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개에겐 자존심이 없다

아이루다 2015. 10. 20. 16:43

 
두 마리 개가 싸움을 한다. 서로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면서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기 위해 탐색전을 펼친다. 그리고 곧 둘은 날카로운 이빨과 강한 앞다리를 이용해서 상대를 공격한다. 순식간에 일어난 싸움은 몹시 맹렬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둘 중 한 마리가 꼬리를 말고 도망을 치는 장면이 나오면, 싸움은 끝난 것이다. 패한 개는 낑낑거리면서 도망치고 승리한 개는 그 자리에서 서서 아직도 남은 흥분감을 삭히지 못해 씩씩거리면서 자리를 맴돌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진정되어 간다.
 
그런데 아마도 다음에 그 둘이 다시 만나게 되면, 이런 싸움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한번 정해진 승자와 패자의 입장은 꽤나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다.
 
비록 패한 개는 한 동안 물린 상처가 아프고, 이후로 자신을 이긴 개만 봐도 오줌을 지릴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개가 마음의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패한 개는 그저 패배의 순간에 느꼈던 고통을 떠올리면서 공포심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도 그것이 어디냐. 무섭기는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이 들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차이가 바로 개와 인간을 구분 짓는 경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와는 달리, 인간은 보통 다양한 형태의 싸움이 끝나면, 승자는 이겼다는 승리감을 느끼고, 패자는 패했다는 사실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런데 패자가 받는 상처는 단지 육체적인 부분만이 아니다. 그 상처는 마음의 상처를 동반하며, 일반적으로 마음의 상처가 더 크고 오래간다. 

 

문명을 이루고 사법체제를 갖춘 인간은 이제 가능하면 개처럼 싸우지는 않는다. 인간은 그렇게 육체적으로 싸우기엔 너무도 영악해졌다. 우리는 매일 싸우지만, 그 싸움은 보통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싸움을 다른 말로 부른다. 이제 이 보이지 않는 싸움은 '경쟁' 이란 단어로 표현된다.
 
매일 매 순간 경쟁을 해야 하는 우리들은 매일 이기거나 지기를 반복할 수 밖에 없다. 버스에 올라 탄 순간 빈자리를 먼저 차지하거나, 가게에 가서 필요한 제품을 샀을 때도 계산을 위해 줄을 서야 한다. 그런 모든 경쟁은 매일 일어나기에 이것이 사실은 경쟁이란 생각도 잘 안 들고, 혹시 그런 상황에서 이기거나 졌다고 해도 그리 크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그냥 좀 재수가 있거나 없거나 하는 정도로 넘긴다.
 
하지만 대입을 위해 수능을 보거나 취직을 위해 면접을 볼 때는 다르다. 이럴 경우 다른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경쟁에서 이기거나 졌을 때는 그 여파가 아주 크다. 어떤 결과들은 삶 자체를 뒤흔든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싶을 만큼이나 크게 느껴진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경쟁에서 진 것은 그 당사자를 조금이라도 더 불행하게 만든다. 그래서 행복하길 바라는 우리는 누구나 경쟁에서 이기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우리 인간이 어떤 경쟁에서 졌을 때, 그냥 싸움에 진 개처럼 단지 진 것 자체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나 실망 등으로 이어지지 않아서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다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 생각은 단순하지만, 이루어지기는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졌다는 사실로 인해 상처받지 않기엔 너무도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


또 하나 궁금한 생각이 든다. 그것은 우리 인간 역시도 사실상 동물의 종류 중 하나인데, 왜 우리만 유독 개나 고양이처럼 싸우고 난 후, 그 결과가 패배로 끝났을 때, 추가적으로 심적인 고통을 받게 되는지에 대해서 궁금해진다.


우리는 왜 졌을 때, 그 패배를 마음의 상처로 받아들이게 될까?
 
그것이 단지 말싸움이거나 그냥 어쩔 수 없이 운이 따르지 않아서 졌다면 그냥 넘길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사람과 반대로 왜소하고 약한 사람이 싸우면 당연히 덩치가 큰 사람이 이길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머리가 좋은 사람과 머리가 나쁜 사람이 같은 시험을 보면, 머리가 좋은 사람의 등수가 높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것 역시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차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까? 그리고 이런 우리들의 특징은 인간이 원래 그랬던 것일까?
 
우리의 먼 조상들도 지고 나면 자존심을 상해 힘들어 했을까? 갑자기 영화 속에서 봤던 원시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산발에 더러운 옷을 입고 동굴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은 무리의 대장에서 도전했다가 패했을 때, 우리들처럼 자존심의 상처를 받았을까?
 
아니면 그보다도 더 먼 과거에, 우리가 거의 현재의 원숭이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을 때는 어땠을까? 그때를 살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과거로 되돌아가면 갈수록 우리는 현재의 지금 인간들보다도 아마 개나 고양이처럼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싸움에서 진 것은 그냥 진 것뿐이다. 물론 패배로 인해서 손해를 볼 가능성은 높아졌을 것이다. 갓 잡은 먹이 중 맛있는 부위는 가장 강한 녀석 차지가 될 테니까 말이다. 그로 인해서 기분이 나쁠 수는 있지만 덜 맛난 부위를 먹음으로써 생존은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왜 자존심이 상하고, 자신에게 실망하고, 스스로 자학을 하며, 자신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되게 만들까?
 
그냥 능력이 안되어서 그런 것뿐인데 말이다.
 
우리 인간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 우리가 그렇게 된 것은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먼 과거에 노예로 태어나 평생 노예로 살다간 대부분의 노예들은, 노예의 삶을 그냥 받아들인 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보통은 주인이 때리면 맞는다. 그렇지만 이때 노예가 느끼는 기분은 자신을 무시하고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주인에 대한 분노를 느끼기 보다는 사실 공포심을 더 느끼게 된다. 시스템에 적응된 노예들은 자신은 왜 주인에게 늘 져야만 하는지에 대해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다.
 
또한 그래서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자기 모멸감을 느끼지 않는다. 아니 사실 노예에게는 자존감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냥 싸움에 진 후, 도망치는 개와 같다. 그냥 그건 타고난 운명이고,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맞으면 아프지만, 그것은 육체의 고통으로만 끝난다.
 
그런데 그런 노예 중 하나가 주인과 자신은 같은 인간에 불과하다고 느끼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 노예 역시도 맞으면 고통을 느끼지만, 사실 그 노예를 더욱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자신의 처지로 인해서 늘 패하는 입장에서만 있어야 하는 현실이다.
 
그에게 마음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을 훨씬 넘어선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고, 패자가 되었을 때 실제적인 손해를 입는 일보다 더 기분 자체가 몹시 상하게 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이 모두 동등한 존재라고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사람과 사람이 결코 동등하지 않고, 누군가 더 높은 사람이 있고, 누군가 더 낮은 사람이 있다고 믿게 되면, 이 둘간의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설령 졌더라고 기분 나쁘지는 않는다.
 
또 하나 존재하는 것이 있다. 우리의 싸움은 과거 육체적인 영역에서 두뇌적인 영역으로 옮겨갔다. 육체적 능력은 승패를 내는 것이 단순하지만, 두뇌의 능력은 싸움을 아주 복잡한 형태로 만들어 버렸다.

 
설령 육체적 다툼이라고 해도, 패거리를 짓게 되면, 아무리 강한 상대도 이길 수 있다. 과거로부터 한 나라의 왕은 힘이 장사인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한 나라의 왕은 얼마나 많은 패거리를 거느릴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또한 무기의 발달은 육체적 능력이 가진 장점을 크게 희석시켰다. 그래서 힘이 약한 사람이 손에 쥔 권총은 세계 무술 챔피언 자리에 오른 사람보다도 더 강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약점이 있기 마련이니, 자는 동안, 먹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요즘 시대의 인간들은 이제 대부분이 지적 능력으로 경쟁한다. 육체적 능력으로 인한 경쟁은 이제 볼거리에나 등장한다. 우리는 축구, 야구, 달리기, 권투, 레슬링 등을 보지만, 경쟁은 그것을 하는 선수들에게서만 일어날 뿐이다.


승부를 하는 방법이 복잡해지가 승패를 가르는 것도 몹시 복잡해졌다. 그러다 보니, 승패를 가르는데 있어서도 당장 졌다는 것은 좀 더 노력을 하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즉, 우리는 졌어도 패배한 개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치지 않고, 두고 보자는 말을 남기고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패배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 가능성 여부에 상관없이 지금은 졌지만, 미래엔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희망적인 일이긴 하지만, 우리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끝없는 미련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사실 우리가 패배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하기엔 자존심이란 녀석이 늘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존심은 다른 말로 '자아' 라고도 부를 수 있으며, 영어로는 '에고' 라고 불린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이 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이 자아는 언제나 스스로를 좀 더 나은 존재이기 원한다. 우리는 이 자아의 역할로 인해서 도전하고, 승리하고, 욕망을 품고, 집착을 하며, 행복을 얻는다.
 
그래서 자아는 우리의 삶에 필수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자아는 이득을 몹시 좋아하기 때문에 패배를 절대적으로 싫어한다. 그래서 지고 나면 스스로에 대한 실망을 느끼게 하고, 모멸감을 느끼게 하며, 큰 불행함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개와 고양이와 다른 단 하나는 바로 이 자아라고 부르는 존재의 유무이다. 동물들에게는 자존심이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원래 우리 인간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자아는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서 기형적으로 커진 근거 없는 자신에 대한 존재 이유이다.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서 쌓은 지식은 개개인의 자의식을 강화시킬 수 있는 것에 아주 큰 역할을 했다. 덕분에 과거에 비해 요즘 사람들의 자의식은 비교도 안될 만큼 강해졌다.
 
우리는 이제 누구도 노예의 삶이 정상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각자 온전한 존재이며, 각자 이 세상을 살 이유가 있는 존재들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동물과 인간을 완전히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구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믿는다.
 
이것은 나쁜 것은 아니다. 강한 자의식은 우리를 좀 더 발전적으로 만들고, 좀 더 경쟁에 강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 하지만 알다시피 모든 것에는 단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단점이 바로, 패배를 했을 때 받는 큰 상처이다. 원래 패배는 그냥 패배로 끝나야 하는데 우리는 패배를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여기도록 교육 받았다. 덕분에 우리는 개나 고양이거나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받지 않았을 상처를 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개개인이 과거보다 좀 더 경쟁을 잘 해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경쟁의 본질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경쟁은 언제나 승자와 패자를 나누게 된다. 패자가 없는 승자도 없고, 승자가 없는 패자도 없다. 경쟁의 무서운 점은 바로 그것이 장소나 시대에 상관없이 늘 상대적이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와 같이 언제나처럼 승부를 벌여서 승자와 패자를 나누지만, 포기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패자가 되었을 때 과거엔 받지 않았을 추가적인 상처를 지금은 받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리고 그 상처는 스스로 감당하기에 너무 깊고 그것을 노력으로 극복하기도 사실 많이 힘들다.
 
우리는 우리가 소중한 존재이고, 각자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누가 그것을 보증해 준 존재는 전혀 없다. 우리는 그냥 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 해줄 뿐이다.
 
그래서 결국 패자가 되는 것은 승자가 되는 것과 패자가 되는 것 중 단지 패자에 속한 것뿐인데, 패배로 인해 삶 자체를 끝내거나 혹은 깊은 상처로 인해 도저히 혼자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마음의 공간에 갇힌 채 살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패배자에 속한 우리는 피폐해지고, 소극적으로 변하며, 자신을 끝없이 자학하고, 불안해 하며 결국 불행해지고 만다.
 
싸움에 진 개는 잠시 깽깽 소리를 내지만, 언제라도 주인이 안아주면 금새 꼬리를 흔들고 행복해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기엔 방금 진 싸움을 뒤집을 방법을 너무도 많이 알고 있다. 문제는 그것을 행동할 의지와 능력이다.
 
물론 우리가 개와 같은 행동을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좌절하지만 도전하며, 우리는 패배하지만 싸워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위대한 힘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너무도 험난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우리를 평생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주먹 다툼에서 지면, 오랫동안 운동을 하고, 무술을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1등을 못하면 아주 오랫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해도 이기지 못할 상대가 있다. 그래서 평생을 노력만 하다가 끝내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노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평생 노력을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뿐만 아니라,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고통스러워 할 수도 있다.


이것은 포기하지도 못하고 극복하지도 못하는 최악의 상태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생각해야 한다. 왜 우리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것은 사실 근거가 없다. 우리는 언제라도 질 수 있다. 우리는 확률상 늘 50%의 가능성으로 패자가 되어야 한다.
 
어느 날 엄청난 문명을 이룩한 외계인들이 지구에 침략해서 우리를 닥치는 대로 죽일 때, 우리는 그들이게 우리를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단 하나도 댈 수 없다. 그러기엔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는 너무도 많은 생명들을 해치면서 살아왔다.
 
우리가 지면 안 되는 이유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이기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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