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자책감 그리고 양심

아이루다 2016. 2. 16. 08:57


얼마 전 우연이 접한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애견 카페에 아이를 데리고 갔다가, 아이가 개에게 물려서 상처를 입은 한 엄마의 사연에 대한 것이었다. 그 엄마는 그 사고 후에 카페 주인의 사과를 요구했으나, 그것을 거부했고, 분노를 느낀 아이 엄마가 일인 시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줄거리이다.

 

아마도 이 사건에 대한 내용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과연 정말로 누가 잘못했는지 여부를 궁금해 할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그것에 대해 궁금하기도 하다.

 

한번도 애견 카페를 가본적이 없는 나로써는, 과연 애견 카페라는 곳에 어떤 곳인지 감조차 오질 않는다. 아무튼 사고 경위에 대한 글을 읽다 보니, 방문하는 사람들이 개를 데리고 가는 곳이 아니라, 카페엔 이미 개가 있고, 손님들은 방문 후, 개와 어울리는 듯 보였다.

 

그래서 들어갈 때 카페 나름대로 개에 대한 주의사항을 설명 해주는 듯 보인다. 또한 그랬기에 아이가 개에게 물린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가게 주인의 태도가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했다고 해도, 사람이 개에게 물렸다면 일단 인간적으로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 생각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의 편견이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에 대해 모른다. 각자 양쪽 말을 다 들어도 모른다. 설령 그 현장에 있었어도 모를 것이다. 아이가 개에게 어떤 태도로 대했는지 모른다. 개가 어떤 상태였는지 모른다. 도대체 둘 사이에 어떤 문제가 발생해서 개가 사람을 물게 되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개도 아니고, 그 아이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 하나는, 아이의 부모는 치료비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어떤 법적 책임을 지라는 것도 아닌, 단지 사과만을 요청했는데, 가게 주인이 그것을 거절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사실도 명확하지는 않다. 그냥 아이 엄마의 설명이다.

 

아무튼 아이 엄마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보자. 왜 아이 엄마는 금전적 보상도 아니고, 가게 주인에 대한 처벌도 아니면서도 일인 시위를 할 만큼 사과를 바라는 것일까?

 

과연 아이 엄마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녀의 말대로 아이가 당한 사고에 대한 순수한 사과를 원하는 것일까? 물론 그것은 맞을 것이다. 그녀 입으로 스스로 말한 것이니, 나중에 딴 소리 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그녀는 그 사과에 집착할까? 사과를 받으면 뭔가 달라지는 것이 있어서 그럴까? 사과를 받는다고 해서 아이의 상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기분 나쁜 태도를 보인 가게 주인을 처벌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인데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점에 우리가 누군가의 사과를 바랄 때, 가지고 있는 숨겨진 심리를 바라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당연함, 옳음, 정당성 등의 이성적 판단으로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 감정이다.

 

그 숨겨진 심리가 바로 '죄책감' 혹은 '자책감' 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성적 판단이 아닌, 감정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잘못을 저지른 상대의 사과를 요청할 때, 그것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라고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위의 사건에서도 아이 엄마는 자신의 아이가 당한 사고에 카페의 책임이 물을 수 있는 것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자신이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고 옳기 때문에, 카페 주인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성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의 판단이다. 아이 엄마의 숨겨진 심리를 보기 위해서는, 이성적 판단 밑에 숨겨진 감정을 들여다 봐야 한다. 그리고 아이 엄마가 느끼는 감정 속에는, 아이가 다친 것이 자신의 부주의가 아니었기를 바라는 심리가 숨겨져 있다. 사실 그래서 아이 엄마는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 사고는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사고는 일어났고, 누군가는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당장은 아이 엄마가 가장 유력한 책임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사실 그것은 아이 엄마에게 실제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이 엄마는 아이에 대해서 무한대의 책임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아이가 감기에만 걸려서 속으로 자책을 하게 된다.

 

그래서 아이 엄마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바로 이 ‘자책감’을 없애는 일이다. 즉, 그 사고가 자신의 부주의나 혹은 기타 실수로 일어난 것이 아닌, 가게 자체의 문제나 혹은 가게 주인의 운영 상 문제로 인해서 일어난 사건이어야 한다.

 

그런데 왜 그녀는 그것을 바랄까?

 

우리는 누구나 어떤 사고에 대한 책임자가 될 때 느끼는 자책감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실수가 치명적일수록, 그 대상이 복구되기 힘든 상태일수록 그리고 소중한 것일수록 더욱 더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다.

 

아이는 엄마에게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이다. 그런 아이가 개에게 물려서 한참 고생을 하기도 해야 하며, 평생을 흉터를 지닌 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아이 엄마가 감당하기에 결코 쉽지 않는 실수이다. 그래서 이 사고는 아이 엄마의 부주의함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 아니어야 한다. 그래서 아이 엄마는 어떻게든 이 사고의 책임이 가게 주인에 있다는 점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행동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수 많은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도 아이 엄마처럼 사실은 자책감으로 인해서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아이 엄마는 자신이 정말로 정당한 사과를 원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옳기 때문에 자신이 주장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순수한 의도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 엄마는 결코 순수한 의도가 아니다. 그녀는 이성적 판단 속에 교묘하게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주길 바라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실수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에 대한 것이라면 어떨까? 가지 말라는 곳에 가서 크게 다치거나, 하지 말라는 짓을 하다가 삶 자체가 망가지는 경험을 하게 될 때 말이다. 총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했는데, 하다가 동생을 쏘는 실수를 한 형의 삶은 과연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아마도 특별한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이런 종류의 실수를 한 사람은 평생 동안 자책감에 휩싸여서 우울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누군가에게 그 실수의 문제점을 뒤집어 씌우고 싶어가기 때문에, 총기를 파는 회사에 분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 형은 평생 총기 소유 금지법을 만들기 위해서 평생을 바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실수에 크게 연연해 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면 불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불안함의 심리에는 많은 생각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실수의 가장 첫 번째 문제는 바로 도덕적이거나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더욱 더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나마 도덕적 문제는 실제의 문제로 까지 번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한번 저지른 실수는 평생 안고 가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그 실수가 법적 처벌까지 받아야 한다면, 사실상 삶 자체가 큰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실수의 두 번째 문제는 바로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불안함이다. 즉, 우리는 어떤 일을 계기로 자신이 지속적으로 실수를 저질러 온 사실을 알게 되면, 과거의 모든 일이 다 의심스럽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회사에 일이 많아서 늦는다는 말을 믿고 있다가, 사실은 술을 마시다가 늦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과거에 남편이 했던 말이 모두 다 의심스럽게 된다. 즉, 과거에 자신이 남편의 말을 믿었던 것이 실수라는 것이 생각나게 되면, 과거 전체가 믿지 못할 불안 요소가 되어 버리고 만다.

 

실수의 세 번째 문제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다. 어느 날 냉장고에 TV 리모콘을 넣은 실수를 하게 되면, 우리는 미래에 어느 날 그런 비슷한 실수를 할 것이란 불안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가스 불을 끄지 않거나, 집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는 실수일 수 있다.

 

실수의 네 번째 문제가 바로 자책감이다. 실수가 큰 사건으로 이어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 자책감은 바로 앞의 세 가지 문제를 모두 포함한다. 그 세 가지가 크면 클수록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 인한 문제가 커지기 때문에 더욱 더 큰 자책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자책감을 느끼게 되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왜 우리는 그렇게 자책감을 없애고 싶어할까?

 

우리가 자책감을 느낄 때 나타날 수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자신에 대한 처벌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자신이 큰 실수를 하면 할수록, 스스로를 벌을 받아야 할 존재로 생각한다. 그래서 실수로 큰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인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설령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평생 동안 그 실수를 후회하면서 살아가야 하기에, 삶이 매우 피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행복하고 노력해도 실제로 행복하기 어려운 삶 자체를 더욱 더 불행하게 만든다. 즉, 이런 경우 대부분 평생 동안 불행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결국 자신을 함부로 대할 가능성도 높고, 뭔가 체계적으로 삶을 이뤄나갈 가능성도 낮아진다. 자존감도 하락하고, 삶은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결국 폐인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자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즉, 우리는 자신의 삶을 보호하고 싶어서 어떤 식으로든 잘못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환경, 상황 등의 문제로 돌리고 싶어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자책감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자책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왜 우리를 힘들고 불행하게 만드는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일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죄와 벌 그리고 도덕과 양심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심의 가책, 자책감 등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원래 도덕적 존재라서 그럴까?

 

아니다. 사실 인간의 아이를 보면, 얼마나 양심이 없는지 알 수 있다. 아이는 사실 상상하기 힘들만큼 잔인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아이가 악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인지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인지능력은 나이를 먹으면서 받은 교육의 효과로 인해서 발달된다.

 

물론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아도 인지능력은 어느 정도까지는 발달할 것이다. 하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인간이 현재 수준의 인지능력을 가지려면 반드시 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교육 내용 중에서는 언제나 도덕에 대한 교육이 들어가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배우고, 법을 통해서 강제 받는다. 만약 법적으로 살인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사람을 죽일 것이다. 사실 합법적으로 사형을 집행하기도 하고, 전쟁이 나면 누구나 총을 들고 적군을 죽인다. 많이 죽이면 영웅이 된다.

 

남의 것을 빼앗거나, 때리거나, 괴롭히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도덕 교육의 결과이다. 그리고 법적인 처벌을 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죄는 인간이 정의한 것이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죄를 정의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죄를 정의했을까?

 

인간이 죄를 정의한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이룬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기 때문에, 아무런 제제를 가하지 않으면, 인간 사회는 무조건 자멸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타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질서를 지키고, 법을 준수하는 이유도 모두 같다.

 

단체 생활을 할 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규칙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규칙은 명확하게 정의되어야 한다. 그리고 제대로 집행되어야 한다.

 

또한 모든 것을 규칙으로만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을 교육시켜야 한다. 규칙을 지키는 것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친다. 사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알아서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를 정의함으로써 죄를 단죄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고, 그 근거는 우리가 이렇게나 많이 모여서 살 수 있는 사회를 이룩하고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했다. 또한 죄의 개념을 통해서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근거를 마련해서 서로 어울려 살기에 좋은 개념들, 즉 용기, 배려, 사랑, 신뢰 등등의 많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만약 죄의 개념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동굴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양심은 바로 이 정의된 죄로부터 만들어 진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말을 너무도 많이 듣는다. 또한 죄를 지으면 어떤 불이익을 받는지도 충분히 듣는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양심이란 것을 만든다. 그런데 이 양심의 역할은 가끔 너무 월권 행위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바로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힘을 가진 자책감이다.

 

인간이 자책감을 느끼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양심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양심을 죄를 정의한 우리 전체의 집단 지능에 의해서 정의 받는다. 우리는 양심을 스스로 정의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마다 지역, 시대, 성격, 입장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난다.

 

그리고 이 차이가 바로 서로 끝없이 다투고, 법적으로 판결을 받는 원인이 된다.

 

아무튼 우리가 양심의 역할로 인해서 자책감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나, 그것을 너무 과하게 느껴서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행위까지 가는 것은 사실 너무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한 것도 아니다. 선과 악 자체가 죄를 정의한 우리들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동물들에게는 선과 악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선과 악이 있다. 이것을 가지고 인간의 위대함을 칭송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이 절대적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정의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 되는 아이러니함이 생기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불필요한 수준의 자책감을 없앨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 엄마가 일인시위를 하지 않고 아이의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하게 할 수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나마 괜찮게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실수를 합리화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 예를 든 아이 엄마처럼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다가 보면, 나중엔 자신도 철석같이 믿는 경우도 많다. 자기 최면에 걸린 것이다.

 

그리고 이 자기 합리화 과정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이것이 없다면, 이 세상 사람들 중 정말로 많은 사람이 자학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합리화는 해야 하지만, 그 합리화를 스스로 믿는 실수는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즉, 적어도 자신이 합리화를 하고 있다는 것쯤은 스스로 인식해야 한다. 물론 그렇게 되면, 합리화 하는 것 자체를 그만두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심의 소리를 적당히 들어야 한다. 우리는 감기만 들어도 추운 날 밖에 옷을 얇게 입고 나간 자신을 탓한다. 우리는 우리 몸에 어떤 작은 문제가 생기거나, 우리의 삶에 작은 나쁜 변화가 일어나도 그것을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끝없이 자책을 한다. 사실 우리들이 하는 자책을 잘 생각해보면, 하루 종일 자책만 한다. 버스를 놓친 자신, 옆 사람이 계속 기침을 하면 자리를 잘 못 앉은 자신, 발이 아프면 신발을 잘 못 신고 나온 자신, 회사 일에 문제가 생겼으면 능력 없는 자신, 애인이 화가 났으면 상대를 기분 좋게 해주지 못한 자신을 자책한다.

 

하지만 이것은 분노나 슬픔 그리고 기타 이성적 판단에 가려져서 좀처럼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자책감으로 인해서 불안해 하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해서 다른 일로 인해 그런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아이 엄마의 착각이다. 아이 엄마의 착각은 아이 엄마의 특별함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 누구나 하는 착각이다. 우리는 자책감을 없애기 위해서 전혀 엉뚱한 일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본인은 전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가능하면 그것을 바라보려고 애써야 한다.

 

왜 스스로를 그리도 미워해야 할까? 왜 스스로에게 그리도 많은 기대를 한 후, 실망을 할까? 적당한 수준은 좋지만, 자기 파괴까지는 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너그러워 지는 것, 자신에게 관대해 지는 것, 이것이 바로 행복의 첫 걸음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을 너무 심하게 미워한다. 그리고 그 근거도 우리들 자신이 아닌, 누군가 이미 만들어서 우리 머리 속에 주입시킨 도덕심의 결과이다.

 

자신의 실수에 너그러워질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조절은 해야겠지만 말이다.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 경험  (0) 2016.03.05
실수를 대하는 법  (0) 2016.02.17
성격과 행복의 상관 관계  (0) 2016.02.07
즐거움 행복과 가치 행복  (0) 2016.02.05
우리가 관대해지기 힘든 이유  (0) 2016.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