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세뇌와 믿음

아이루다 2015. 9. 18. 07:30

 
무엇인가를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을 '믿음'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말로 하면 '세뇌' 라고 하기도 한다. 사실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믿음과 세뇌는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세뇌와 믿음은 구분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 기준은 바로 그것들의 대상이다. 즉, 어떤 대상을 추종하느냐에 따라 믿음이나 세뇌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보면, 종교적 관점에서 자신이 믿는 신을 믿는 것은 믿음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의 반쪽인, 북한의 어처구니 없는 삼대 세습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모습은 세뇌로 평가된다.
 
즉, 그 대상이 신인 경우엔 믿음이 되고, 뻔한 거짓말로 포장된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은 세뇌가 된다.
 
사실 이런 분류 방식은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긴 하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대상이라고 알려진 신은 과연 거짓이 아닌가에 대한 질문이다.
 
물론 신은 증명되지도 부정되지도 않는 개념이다. 열심히 발전해온 과학계의 입장에서 신은 부정당하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인간의 정신적 영역은 아직도 베일에 쌓여 있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 신은 사람에 따라서 거짓이 될 수도 있고, 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종교적 믿음은 사람에 따라서 세뇌가 될 수도 있고 믿음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사실은 명확하게 말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세뇌가 되는 과정을 통해서 유추될 수 있는 것으로써, 과연 자신이 믿는 대상에 대해 어떤 객관적 접근을 했느냐에 대한 것이다.
 
사실 많은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종교에 대해 무지하다. 그리고 이 무지함은 교리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 종교의 기원과 인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무지함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를 믿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이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두려움의 극복이다.
 
그러니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객관적 증거나 혹은 과학적 증명이 필수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객관적 접근은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빠진 믿음은 바로 세뇌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세뇌의 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무조건적인 믿음, 근거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믿음이 바로 세뇌이다.
 
다단계에 빠진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도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아주 말을 잘하는 강사들에게 현혹되어서 객관적인 계산 능력을 잃는다. 물론 그 강사들의 말이 틀린 것은 없으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성공한 사업가가 되려면 과연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능력을 과연 자신이 가지고 있는지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물을 팔 때는 그곳에서 물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지, 자신이 정말로 우물을 제대로 파 낼 능력이 있는지를 미리 판단해야 한다. 그것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사실 한 번 파서 물이 안 나오면 포기할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물을 파는 일에 성공하려면 둘 중 하나를 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는 물이 나올만한 장소를 잘 찾는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하나는 물이 나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시도할 수 있는 인내력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둘 모두가 없다.
 
다단계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의욕에 꽉 차있다. 강사들의 말을 들으면 금새라도 부자가 될 듯 하다. 친구들 목록을 살펴보면, 고객이 한 가득 이다. 이들이 모두 조금만 사주면 금새 실적이 오를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아주 소수는 정말로 성공한다. 아까 말했던 우물을 파는 사람들 중에서 물이 어디에서 나올지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우물을 파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엔 사막인줄 모르고 시도하다가 평생 물 구경을 못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아무튼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 한 말을 믿고 따르는 행위가 바로 세뇌된 것이다. 그 어떤 대상이라도 해도 이것이 객관화된 입장이 빠진 상황은 믿음이 아닌 세뇌로 분류되어야 옳다.
 
북한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김일성의 위대함에 대해서 그 오랜 시간을 들으면서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그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 역시도 자신의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의 입장에서 김일성을 바라 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 북한이란 나라와 김씨 삼대 세습을 객관적으로 바라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종교인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어떤 우연한 기회에 어떤 종교를 접하거나 혹은 아예 어린 아이 때부터 그 종교에 접하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단 한번의 의심도 없이 믿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만약 처음에 어떤 종교를 접할 때, 그 종교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충분히 생각한 후에 그 종교를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런 그런 과정 없이, 단지 지금이 불안하고 힘들고 두렵다는 이유로 인해서 믿게 된다면 그것은 세뇌가 될 수 밖에 없다.
 
무조건적인 믿음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완벽히 믿는 상태가 되면, 사실 무한대의 평화로움에 놓이게 된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유일신을 제대로 믿을 수 있다면, 삶에 있어서 과연 무엇이 그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깊은 평화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어떤 두려움이 존재한다면, 사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냉정히 말하면, 세뇌되어 있는 상태로 봐야 한다.
 
세뇌는 이미 말했듯, 다른 외적 존재의 설명으로 그 대상을 믿게 된 경우이다. 말 그대로 설득 당한 것이다. 이 믿음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누군가 끝없이 믿음을 설명하면, 그것을 자신이 유리한대로 해석해서 믿는 과정이다.
 
북한 사회가 그렇고, 다단계가 그러며, 종교 모임에 나가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끝없이 이야기를 하고 듣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뇌가 아닌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스스로 믿게 되어야 한다. 그 어떤 믿음이든지 타인이 아닌, 자신이 믿어야 한다. 이것은 자발적인 것과 타율적인 것은 매우 큰 차이이다. 아니, 좀 더 극적으로 말하면 진짜와 가짜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자발적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거기엔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끝없는 객관적 입장에서의 본질적 질문과 답변이 이뤄져야 한다. 이것은 누군가에게 묻고 답을 듣는 과정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자발적 믿음은 거대한 힘을 갖는다. 물론 좀 더 쉽게 얻는 방법도 있다.
 
아주 단적인 예로, 기독교에 관한 많은 이적의 사례가 보고되어 있다. 손에서 피를 흘린다든지 하는 일등이 바로 그런 일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이적을 경험한 사람은 아주 다른 사람이 되곤 한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믿는 힘이다. 자신이 믿는 종교의 신이 바로 정말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착각이든 아니든 간에,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의 믿음은 100%로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람은 평화로움을 얻게 된다. 그래서 주변에서 그 어떤 비판적인 말이나 과학적인 설명을 하면서 종교에 대해 비판을 하더라도 흘려 들을 수 있다.
 
이런 사람에 반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믿는 종교에 대해서 많은 확신은 가지고 있지만, 문제는 그 확신이 100%가 아닌, 99% 수준에 머무른다는 점이다. 물론 99%도 대단한 수준이긴 하다. 하지만 남은 1%는 늘 마음 속에서 두려움을 생산해 낸다.
 
평균적으로 교통 사고율이 1%라고 했을 때, 100명 중 한 명은 평생 동안 한 번 교통 사고를 당한다. 사실 이 확률은 매우 낮으나, 우리들 모두는 길을 건널 때나 차를 운전할 때 그것에 대한 잠재적 두려움을 가지고 산다.
 
이런 식이다. 그것이 0.1%의 가능성이라고 해도, 예상되고 의식화 되면, 그 두려움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특히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지속적으로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누군가 암에 걸린 사람, 건강하던 누군가 갑자기 죽은 사례, 누군가 차 사고를 당한 사람, 누군가 사기를 당한 사람 등의 불행함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주변에 전달되면서, 집단 두려움을 상기 시킨다.
 
이런 상황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두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두려움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채워지지 못한 1%에서 숨겨져 있는 두려움이다.
 
세뇌는 외부에서 주입된 믿음이기 때문에 스스로 가진 1%의 불신의 벽을 결코 깰 수 없다. 아무리 종교적 믿음을 제대로 가지고 있다고 해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스스로 만들어 낸 믿음이 필요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믿을 수 있는 믿음만이 사실 제대로 된 믿음이다. 우리를 누군가 끝없이 설득해서 갖게 된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세뇌일 뿐이다. 이것은 자기 설득의 시간이고, 자기 용납의 시간이다. 외부에서 전달받은 정보를 스스로 소화해 내는 과정이다.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 낸 믿음이 부족한 1%를 채워서 100%를 만들어 준다. 또한 이 1%는 비율 자체는 작지만, 99%에 비해서 훨씬 강하고 큰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자발적 믿음이 가진 힘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믿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객관적 정보가 필요하다. 또는 이적과 같은 사건을 통해서 경험적으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이적을 경험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보통은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적 접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 어떤 대상이든지 자신이 믿는 믿음을 세뇌가 아닌 진정한 믿음이고 싶다면 삶의 전체 과정에 있어서 단 한 번쯤은 이런 불신의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믿는 믿음을 스스로 의심하고 확신을 갖는 과정이 이뤄질 수 있을 때만 세뇌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삶을 전체적으로 관통하고, 자신의 가장 중요한 모든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행복과 불행에 대해 모든 것을 관장하는 그런 목숨보다도 소중한 믿음이라면 적어도 깊은 불신의 터널을 한 번은 건너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터널을 제대로 건넜을 때, 스스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99%에 만족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불신의 터널은 사실 상상하기도 힘들며, 안다고 해도 결코 행복한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1%의 불안함을 가진 채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사실 그것만 해도 아무런 종교가 없는 사람에 비해서는 훨씬 더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중 다수는 자신이 100% 믿고 있다고 믿는다. 아니, 믿고 싶어한다. 그래서 1%의 빠진 고리를 부정한다. 그런데 사실 자신이 100% 믿고 있다는 믿음도 일종의 자발적 세뇌이다. 믿음이 100%가 아니라 자신이 진짜로 믿고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100%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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