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이루다 2015. 9. 4. 14:24


 

잘 살고 있던 어느 날,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 그리고 전화를 받자마자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기에, 당신은 전화를 끊으려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이 질문에 꼭 대답을 해야 할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과연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당신뿐만이 아니라 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을 할까?

 

"저는 불광동에 사는 김씨 입니다"

 

"저는 대학교 3학년 학생입니다"

 

"저는 오금동에서 세탁소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취업 준비 중입니다"

 

"저는 영훈 엄마예요"

 

"저는 우리집 둘째예요"

 

"저는 김동훈씨의 아내입니다"

 

"저는 주식회사 눈과개울물의 대표입니다"

 

"저는 해병대 몇 기입니다"

 

"저는 지난 10년간 중국에서 일하다가 얼마 전 귀국한 사람입니다"

 

"저는 23살 먹은 김말숙입니다"

 

"저는 살인자입니다"

 

"저는 제 45차 미스코리아 입상자입니다"

 

"저는 충남 아산 출신입니다"

 

"저는 58년 개띠입니다"


"저는 전직 국회의원입니다"

 

사실 이런 종류의 대답은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머니가 즐겨보시기에 가끔 보게 되는, 일요일 정오쯤에 하는 전국 노래자랑 이란 프로그램이 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에 참가 하는 일반 참가자들에 대한 설명으로써, 그들의 이름과 사는 동네나 혹은 직업이나 소속 학교가 소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연예인이 아닌 다음에야, TV를 통해 나오는 일반 사람들의 소개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보통은 이름과 함께, 나이 정도 등이 표시된다.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서 이름도 가명인 경우가 많다.

 

아무튼 한 개인에 대한 이런 모든 종류의 설명이 과연 "당신은 누구십니까" 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로 누군가의 아빠나 엄마, 직업, 사는 동네, 이름, 하고 있는 일, 소속된 단체 등을 통해서 자신을 정의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을까?

 

물론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 동네 사는 어떤 성씨나, 누구 엄마, 어떤 직장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 등의 설명으로 누군가를 정의하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겹친다. 즉, 이런 설명은 혼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느 회사의 사장처럼 그 당시는 혼자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 자리엔 다른 사람이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완벽한 유일성을 느낀다. 또한 자신이 아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 친구 중에 이영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친구는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이며, 아마도 이 우주가 무한하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우주적 역사 속에서도 유일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원리도 우리들 자신도 마찬가지다. 설령 누군가가 나를 다른 사람과 닮아서 착각을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그런 착각을 하지 않는다. 유전자 복제 기술로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들어서 보여준다고 해도, 그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다른 모든 사람이 둘을 두고 헷갈려 하더라도 말이다.

 

심지어 기억 복제술이란 기술이 생겨서, 외모도 똑같고, 기억도 똑같고, 성격도 똑같다고 해도 그렇다. 너무 똑같아서 우리를 아는 모든 사람이 둘을 두고 전혀 구분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각자의 나는 자신이 진짜라는 것을 안다. 단지 객관적으로 판단되지 못할 뿐이다.

 

이렇듯, 명확하고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우리들 자신은 왜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뭔가 정확하고 유일한 대답을 하기가 그리 어려운 것일까?

 

조금 더 이런 상황을 비판적으로 말하면, 평소엔 그리 스스로 다른 존재들과 완전히 구별된다고 믿고, 자신만의 개성을 추구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른 어떤 고유함을 가진 존재인지 설명하라고 멍석을 깔아 주면, 결국 누구 엄마, 대학생, 취업 준비생 등으로 자신을 설명하고 만다.

 

물론 이것은 자신의 개인적 정보를 설명하기 싫은 마음이 있어서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어딘가 처음 모임에 나갔거나 신입 사원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가 왔다면, 그때는 무슨 말로 자신을 소개할 것인가?

 

취업 준비를 위해 쓴 자기 소개서처럼, 25년 전 엄격하신 아버지와 자식 사랑이 가득했던 어머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설명할 것인가? 혹은 토익이 몇 점이고, 어떤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며, 해외 유학을 갔다 왔는지, 어디에서 인턴 경험을 했는지를 설명할 것인가?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으며, 결혼 유무, 애인이 있는지, 전공을 무엇을 했는지, 좋아하는 색이 무엇인지, 자동차는 어떤 차를 몰고 있는지, 관심 있는 분야, 정치적 견해, 최근 본 재미있었던 영화, 가장 기억에 남는 책, 존경하는 인물, 인생의 가치관 등등을 설명하면서 자신에 대한 정의를 내릴 것인가?

 

물론 자신이 모는 자동차의 종류나, 연봉, 다니는 회사 이름, 토익 점수, 졸업한 대학교 이름을 말하면서 자신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가장 좋아하는 계절, 재미있게 본 영화, 책 등을 설명하는 것이 좀 더 나아 보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그것들이 무엇이 다를까? 그것들이 정말로 우리들 자신을 정의 내릴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일까?

 

사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알고 있기에 이렇듯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도 이 질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 중에서 지속적으로 객관적인 정보들을 통해 나 자신을 정의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대학교를 나왔는지, 어느 회사에 다녔는지, 돈은 얼마를 벌었는지, 어디에 집을 가지고 있는지, 평소 생각하는 정치적 견해, 사회 문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 인간에 대한 개인적 견해 등을 통해 나를 표현해왔지만, 정작 나 자신은 누구인지를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다.

 

즉, 인간의 범주에 속한 나 자신으로써, 나를 바라보긴 했지만, 정작 내가 어떤 존재로 정의되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거의 객관적 자료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내가 찍은 사진, 쓴 글, 했던 경험 등을 통해 표현은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나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그냥 그것들이 모두 모여서 나를 정의하는데 도움을 준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과연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떤 존재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전승된 이야기 중에서 '옹고집 전' 이란 이야기가 있다. 놀부에 버금가는 자린고비에다가 못된 옹고집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화가 난 어떤 도승이 지푸라기로 외모와 기억이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들어 보내어, 결국 원래 진짜 옹고집이 자신의 집에서 쫒겨 나게 만드는 얘기다.

 

이때 진짜와 가짜가 서로 옹고집이라고 우기면서 다툴 때, 각자 기억을 가지고 자신이 진짜라고 증명하려고 할 때, 진짜는 결국 가짜에 비해서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해서 가짜로 판명 받게 되어,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 거지가 되고 만다.

 

물론 이것은 허구의 이야기이니, 우리들에게 일어날 일은 없겠지만,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우리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집에 찾아와 자신의 아내 혹은 남편과 자신의 아이를 가족이라고 부르면서 아끼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때 무엇을 근거로 상대가 가짜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혹은 자신은 절대로 가짜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사실 진짜로 그런 상황이 되어,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슬며시 들지도 모르겠다. 물론 표현은 안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어서 다행인 것일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미래의 세상엔 이것이 마냥 불가능한 일도 아닐 듯 싶다.

 

사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근접한 답이라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이때 자신의 스펙, 직장 명, 연봉, 차의 종류, 가지고 있는 명품 가방의 개수, 해외 여행 횟수, 가진 재산, 가지고 있는 집의 가격, 아이의 성적 등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그리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언제든 상황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은 언제든 변하고, 차도 역시 시간이 되면 바뀐다. 집안에 우환이 닥쳐서 가진 돈이 다 없어지고 나면, 돈을 통해 정의되었던 자신은 금새 사라지고 만다. 차도 가방도 시계도 집도 없어지게 되면, 도대체 그땐 무엇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을까?

 

그나마 우리는 좀처럼 없어지기 힘든 우리의 머리 속에 넣어둔 기억 등을 통해 정의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기억이 소멸되는 알츠하이머와 같은 특별한 병에 걸리지 않는 한, 유지된다.

 

그것은 좋아하는 색, 계절, 기억에 남는 여행, 첫 사랑,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추억, 평생 변치 않을 것 같은 관계, 즐기는 취미,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 마음에 평생 담고 살아가는 좋은 말씀 등이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는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기도 한다.

 

* * *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들은 가장 긴요한 것은 물어보는 적이 없다.


  "그 애 목소리는 어떻지? 그 애가 좋아하는 놀이는 무엇이지? 나비를 수집 하는지?" 라는 말을 그들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나이가 몇이지? 형제는 몇이고? 체중은 얼마지? 아버지 수입은 얼마야?"


하고 그들은 묻는다. 그제서야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턱에서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분홍빛의 벽돌집 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 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아, 참 좋은 집이구나!" 하고 소리친다.

 

* * *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설명할 때도 그렇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설명할 때도 그렇다.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 결혼 유무, 자녀가 몇 명인지, 어디에 사는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디 출신 인지를 설명함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한다.

 

물론 어떤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가 무엇인지를 안다고 해서, 혹은 내가 어떤 놀이를 좋아한다고 상대에게 설명한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완전한 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냥 근사치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정말 제대로 된 답을 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평범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설령 그 사람이 '저는 사람입니다' 라는 아주 흔하고 평범한 답을 했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말한 어떤 스님의 화두처럼 그럴 것이다. 평범한 말이지만, 누가 그 말을 했느냐에 따라 그 표현이 품고 있는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하지만 우리들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그것은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말했던 예수의 말씀과도 비슷하다. 우리는 누구나 그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하는 말은 그저 말일 뿐이다. 그것을 아무리 반복해도 예수와 같은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타협을 해야 한다. 그리도 아끼고 소중한 우리들의 정체를 그나마 어느 정도 설명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또한 그런 자신을 다른 존재들과 구분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준비를 하지 않고 살아왔다. 우리는 타고난 외모가 주는 차이와 살아가는 환경, 자연스럽게 다르게 기억되는 기억 등을 통해 다른 존재와 우리 자신을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비록 설명은 못하더라도 자신의 유일성에 대한 믿음은 굳건하다. 단지 누군가 묻는다면 그것을 설명하기가 힘들 뿐이다.

 

그래서 가끔 준비를 해야 할 필요성도 있어 보인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나는 과연 무엇일까? 를 질문 던지고, 답은 없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는 다르다. 이것은 그냥 정의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스스로 믿는 것만큼 스스로에 대한 유일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고의 흐름이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운이 좋다면, 자신을 정의 내릴 수도 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나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나는 많은 돈을 벌어서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싶은 사람입니다"

 

"나는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신의 존재를 알고 싶은 사람입니다"

 

"나는 죽음을 알고 싶은 사람입니다"

 

"나는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고 싶은 사람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남은 생을 모두 쓰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런 대답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처음과는 달라 보이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했다는 보장은 거의 없다. 그것은 오직 그 대답을 하는 자신의 마음 속에 달린 일이다.

 

그래서 그것이 그 어떤 종류의 대답이라고 해도, 스스로 충분히 진실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답은 충분할 것이다. 단지, 아예 이런 대답에 대해서 그 어떤 생각을 해보지도 않고 사는 것만 아니라면 설령 그 대답이 어설프고 신뢰가 가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단 한 번 산다고 알려진 우리의 삶 속에서, 다른 동물들보다 좀 더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생각할 능력을 지낸 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을 오직 이득에 대한 계산에만 쓰지 말고 가끔은 황당한 전화에 대답을 할 수 있는 생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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