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행복마다의 가치

아이루다 2016. 1. 11. 09:16

 
이제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일이 되어 버렸다. 1997년도에 한국은 초유의 외환부족사태를 맞았다. 일명 IMF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IMF는 국제 구제 금융의 약자이다. 일종의 은행으로 돈에 문제가 생긴 나라에게 긴급한 자금을 수혈해주는 역할을 하는, 일종의 국제적 금융 기관이다. 우리는 당시 많은 어리석은 판단착오를 거듭한 끝에, 국제적으로 하이에나 같은 금융 사냥꾼의 먹이가 되어서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거대 기업들이 천문학적인 빚의 민 낯이 드러내면서 부도가 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량 해고 사태와 함께 수 많은 사람이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정확히 계산되지는 않았지만,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때 닥친 경제적 문제로 인해서 긴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규모 실업사태는 PC방이라는 문화를 만들어내었다. 직장에서 쫓겨난 많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돈벌이 수단으로 PC방을 차린 것이다. 여기에 초고속 인터넷 확대와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합쳐지면서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앓이는 젊은 남자들을 중심으로 직장의 회식 문화까지 바꿔놓을 만큼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게임 대회가 열리고 그 게임 내용이 방송을 통해서 방영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후, 아주 생소한 직업이 하나 생겨났는데, 그 직업이 바로 '프로게이머' 이다.
 
그리고 그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 중에서 '임요환' 이란 사람이 있었다. 일명 테란의 황제였고, 영웅이었다. 그는 프로게이머란 직업에서 수 많은 '처음' 이란 업적을 달성해 내기도 했다. 아마도 억대 연봉도 그가 처음 해낸 일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전까지 게임은 아이들이나 즐기는 놀이거리였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사건이 지난 후, 게임은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이 되었다. 즉, 이제 게임은 그냥 시간만 죽이는 유흥거리가 아닌 것이 되었다.
 
그러자 게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게임만 잘해도 억대 연봉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10대에 말이다. 사실 프로 축구나, 프로 야구나 다를 바는 없었다. 실제로 스타크래프트는 E-스포츠라고 불렸다. 이 말을 비웃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따지고 보면 바둑, 장기도 프로 기사들이 있고, 승부를 겨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축구, 야구, 바둑, 장기 등등 사실 모든 종류의 경쟁 종목들의 차이는 단지 돈의 규모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그 돈의 규모에는 그것들을 즐기는 사람들의 저변성에 달렸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렸다는 뜻이다.
 
관중이 많아지면 광고의 효과가 높아지고 그래서 기업이 해당 종목에 투자하는 비중이 높아진다. 이것이 바로 모든 프로 스포츠의 동일한 원리이다.
 
하지만 우리 생각은 이렇게 단순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축구와 야구는 비슷하게 볼지 몰라도 게임을 한다고 하면 그렇게 보질 않는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것을 차별한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물론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분명히 차별은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머리 속에서는 끝없이 어떤 대상에 대한 가치를 저울질 하려는 본능이 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끝없이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가치를 두고 서로 누가 더 진정한 의미가 있는지를 비교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내부엔 행복에 대한 가치 기준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관에 합당하거나, 자신이 누리는 행복이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가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것은 의식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원한다.
 
그래서 자신의 가치 기준에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충고를 한다. 그렇게 살다가 보면 나중에 큰 봉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행복은 위험하다고 한다. 그것은 진짜 행복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자신의 가치 기준에 어긋나면 어긋날수록 더욱 더 그런 현상은 심해진다. 자식이 의사가 되길 바라는 의사는, 의사가 되길 거부하고 미술을 하겠다고 하는 아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의사야 말로 행복한 삶인데, 그림 따위를 그려서 어떤 불행한 삶을 살지 모르겠다고 걱정한다.
 
아들이 어려서 세상을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름대로 행복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인간은 모두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 역시도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그 행복이 마약이나 도박, 쇼핑 중독과 같은 것이라면, 무엇인가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에 원천적인 문제가 있다고 진단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의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무의식적인 관점이 아니고, 행복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의식적 관점에서 그것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파악한 나름대로 행복 전문가들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미래를 망치고, 결국 자신의 삶 자체를 파멸시킬 수 있는 행복 추구는 당연히 잘못된 방향이 분명하다.
 
마약을 오래하게 되면 결국 돈도 부족하고 몸에 큰 문제가 생기게 된다. 도박 역시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선에 있는 강원랜드에 가면 도박으로 삶을 망친 사람들이 사방에 있다.
 
그래서 이들의 걱정은 근거가 있다. 하지만 가장 원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사람이 행복을 추구할 때, 그것의 가치를 구분할 수 있느냐는 조금 다른 문제이다.
 
왜냐하면 공부를 하고 직장 생활을 하는 것과 도박을 하면서 살아가는 행복의 차이를 비교하기 시작하면, 축구와 게임의 가치를 구분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둘은 정말로 다른 것일까?
 
그럼에도 도박이나 마약을 하는 삶보다 정상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건강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일 것이다. 사실 중독이 되면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건강을 심하게 해치는 것과 다른 사람들과 그 어떤 관계도 맺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오래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목표인가?
 
이 말에 대한 답은 결코 쉽게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정말로 오래 사는 것이 오직 우리의 목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길 원한다. 오래 살더라도 행복하게 오래 살아야지, 비루하고 불행하게 오래 사는 것은 사실 큰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오래 사는 것 자체가 행복의 기준이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니, 오래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인 사람도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오래 사는 것은 다른 사람처럼 일종의 행복한 일일 뿐이다. 즉, 그들도 행복하기 위해서 오래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약을 하든 도박을 하든 그들이 그 순간에 행복하다면, 그것도 일종의 괜찮은 삶은 아닐까? 물론 이런 확대는 무리수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늘 마약을 할 수 없고, 늘 도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거대 재벌 2세로 태어나서 너무도 지루한 삶을 살아가다가 그나마 마약과 도박을 통해 조금이라도 행복한 사람이라면 어떨까? 평생을 그렇게 돈을 써도 돈이 남아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 사람에게도 마약과 도박에서 손을 떼고 지루하고 공허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충고해야 옳을까?.
 
최근 본 한 드라마에서 천재로 태어나서 스스로 머리를 멍청하게 만들고 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다. 그는 너무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로 인해서 그 누구와도 공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주위 사람들은 한없이 멍청했으며, 자신과 대화를 나눌 지적 역량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살을 시도했지만 살아났고, 거기에서 우연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녀와 그의 아이큐 차이는 91이었다. 그래도 그는 밝고 명랑한 그녀에게 빠져서 스스로 머리를 나빠지게 만드는 약을 오랫동안 복용하면서 함께 살아간다. 결국 장기 복용한 약으로 인해 큰 문제가 발생해서 병원에 입원하고, 치료를 받으면서 다시 머리가 똑똑해지고 만다.
 
그리고 그는 결국 병을 치료한 후, 자신의 머리를 나쁘게 만드는 뇌 절제 수술을 선택한다. 좀 더 멍청해져야 행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가 나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이 천재의 선택이 어처구니 없지만, 이 남자의 선택은 우리 인간의 무엇으로 사는지에 대한 정확한 답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장점은 행복할 때 장점이 된다. 그것을 불행해지면 그때부터는 누가 아무리 장점이라고 우겨도 결국 자신에게는 단점이 되고 만다.
 
물론 이런 특이한 사례들을 통해서 마약과 도박을 인정해야 한다든지, 머리가 멍청해지는 것이 천재의 삶보다 행복하다고 결정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이것들은 정말로 특별한 사례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들 마음 속에 들어있는, 행복의 가치 비교가 결코 옳을 수 없다는 증거가 될 수는 있다.
 
행복에는 결코 옳고 그름이 존재할 수 없다. 아무리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이 인류 보편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래서 남들에게 정말로 쉽게 인정된다고 해도, 거기까지이다.
 
결론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행복이나 도박을 하는 행복 중에서 누가 더 옳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아이를 매일 학대하는 부모들과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돈을 가지고 도박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서 누가 더 나아 보일까?
 
우리는 도대체 왜 무엇을 근거로 어떤 행복이 더 옳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게 될까?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 행복이 그 누구보다도 더 행복하길 바란다. 최고로 행복하길 바란다. 그래서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이, 자신이 이미 얻은 행복이, 자신이 삶에서 최고의 선택이었기 원한다.
 
다른 더 행복한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갑자기 덜 행복해지게 된다. 너무도 갖고 싶었던 가방을 힘들게 사서 몹시 기분이 좋아도, 누군가 그보다 좀 더 비싸고 좋은 가방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면, 갑자기 자신의 가방이 초라해 보이게 된다.
 
이 행복에 대한 본능이 바로 다른 이들의 행복과 자신의 행복을 비교하면서 자꾸 옳고 그름의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욕구를 만들어 낸다. 심지어 이 현상은 행복에 대해서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성찰한 후, 다른 삶을 선택한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시골의 여유로운 전원 생활의 삶은 도시의 각박한 삶에 비해서 더 낫다고 여긴다. 더 옳은 선택했다고 믿는다. 밤 하늘의 별을 보는 행복은 인기 걸그룹에 가서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의 행복보다 더 옳다고 여긴다. 편안하고 좋은 사람과 같이 사는 가정 생활이 불 같은 열정에 불타는 불륜보다 낫다고 여긴다.
 
하지만 행복에는 옳고 그름도 없고, 높고 낮은 가치도 없고, 낫고 떨어지고도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그 어떤 행복도 결국엔 비정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든 종류의 행복은 바로, 비교를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비교라는 말 자체는 절대적인 관점이 아니다. 그래서 비교를 통해 더 나은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금세 자신의 행복이 초라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텃밭을 가꾸는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자신보다 더 넓고 멋지게 가꿔진 텃밭을 보면 자신의 텃밭이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비행기를 타는 것이 꿈이 사람이, 자동차를 모는 것이 꿈인 사람을 비웃다가는 우주 비행사를 만나면 찌그러지게 된다.
 
자전거를 타고나, 자동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거나, 우주선을 타는 것 모두 각자만의 행복이다. 이것은 그냥 다른 길이다. 서로가 비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자동차를 타는 또 다른 행복을 추구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더 낫다는 판단을 하는 것은 틀렸다.
 
하지만 이것을 말로 설명하기만 쉽다. 실천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행복에 대한 성찰은 그래서 몹시 힘들다. 자신이 다른 이들과 다른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비교 행복의 함정에서 빠져 나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자기 성찰이다. 하지만 결국 이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좋은 행복, 옳은 행복, 가치 있는 행복, 더 나은 행복에 대한 기준점이 생겨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본질적으로 아들이 의사가 되길 바라는 의사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그 의사 역시도 좋은 행복, 가치 있은 행복에 대해서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뿐이다. 그것도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서 말이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존중, 자신의 행복은 오직 자신에게만 가치 있다는 인정, 누구나 자신이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는 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시선을 가질 수 있다.
 
개인적으로 시골에 집을 짓고 살면서 느낀 것은, 시골에만 볼 수 있다고 여긴 많은 종류의 새들이 사실은 서울에서도 대부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많은 새들은 수십 년을 살면서도 내가 보지 못한 것이지, 서울이라서 없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또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을까? 그래서 또 어떤 착각을 하고 살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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