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개미와 소나기

아이루다 2015. 11. 16. 09:49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다양한 형태의 경험을 한다. 그리고 이 경험들은 모이고 또 모여서, 우리가 학교나 기타 여러 장소에서 배운 이론적 교육과 함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써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아주 중요한 자양분의 역할을 한다.
 
또한 경험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가장 유용하고 효과적인 수단이다. 우리는 실제로 경험을 할 때,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가장 쉽다. 물론 경험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귀신을 본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귀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경험은 상상 속의 추론을 위해서라도 중요하다.
 
이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험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그것은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이다.
 
직접 경험은 우리들 자신이 실제로 그것을 경험했다는 뜻이다. 길에서 꽃을 보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하거나,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를 보는 것들은 모두 직접 경험이다.
 
반면에 간접 경험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이들의 경험이나 상상을 보거나, 듣거나, 읽거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직접 경험보다 훨씬 많은 양의 간접 경험을 하면서 살아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시간과 공간적 제약을 받는데다가, 더해서 돈과 신체적 조건 등등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하기에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적인 것들을 갖추고 있기가 어렵다.
 
우리는 동네 앞산이나 좀 더 높은 산에 오를 수는 있다. 하지만 세계에 존재하는 높은 산들은 갈 엄두도 못 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평생 여행만 한 사람이라고 해도 지구의 극히 일부만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알고 지낸다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최대 만 명을 넘기기도 힘들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 소설, 실화, TV, 각종 경험담, 친구의 이야기, 누군가 적은 수기 등등을 통해서 훨씬 많은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지는 못해도, 그곳을 오른 사람이 쓴 책이나 그가 출연해서 방송에서 한 얘기들을 통해서 그곳을 간접 경험한다. 물론 이때 영상이나 사진이 있을 경우, 이해의 깊이가 훨씬 깊어질 수도 있다.
 
이미 말했듯, 원래 경험은 어떤 것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성인에 비해서 경험이 부족하기에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력이 훨씬 떨어진다. 물론 지식도 부족하다.
 
그런데 우리의 경험 중 많은 부분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 간접 경험을 통해서 이뤄진다. 이 말을 다시 위의 말과 연결해서 해석하면, 우리는 어떤 것을 이해할 때, 자신의 경험이 아닌, 타인의 경험을 통해서 이해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이 이해한 것을 복사해서 세상을 이해하기 때문에 사실은 그것을 잘못 이해해서 착각할 가능성도 높다는 뜻으로 해석 가능하다.
 
사실 이것은 꽤나 무서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뭔가 주체적 생각이 없을 경우, 타인의 판단이나 이론 그리고 근거들이 자신도 모르게 우리 자신을 침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이들이 경험하고 주장하는 수 많은 타인의 근거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을 흔히 영향력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사실 우리의 한계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간접 경험을 하지 않을 수도 없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할 때, 간접 경험은 직접 경험보다도 더 큰 역할을 한다. 우리가 만약 모든 것을 다 직접 경험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런데 간접 경험이라고 해서 그것은 오직 타인의 경험만을 통해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간접 경험의 기반은 바로 자신의 직접 경험이다.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낮은 산이라도 올라 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많은 간접 경험은 가장 유사한 자신의 직접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이뤄진다. 그래서 완전히 터무니 없지는 않다. 만약 우리가 산이란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 우리는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하기란 무리다.
 
그것은 단 한 번도 눈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눈을 설명하거나, 단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바다를 설명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유사 경험을 통한 이해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즉, 동네 뒷산에 오른 경험을 통해서 에베레스트나 K2 등을 오른 사람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것을 대충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한계점을 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간접 경험을 통해 얻는 것들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믿기도 한다. 사실 다른 이들에 대한 몰이해나 혹은 잘못된 인식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즉, 사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이 만나면 갈등이 생겨난다. 하지만 과연 누가 제대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으랴. 직접 경험을 한 사람조차도 부분적인데, 그런 사람들의 직접 경험의 이야기만 들은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흔히 개미를 볼 기회가 있다. 개미에 대해서는 많은 학술적 연구도 이뤄졌고, 개미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도 꽤나 여러 편 나와서, 많은 사람들이 개미 사회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떤 애니메이션 장면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상황에 개미들이 당하게 되는 꽤나 두려운 상황을 표현한 것을 기억한다. 사실 기억도 가물가물해서 이것이 진짜 기억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런 상상을 통한 간접 경험을 통해서 약간 귀찮고, 우산을 쓰면 막을 수 있는 그런 빗방울이 개미에게는 삶과 죽음을 갈라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가졌다는 것을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런 장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거나 혹은 상상해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과연 우리들에게 있어서 소나기와 개미에게 있어서 소나기가 가진 의미를 생각이나 해봤을까? 설령 생각을 했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우리의 머리 속에서 상상되는 개미는 애니메이션 속이 개미일 수 있고, 다큐멘터리 속의 개미일 수 있고,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소설 속의 개미일 수 있다.
 
우리는 결코 개미에게 있어서 소나기가 가진 의미를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결코 개미의 입장이 되 볼 수 없다. 사실 개미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존재의 입장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럴 수 있다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 자신의 비슷한 경험을 통해서 타인이 느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태도 말이다.
 
이것은 어린 시절 잠시 배고팠던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평생을 불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겠다는 태도와 유사하다. 더 심한 경우엔, 책에서 읽은 불우한 삶에 대한 지식으로 그들의 삶을 이해하겠다는 소리와 같다.
 
잘사는 나라의 어떤 배운 사람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노동을 해야 하는 어느 소년 가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아동 노동력 착취에 분노하면서 글을 쓴다. 그리고 당장 그 소년이 노동 착취를 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소년이 당장 그 일을 그만두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소년이 그 일을 그만두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누군가 천사처럼 찾아와서 매일 먹을 것을 주고 갈까?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진짜로 일어난다고 해서, 이 소년이 제대로 잘 성장해서 한 명의 인간으로써 존엄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만약 정말로 그럴 수 있었다면, 이 세상은 참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소년이 일을 그만두면 그 가족은 굶어 죽을 뿐이다. 그 소년 가족들에게 있어서, 소년이 받아오는 월급은 누군가에겐 푼돈과 다름없는 돈이지만, 매일 빵을 살 수 있게는 해준다.
 
그런데도 학자들의 말을 듣다 보면, 그 말이 참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란 생각은 든다. 하지마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말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또한 이 현상은 단지 그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인 우리도 늘 그런 짓을 하고 있다.
 
우리는 상대의 행동이나 말투를 기반으로 해서, 자신의 경험을 대비시켜 그 사람을 이해한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늘 반복되는 패턴이다. 우리는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최대한 비슷한 경험을 가져다가 쓴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 적용되면, 큰 실수가 일어난다. 즉, 저 학자처럼 말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원론적으로는 맞다. 하지만 그 소년이 그래서 불행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그 학자의 개인적 경험이다. 사실 그 소년은 생각보다 행복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노동으로 인해 가족이 먹고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상황을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우리가 이해하는 거의 모든 것들은 사실은 오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무엇인가를 온전히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실제로 그것을 자신이 직접 경험을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에베레스트 산을 20번 오른 사람이라도 해도, 그 산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 산은 매일 상태가 바뀌고, 매년 상태가 바뀌는데, 그것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사람 역시도 마찬가지다. 사람 역시도 매일 바뀌고, 매년 바뀌는데, 우리가 어떻게 한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늘 대략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대략적인 이해는 반드시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새롭게 고쳐야 한다. 하지만 고친다고 해서 제대로 고쳐질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제대로 하려고 수정을 했으나, 사실 더 오해가 깊어진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소나기가 내릴 때, 그 거대한 물방울을 피해야 하는 개미가 느낄 그 어떤 것을 상상은 할 수 있다. 그것은 커다란 우박이 내릴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일 수 있다. 그런데 개미는 소나기 물방울에 갇혀서 익사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우박을 맞는다고 익사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어떤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 사람 자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럴 능력은 없다. 설령 그 사람이 되더라도 스스로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는 사람도 없다. 즉,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로 판단한다.
 
왜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했는지, 왜 나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왜 나에게 화를 내는지를 이해한다.
 
그리고 그런 오해들은 모이고 또 모여서 수 많은 갈등을 만들어 낸다. 단어 표현 하나, 표정 하나, 손짓 하나가 모두 오해의 이유가 될 수 있는데도 확신을 가지고 상대에게 주장한다.
 
당신은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의도로 나한테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냐고 따진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가진 한계점이다. 문제는 다음 행동이다. 상대에 대한 이해를 고정시켜 두고는, 갈등이 생겨날 때마다, 스스로를 바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바꿔야 한다고 믿는다. 서로 다 바꿔야 할지도 모르고, 상대보다는 자신이 더 많이 바꿔야 할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믿는다.
 
우리는 누구나 남을 끝없이 의심하지만, 자신을 의심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대략적인 이해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해할 때, 가질 수 있는 확신이 줄어들게 된다. 이것은 물론 피곤한 일이다. 확정되지 않는 것들은 마음 속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이 꺼질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하게 되면, 도대체 걷는 것이 너무 힘들다. 우리는 바닥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이해가 대략적일 수 밖에 없다는 한계는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앞으로 얻어질 또 다른 이해들에 있어서 조금은 덜 굳어진 태도를 가지고 살 수 있다. 또한 스스로 가진 수 많은 착각에서 깨어날 수도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이것을 하고 있느냐, 하고 있지 않느냐는 큰 차이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더 심하게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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