과연 누가 그것을 원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물론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은 그 길을 갈 수 있길 바라고 있긴 하겠지만, 그들 중 정말로 그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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