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철학에 관심이 있다는 말은

아이루다 2015. 12. 10. 11:21

 
요즘 사람들은 누군가 철학에 관심이 있다는 말을 하면 약간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특별함은 그다지 좋은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보통 특이한 관심,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사람, 심지어는 이질감까지도 포함한다.
 
반면에 자칭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보통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존재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즉, 그들은 일종의 돈키호테와 같은 사람일 수 있다. 일반인의 눈에 비친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좀 어처구니 없는 모습이지만, 그들 스스로는 의미 있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더해서 자신과는 다른 보통 사람들의 삶을 은연중 무시하는 면모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나온 말이,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의 선택에 대한 것일 것이다.
 
이 표현에서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를 의미하고, 배부른 돼지는 보통 일반 사람들을 암시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철학자들은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철학자들이 가진 오만함이다. 한 삼일 굶어도 그런 소리를 계속 할 수 있을지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것을 마냥 탓하기는 힘들다. 우리가 개나 고양이를 보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같은 형태의 외모를 가지고, 동일한 법에 의해서 보호를 받지만, 사실 사람마다 차이는 꽤나 극심해서 어떨 때는 인간과 개의 차이보다 인간과 인간 간의 차이가 더 크게 나기도 한다.
 
즉, 같은 인간이지만 두 사람간의 공통점이 너무도 없어서 그냥 일반 사람과 개의 공통점보다도 부족한 경우가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당장 지능지수로 알려진 아이큐만 봐도 그렇다. 천재들의 아이큐는 150이상이고, 머리가 그리 좋지 않은 어떤 사람들의 아이큐는 80 수준에 머무른다. 그런데 똑똑한 개의 아이큐는 거의 60에 가깝다고 한다.
 
심지어 돌고래들의 아이큐는 80 이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럼에도 이들보다도 아이큐가 낮은 인간이 훨씬 나아 보이는 이유는 바로 교육 때문이다. 즉, 인간은 머리가 나빠도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엔 인간의 언어를 쓸 수 있는 성대구조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인간만의 고유 능력이 한몫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인 아이큐 150과 80의 차이와 사람과 개인 아이큐 80과 60의 차이는 그냥 생각해도 앞의 차이가 크다. 즉, 인간과 인간의 차이가 훨씬 크다는 뜻이다. 그리고 삶 자체도 그렇게 차이가 난다.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의 재산 차이와 보통 사람과 개의 재산 차이를 보면, 사람과 사람이 훨씬 큰 차이를 보인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다 보니,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차이가 너무도 나고, 그리고 일부 잘난 사람들이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오만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면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이 탐구하고 있는 학문들 중에서 철학은 가장 인간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학문이다. 즉, 우리가 분야를 나눠서 각각 연구하고 있는 많은 학문들은 궁극적으로는 결국엔 인간에 관련되어 있긴 하지만, 그 어떤 학문도 철학만큼은 아니란 뜻이다.
 
원래 철학은 학문의 목적 자체가 바로 인간이다. 그것은 우주를 이해해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역사를 연구해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인간 자체를 연구한다. 그래서 철학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인간은 왜 존재하고 있는지,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일단 어려운 느낌이 든다.
 
또한 과거에 유명했던 철학자들은 사실상 천재다. 그들은 뉴튼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모차르트처럼 각자의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낸 천재라는 점이 우선시 되는 존재들은 아니지만, 사실 자신을 바라봐야 하는 그 어려운 분야에서 그런 학문적 업적을 낸 것을 보면 명백히 천재가 맞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저술을 이해하기가 그리 어려운 것이다. 그들의 말은 단지 사람의 언어를 썼을 뿐, 일반 사람들이 눈에는 온갖 수학 방정식이 난무하는 물리학 서적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즉,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철학은 수학 기호가 난무하는 서적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탐구하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어렵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졌고, 수학이나 물리학처럼 생활에 크게 도움도 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고 말았다. 그래서 철학은 좀 이상한 사람들이나 혹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학문으로 정의되어 버린 것이다.
 
쉽게 말해서 보통 사람이 수학에 관심이 많아서 직장을 다니면서 자신의 일과 거의 상관이 없는 별도의 수학 공부를 하는 것과 비슷한 형국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러니 그것이 특이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지경이다.
 
그리고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자체도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물론 이 둘을 모두 다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그렇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철학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첫 번째 유형은 철학에 대해 학문적 접근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과거로부터 유명했던 철학자들의 저술을 읽으면서 철학 그 자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데카르트, 흄, 칸트,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몇 천 년에 걸린 철학자들이 남긴 발자취를 더듬는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이해하고, 암기하고, 분류하는 일을 한다. 또한 더해서 자신의 이해를 타인의 이해와 비교하고 토론하는 것을 즐긴다. 일종의 지적 유희라고도 볼 수 있다.
 
이들은 수학이나 물리학을 공부하듯이 철학을 공부한다. 그래서 방대한 지식을 쌓는 방법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지적 능력이 좋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하게 이런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똑똑하다고 판단한다.
 
두 번째 유형은 철학의 원래 목적, 즉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그것에 알기 위한 사유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물론 첫 번째인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철학자들의 주장을 보기는 하지만, 사실 이들은 그것들은 스쳐 지나가는 참고서 수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는 모든 답은 스스로 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해서 과거 천재들이 적어놓은 어려운 글을 모두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도 있다.
 
이것을 쉽게 다시 설명하자면, 첫 번째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알고자 할때 세밀하게 분석한 데이터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되고, 두 번째에 속한 사람들은 분석되어서 나온 데이터를 가지고 그것이 가진 의미를 해석해내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철학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는 지적 우월감에 대한 욕구이다.
 
이것은 흔히 철학을 첫 번째 유형으로만 접하는 사람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더 많은 철학자들의 저서를 읽고, 더 많은 문구를 외우고, 더 많은 해석을 접함으로써 철학 그 자체에 대한 지적인 역량을 과시할 목적으로 철학을 공부한다.
 
이것은 사실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흔한 자부심으로써 딱히 그렇게 되지 않도록 경계하기가 힘들다.
 
문제는 이것은 철학의 본질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리학과 수학은 그 자체를 잘하는 것을 통해서 끝이 난다.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으며,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지적 우월감을 표현하고 끝난다.
 
하지만 철학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철학은 결론이 없는 학문이고, 과정 자체가 목적인 학문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오직 인간에 대한 본질적 해답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이 답은 결코 얻을 수 없는 답이다. 그래서 그 동안 그렇게나 많은 종류의 해석이 존재해왔던 것이다. 그들은 각자 다른 입장에서, 다른 견해로 자신이 이해한 인간의 본질을 정의했다.
 
물론 과거 천재 철학자들의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의식의 전환이며, 상상하기도 힘든 천재적인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도구에 불과하다. 철학의 진정한 힘은 각자의 머리 속에서 나온다. 그것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그래서 만약 특별한 몇몇 철학자들에게 꽂혀서 그들이 설명해준 인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오답이다. 왜냐하면 그 답들은 그냥 그들 자신의 답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답은 달라야 한다. 시대가 다르고, 지식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입장이 다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같은 답을 낼 수 있겠는가?
 
사실 철학의 오묘함은 여기에서 나온다. 모두 각자 다른 답을 낼 수 있기에, 철학은 어려워 보이지만 할만한 학문이다. 반대로 수학이나 물리학 등은 힘들다. 그것들에는 보편적으로 합당한 정답이 존재한다. 1과 1을 더하면 2가 되어야 한다. 철학은 그렇지 않다. 철학에서는 1과 1을 더했을 때는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 또한 그래서 옳고 틀림도 없다.
 
하지만 오늘도 철학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공식을 외우듯 학문으로써만 철학을 공부한다. 누가 어떤 말을 했고,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다르면 싸우고, 같으면 동지애를 느끼면서 자부심이 두 배로 늘어난다. 또한 그 늘어난 만큼 오만함이 생겨서 스스로에 대한 한없이 우월감을 만든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 현상은 철학의 목적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사실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점점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거울을 보고 또 보면 잘생겼던 얼굴도 잡티가 보이고 미묘한 좌우 비대칭이 느껴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면 볼수록 우리 자신은 물론 인간 그 자체가 참 별 것이 아니란 생각만 들게 된다. 만약 철학을 접할수록 자부심이 늘어나고 우월감이 상승하고 있다면 지금 방향을 잘못 잡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우리를 잘난 존재로 여기는 이유는, 대충 흘깃 봐서 그렇다.
 
"다른 누구로도 말고 오직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
 
사실인지 확인을 하지 않았지만, 이 말은 2,500년 전 한 철학자가 유언으로 남긴 말이라고 전해진다. 그 사람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였고, 다른 이름으로 붓다 혹은 부처로 불렸다.
 
부처님은 보통 불교의 창시자로 알려져있지만, 그분의 본질은 위대한 철학자였다. 그는 위대한 스승이었고, 깨달음을 얻은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원래 부처나 붓다라는 말 자체가 '깨달은 자' 란 의미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궁극적 이해를 뜻한다.
 
그분의 말씀에서 철학을 하는 자의 마음가짐에 대한 해답이 적혀있다. 그것은 바로 그 누구의 길도 아닌, 스스로 그 답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답에 온전히 만족한다.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한 위대한 화가가 남긴 예술 작품을 보면서, 그것을 통해 느끼는 감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사용한 붓과 물감의 재질 그리고 어떤 화법을 이용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그가 어떤 사조를 유행시켰는지를 토론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세련되지 못한 언어로 그 그림의 감동을 말하고 있는 어떤 사람을 초보자나 무의미한 해석이라고 치부하고 있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앞에서 리스트로 나열한 철학자들의 명단을 보면서, 자신이 아는 유명한 철학자인 니체라는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이 글이 그다지 신뢰성이 없거나, 별 의미가 없는 글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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