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에베레스트

아이루다 2015. 12. 4. 08:02

 
최근에 '에베레스트'란 이름을 가진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매우 정직한 제목을 가지고 있는 영화로써, 정말로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비극이다.
 
이 글은 영화를 소개하는 글은 아니니,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영화를 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하고, 그냥 이 영화 속에 나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왜 산에 오르는가' 에 대한 것이다.
 
사실 실제로 이 질문은 영화 속에서도 등장한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에베레스트를 오르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에서 등장한다. 원래 그들은 전문적인 산악인은 아니었다. 당시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에베레스트를 오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돕는 사업에 참가한 참가자였던 것이다.
 
물론 전문적인 등반가라고 해도 이 질문은 충분히 유효하다. 도대체 아무것도 없는 그 산에, 그 고통을 겪어가면서, 생명까지 담보한 채 오르려고 할까?
 
이 질문을 받은 일반인들은 쿨하게 '산이 거기 있으니까' 라고 대답하긴 힘들 것이다. 많은 돈을 내고 참가했고, 자신의 생업이 따로 존재했으며,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참가자 중 우편 배달부 출신이라는 더그는 이렇데 대답한다. 아이들과 약속을 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신이 여기에 참가할 수 있도록 모금도 해줬다고 한다. 또 다른 참가자 조쉬는 집에 있으면 뭔가 빠진 느낌이 든다고 했다. 영화 속 대사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집에 있는 동안 심한 허무함에 사로잡혀 있는 듯 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그 산을 오를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산을 오를까?
 
'산이 거기 있으니까'
 
이 말은 영국 태생의 전설적인 산악인, 조지 말러니가 한 말로 전해지는데, 아무튼 이 말은 꽤나 의미심장해 보이지만, 뒤에 빠진 말이 있다. 이제부터 무엇이 빠져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가치를 추구한다. 그 가치는 아주 다양해서 아이를 키우는 것부터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까지 가능하다. 심한 경우엔 여자의 팬티를 모으는 경우도 있다.
 
방금 예를 보듯이, 개인이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가치에 대한 타인들의 평가는 사실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서 고정된다. 우리는 아이를 키우는 것과 팬티를 모으는 것을 동일한 가치라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상 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그 두 가치는 다름이 없다. 단지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그런데 어떤 가치들은 애매하다. 그래서 사람마다 호불호가 다르다. 누군가는 그런 짓을 왜 하냐고 비난하고, 누군가는 그런 행동을 하는 모습이 위대하다고 느낀다. 사실 산을 오르는 것도 이런 종류의 것이 될 수 있다.
 
거기에 더해서 이런 가치 추구는 성공과 실패라는 명백한 결과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실패할 경우엔 좀 더 많은 비판을 들을 수 있다.
 
아무튼 우리가 어떤 종류이든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제이다. 단지 그 종류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단 한 점의 의문도 없이 그렇다.
 
모든 인간의 모든 행동은 행복을 위한 노력이다.
 
그런데 에베레스트와 같은 산을 오르는 것은 사실 극한의 고통을 의미한다. 약 25%의 사망률 통계를 가진 그 산을 오르는 것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물론 그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실패를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성공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산에 오른다.
 
아무튼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왜 행복하기 위해서 고통을 감내하는가? 더해서 그것도 반드시 해야 할 일도 아닌, 선택적으로 가능한 일임에도 말이다. 사실 그래서 이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왜 산에 오르는가' 라고 말이다.
 
우리는 아무리 육아가 힘들어도 '왜 아이를 키우는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가' 라고 묻는다.
 
왜 산에 오르는가를 묻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이 선택적이기 때문이고, 선택적이란 말의 의미는 바로, 그 행동을 능동적으로 결정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즉,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한 셈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대부분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결정할 뿐이다. 즉, 이미 선택 가능한 답은 정해져 있고, 많은 계산을 한 후에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하나를 선택한다.
 
하지만 이런 삶은 마치 어딘가에 갇혀 사는 동물과 같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심하게 느끼는 사람들 중 매우 소수가 산에 오르는 것 같은 능동적 선택에 대한 욕구가 느낀다. 집에서 허무함을 느낀다고 말했던 조쉬의 말에 숨겨진 심리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후원해 준 아이들의 꿈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산을 오르려는 더그는 조쉬와 뭐가 다를까?
 
사실 더그도 조쉬와 다름은 없다. 단지 그는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 아이들이란 추가적인 가치를 더해 둔 것뿐이다. 그는 절대로 아이들을 위해서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산에 오른다. 설령 아이들을 위한다고 해도, 그 아이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단순화 시키면 단 한 단어로 압축이 된다. 그것은 바로 '자부심' 이다.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이유는 아주 많은 사연과 목적을 가지고 있겠지만, 결국 그들이 추구하는 결론은 모두 '자부심' 이다. 그들이 산에 오르는 대신 여자의 팬티를 훔치지 않는 이유는, 그 팬티를 훔치는 일이 산에 오르는 일보다 힘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고통스럽기로 따지면 산에 오르는 일이 훨씬 고통스럽다. 문제는 팬티를 훔치는 경우엔 아무런 자부심을 느낄 수도 없다. 오히려 변태로 비난 받을 뿐이다.
 
인간이 산에 오르고, 북극점과 남극점을 간 이유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것을 위대한 도전이라고 칭송해주기 때문이다. 즉, 생명을 담보로 한 힘든 도전에 성공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갈채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거대하게 커진다.
 
1세기 전 쯤에 남극 탐험에 도전했던 두 팀이 있었다. 노르웨이 출신의 아무센과 영국 출신의 로버트 스콧이 그 두 팀의 리더였다. 그리고 아문센은 성공하고 영광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갔고, 2등을 한 로버트 스콧은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 팀은 전멸했다.
 
산이 있으니까 오른다는 말을 여기에 적용하면, 남극이 있으니까 간 것이다. 그런데 왜 2등은 돌아오지 못했을까? 물론 불운함도 겹쳤겠지만, 사실 그들이 전멸한 이유는 절망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제 이 뒤에 빠진 말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산이 있으니까 오른다. 그리고 반드시 성공하여서 내 존재감을 증명 받고, 자부심을 높일 것이다.
 
이것이 뒤에 빠진 말이다.
 
그런데 자부심은 원래 인간의 부차적인 목적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좀 더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증명된 자부심은 매우 중요한 목적이긴 했지만, 그것은 사실 이득을 얻기 위해서 추구한 행동에 첨가된 행복이었다.
 
예전에 사냥을 해서 살아갈 때를 상상해보자. 어떤 사람이 활을 잘 쏴서 사냥을 잘하는 것은 고기를 얻는 직접적인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활을 잘 쏜다는 것은, 단지 사냥터에서만 유용한 능력이 아니었다. 그는 평소 마을에서도 활을 잘 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활을 잘 쏘는 사람과 친해 두면 같이 떠난 사냥에서 함께 그 이득을 공유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능력 있는 사람을 선호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금 우리에겐 함께 떠날 사냥터는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 단, 그 사람이 자신이 얻은 이득을 타인과 기꺼이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그리고 당시에 무리는 소수였기 때문에, 그런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확률도 높았다. 활을 잘 쏘든지, 도구를 잘 만들든지, 요리를 잘하든지, 가죽을 잘 다루든지, 아무튼 부족의 숫자는 적었고, 따라서 잘할 수 있는 것을 찾긴 쉬웠다.
 
문제는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 한 사회를 구성하는 숫자가 몇 십 명 단위에서 몇 백만 명 단위로 커져버렸다. 이것은 단지 크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 큰 크기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아주 빠른 통신 능력도 발전시켰다. 이것은 정보의 유통이 과거와는 비교도 안될 수준으로 빨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은 무엇인가를 잘하는 것을 인정받기란 하늘의 별따기가 되고 말았다. 물론 지금도 촌 동네에서는 무엇인가 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도시에서 무엇인가를 잘하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 되었다.

 

조금만 잘해서는 금새 지구 반대편에 더 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우리는 이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기가 너무도 힘들어졌다.
 
20명 중 1등은 그나마 쉬운데, 백 만명 중 1등을 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
 
그래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경로가 차단된 우리는 이제 본격적으로 이득과도 상관없이 오직 자부심만을 추구하는 형태로 변형되었다. 그래서 이젠 점점 더 위험한 것을 즐기는 쪽으로 발전해나가고 있다. 그것들을 묶어서 익스트림 스포츠라고 한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가 더 중요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에베레스트를 오르지 않았을 뿐, 목적은 같다.
 
사실 명성, 명예, 칭송, 갈채 등의 것들은 모두 자부심을 위한 필수 항목이다. 행동이 자부심을 시작시켰다면, 이런 것들은 자부심을 결론짓게 만든다.
 
즉, 산에 오르는 행동이나 극도의 위험한 스포츠를 즐기는 것을 통해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하고, 성공한 후 타인들의 칭송을 받으면서 자부심을 확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부심의 숨겨진 주인은 바로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에고' 이다.
 
에고는 생존을 바라지만, 에고는 우리 인간이 기회만 되면 위대한 존재가 되길 바란다.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인정받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좀 더 생존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마도 핵전쟁이 나면, 가장 생존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미국의 대통령일 것이다. 권력자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그 가치는 그 사람을 살려야 하는 명분으로 작용한다.
 
산악인들이 목숨을 담보한 채 산에 오르는 이유는, 살고 싶어서 그런다. 이 아이러니함이 우리 인간의 본질이다. 지금도 목숨을 걸고 극한의 도전을 하는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들 모두 죽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너무도 살고 싶어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
 
물론 그들 스스로는 삶이 따분하고, 삶이 허무해서 도전을 즐긴다고 하겠지만, 사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살다간 그냥 죽을 것 같아서 그런 것이다. 또한 그렇게 살아가 죽으면 아무도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다.
 
이것은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이다. 우리는 도전을 해야 살아남았고, 능력이 있어야 살아남았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수록 살아남았다. 우리는 가치 있다고 판단될 때 살아남았다.
 
단지 우리 자신을 속일 필요는 없다.
 
그래서 '산이 거기 있어서 오른다' 라고 만 말하면 안 된다. 그 뒤 이야기를 해야 한다. 물론 알지 못해서 말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혹은 그런 말까지 하려면 좀 부끄럽기도 하다. 어떻게 살고 싶어서 산에 오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생각이 그렇게 연결되기도 쉽지 않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비록 에베레스트는 오르지는 못해도 수 많은 행위들을 통해서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는 정말로 다양한 곳에서 우쭐함을 느낀다. 복사기를 잘 쓰거나, 걸음이 빠르거나, 힘이 세거나, 담을 잘 넘거나, 다리를 잘 벌리거나, 글씨를 잘 쓰거나, 글을 잘 쓰거나, 암산이 빠르거나, 퍼즐을 잘 맞추거나, 책을 빨리 읽거나, 영화 배우 이름을 잘 기억할 때도 그렇다.

 

심지어 변비에 걸려서 고생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자신이 똥을 잘 싸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이 모든 자부심의 근원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라는 단서가 붙는다. 즉, 우리는 비교를 통해서 자부심을 느끼고, 그것을 통해서 행복함을 느낀다. 이것이 에베레스트와 차이가 나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 부족하다는 것과 그 자부심이 매우 국지적이란 점만 다르다.
 
즉, 복사기를 잘 쓰는 것을 자랑했다가는 '좀 모자란 사람' 이 될 수 있으며, 그것도 바로 옆 사무실에 가면 자신보다 복사기를 두 배는 잘 쓰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레스트는 중요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도전이고, 세계에서 가장 높기 때문이다. 즉, 등정에 성공했다면 그것을 평생 자랑할 만도 하고, 더 높은 산이 없으니 평생 동안 자신보다 더 잘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을 타고난 탐구가 혹은 여행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다. 미지의 세계는 미지의 이득에 대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늘 그래왔다. 우리가 달을 탐사하고 화성을 가는 이유는, 달이 거기 있어서, 화성이 거기 있어서 가는 것이지만, 결국엔 어떤 이득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렇다. 단지 지금 당장 그것을 통한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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