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계를 넘어서

아이루다 2015. 11. 17. 15:06

 
엔서니 웰링턴이란 이름을 가진 베이스 기타를 치는 연주자가 있다. 그런데 그가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음악이란 분야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를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설명은 매우 직관적이고 또한 명백하다. 또한 이 분류법은 단지 음악 속에서만 적용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 삶 전체에 적용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일반적이기도 하다.
 
그는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발전 단계를 총 네 단계로 구분했다.
 
첫 번째가 '무의식적 무지' 단계이다. 쉽게 말하면 무엇을 모르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이다. 이 상태는 아이들의 모습과 같은데, 아이들은 세상을 모르기에 그냥 마냥 행복해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또한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는 말은 말 장난 같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냥 처음에 기타를 선물 받았을 때이다. 그것이 기타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냥 새롭게 생긴 기타라는 물건에 대해서 기분은 좋을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의식적 무지' 상태이다. 이때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상태이다. 기타를 선물 받은 사람이 악보를 사고, 연주법 강의를 듣고, 선생님을 찾아가 배우게 되는 순간부터 자신이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즉, 두 번째 단계로 옮겨온다. 실제로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무엇을 모르는지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이때는 조급함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앞으로 해야 할 많은 것들에 대해서 답답함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배울 수 있고, 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자신에 대해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엔 한계에 도달한다. 그래서 여기에서 멈추는 사람들은 아마추어가 된다. 즉, 취미로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의식적 지식' 상태이다.
이 단계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정확히 알고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는 해야 할 일들을 해 낸 상태이다.
 
그래서 이 단계까지 오면, 전문적인 음악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사람으로 치면, 어떤 분야든 간에 상관없이 직업적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 하지만 알다시피 직업으로 어떤 것을 하는 것은 그다지 행복한 일만은 아니다.
 
그래서 뛰어난 연주자의 호칭을 듣거나 혹은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 수준의 대접을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상위권일 뿐 결코 최고는 되지 못한 상태이다.
 
네 번째 단계는 '무의식적 지식' 상태이다. 이 단계는 이제 생각하지 않고도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단계이다. 즉, 음악으로 따지면, 악보를 볼 필요가 없다. 그냥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연주를 하면, 그것이 바로 음악이 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진정으로 그것을 즐기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네 번째 단계는 완성형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은 두 번째 단계에 머물고, 그 중에서 소수의 사람들만 세 번째 단계까지 오를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에 오른 사람들 중 극히 일부만 네 번째 단계로 변화할 수 있다.
 
사실 네 번째 단계는 다른 말로 각성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에 대해 완벽한 무의식 상태가 될 수 있음은 대단한 일이기도 한다. 이 상태는 다른 말로 무아지경이나 황홀경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위플래쉬 라는 영화가 한 편 있다. 한 재즈 드러머의 성장 과정을 다룬 영화인데, 사실 말이 성장과정이지 그 내용을 보면 기겁할 수준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장면은 주인공이 세 번째 단계를 뚫고 네 번째 단계로 옮겨 가는 장면이 그려진다. 즉, 드럼 연주자로써 기술 능력은 거의 정점에 온 주인공은, 자신을 무시하고 독설을 내뱉으며 채찍질 하는(위플래시의 원래 뜻) 자신의 옛 스승을 향해 폭발된 분노에 휩싸인 채 자신도 모르게 무아지경 상태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각성을 했음을 깨닫고는 자신을 그렇게 힘들게 한 교수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또한 교수 역시도 자신이 원한 연주를 들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영화가 끝난다.
 
아마도 교수의 그런 어처구니 없는 강압적인 태도가 없었다면, 주인공은 세 번째 단계에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삶이라고 해서 그리 나쁘지는 않다. 우리들 대부분은 세 번째 단계에만 머물러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문제는 처음에 이 네 단계에 대해 설명을 했던 엔서니 웰링턴도 지적했듯이, 진짜로 행복한 상태는 아예 시작도 하지 않은 첫 번째이거나 네 번째이다. 즉, 우리는 어린 아이이거나 혹은 각성의 상태가 되었을 때 진정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첫 번째 상태에 머무를 수는 없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야 하기에, 어린아이처럼 삶을 볼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두 번째나 세 번째 단계에 존재한다. 이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단지 음악에만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 자체에도 적용 가능하다.
 
우리는 태어나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첫 번째 단계를 거쳐 두 번째 단계로 옮겨가게 된다. 우리는 어느 시점이 되면, 자신의 삶에 대해 되돌아 봐야 하며, 삶을 정의해야 한다. 또한 삶을 익혀야 한다. 그리고 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자신을 밀어붙여야 한다.
 
그래서 두 번째 단계에 머무르기도 하고, 세 번째 단계로 올라서기도 한다. 문제는 네 번째 단계로 오르는 일이다. 대부분은 네 번째 단계가 있다는 것 자체도 모르고 또한 그 힘든 관문을 통과할 엄두도 내질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의식적인 상태에서는 진정으로 행복하기 힘들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바로 무의식적 상태에서 온다.
 
물론 첫 번째의 무의식과 네 번째의 무의식은 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다' 라고 알려진 불교의 한 선사가 남긴 말과 연결이 된다.
 
원래 아무것도 모를 때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주체가 타자가 아닌, 자신임을 이해하고 깨닫는 순간,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닌 것이 된다. 즉, 산이든 물이든 모두 자신의 마음 속에서 만들어진 허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 그 어떤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수 많은 고뇌의 시간을 보낸 후, 결국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게 된다. 즉, 각성의 경지에 올라 선 것이다.
 
여기는 삼 단계로 우리 인간의 정신 상태를 구분 했는데, 앞에서 말한 두 번째와 세 번째가 중간 단계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사실 삶에 대한 각성은 일반 사람들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것은 차라리 엔서니 웰링턴 처럼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 비유를 해서 네 단계로 보는 것이 훨씬 이해가 편하다. 하지만 음악적으로 네 번째 단계에 도달했다고 해도, 그것은 삶에 대한 이해 수준은 아니다.
 
그럼에도 한 분야에서 각성을 경험하게 되면 삶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 보다는 훨씬 높은 정신 수준에 이르렀기는 했을 것이다.
 
음악을 하기로 했다면, 어떤 음악 수준까지 오를지를 결정하고,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면, 어떤 수준의 정신 세계까지 오를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반드시 네 번째 단계인, 무의식적 지식 단계에 오르는 것만이 최고는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삶은 참으로 다양한 요소가 결합되어 있으므로, 다른 수 많은 분야에서 두 번째나 세 번째 단계로 머물러도 어느 정도까지는 행복할 수 있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네 번째 단계라는 미지의 세계가 있음을 알고 있을 필요는 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그 세계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노력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삶은 짧으면서도 길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 이르러 자신을 규정하고 정의한 채, 그 상태에서 죽는 순간까지 머물기 보다는, 좀 더 멀리, 좀 더 높이 보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물론 노력한다고 해서 누구나 네 번째 단계로 올라서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네 번째 단계가 있음을 알고 사는 것과 세 번째 단계를 끝으로 알고 사는 태도는 크게 차이가 난다.
 
즉, 얼마나 삶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느냐가 다르다. 우리는 누구나 끝에 도달하는 순간 거만해질 수 밖에 없다. 말 그대로 정점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우리들 대부분의 삶은 세 번째 단계에 머무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얼마나 더 성취를 했느냐를 가지고 서로 경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각자가 서로 타고난 능력과 노력을 통해 세 번째 단계에서 남들보다 단 한 발자국이라도 더 앞서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것은 끝없는 경쟁이며, 비교이며, 성취의 단계를 따지는 것이다.

 

하지만 네 번째 단계로 올라선 사람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쓸데 없을 뿐이다.
 

일단 네 번째 단계로 올라서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따지지 않게 될 것이다. 따진다는 것 자체가 바로 의식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의식적인 삶을 살게 된다면, 남과 나를 비교하거나 그런 것을 따진다는 것 자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글을 쓰는 본인 역시 네 번째 단계는 알고만 있을 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다. 그저 살아 생전에 그곳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고 살아가고 있다. 결국 이루지 못할 희망이라고 해도 별 상관이 없다. 어차피 그 역시도 삶이 가진 비밀 중 하나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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