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문득 든 상상

아이루다 2015. 10. 14. 10:03

 

두 개의 선이 있다. 서로 나란하게 그어진 선이다. 이 선은 다음과 같이 생겼다.

 

 


이 두 선은 서로에게 평행할 뿐, 아무런 연관이 없다. 즉,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다른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다른 이름을 부여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위의 선은 멋진 선, 아래의 선은 구린 선으로 이름 지을 수 있다.

 

만약 이 선 중 하나가 구부러져서 더 이상 선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해도 다른 남은 선은 계속 선이며, 그것을 선이라고 불러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좀 더 자세하게 바라보니, 이 두 선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너무도 깊게 연관이 되어 있어서 따로 떼어 놓거나, 분리하거나, 이름을 각각 붙이는 것이 이상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 선들의 진짜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사실 이 선들은 하나의 평면을 이루는 네 개의 선 중에 두 개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 두 선 중 하나만 없어져도 더 이상 이 평면은 평면이 아닌 것이 된다.

 

이 단순한 변화를 좀 유식하게 얘기하면, 1차원적인 시야에서 2차원적인 시야로 변한 것이다. 뭐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아니다. 우리가 선에 해당되는 1차원의 세계에서 면에 해당되는 2차원의 세계로 옮기게 되면 새롭게 보이는 내용이다.

 

그런데 문제는 있다. 1차원에서만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 있다면, 그들은 살아 생전에 절대로 그 두 선이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평면을 구성하는 연관된 선이란 점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상상조차 못하는 것이 맞다. 우리의 상상은 경험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은 상상도 못한다. 우리가 외계인을 그릴 때, 우리처럼 팔 다리를 가지고, 눈과 귀를 가진 존재로 묘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외계인을 본 적이 없으니, 인간처럼 상상한다.

 

선은 연결이 되어서 2차원의 물체인 면이 되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니, 똑같이 생긴 면이 하나 도 보였다. 즉, 쌍둥이 선처럼, 쌍둥이 면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상상이 되기 시작한다. 저 면들도 선들처럼 완전히 분리된 객체일까? 아니면 2차원적인 관점에서 보니,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뿐일까?

 

답을 얻는 것은 쉽다. 이제 3차원의 시선으로 그것을 보도록 하자.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모양이 나왔다.

  


사실 그 면들은 직육면체의 위, 아래를 구성하는 면이었다. 2차원적인 관점에서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던 두 면이 3차원의 시선으로 보자, 하나의 물체를 이루는 면이 되었다. 이 면들 역시도 다른 한 면이 없어지면, 그때부터는 직육면체가 아니다. 즉, 2차원에서는 한 면의 실종이 다른 면의 존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3차원에서는 아예 정체성이 상실되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없을까?

 

아쉽지만, 더 이상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3차원이 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1차원에 사는 존재가 두 선이 면의 일부라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우리는 3차원 다음 차원인 4차원의 관점에서 보면, 과연 저 정육면체가 어떤 개체의 일부일 수 있을지를 알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1차원을 사는 존재는 2차원에 대한 그 어떤 상상도 하기 힘들다. 하지만 2차원이나 3차원에 사는 존재들은 1차원이나 2차원의 존재를 통해 차원이 있다는 것 자체를 상상해낼 수 있다. 특히 3차원의 앞의 두 차원 덕분에 4차원이란 말을 상상은 할 수 있다.

 

이말은 우리는 저 직육면체가 무엇의 일부 일지를 모르지만, 무엇의 일부일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상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의 일부일까?

 

보통 우리가 아는 4차원은 3차원에서 시간의 차원이 더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다. 아주 오래된 과거에 존재했던 직육면체와 지금 현 시점에 존재하고 있는 직육면체는 사실상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 물체를 사람으로 치환하게 되면, 과거에 죽은 어떤 사람과 지금의 어떤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할 수있다.

 

이것은 단지 시간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현 시대를 살아가는 수 많은 존재들 역시도 어떤 커다란 개체의 구성 요소로써, 사실은 서로 분리되어 이름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3차원의 세상을 사는 우리는 각자를 영수, 철수, 영희, 순자 등으로 이름 붙이고 부르지만, 4차원의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그냥 우리 몸의 세포들처럼 어떤 커다란 존재를 구성하는 구성 물질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4차원을 상상만 할 뿐, 경험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이 상상은 그냥 상상으로 끝난다.


그렇다면 5차원은 어떨까? 우리가 사는 3차원의 세계에 시간이 더해진 4차원 그리고 이젠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하는 차원 말이다. 우리는 이제 또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보다 한 차원 혹은 두 차원 높은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은 무척 흥미롭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세상에서 절대적 사실이라고 여겨지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해서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와 나를 구분하고,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고, 이 나라와 저 나라를 구분하고,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고, 남과 녀를 구분하고, 아이와 노인을 구분하는 것이 너무도 우스운 일이 된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팔과 다리가 각자 이름을 붙여달라고 하고는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같다. 물론 그럴 수 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전혀 움직일 수 없다. 설령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정말로 대단한 수준의 집중과 협력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3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4차원을 구성한다고 알려진 시간은 단일 방향으로만 흐르고 있다. 그것은 마치 1차원에 존재하는 선이 무한한 평면을 한쪽 방향으로 미끄러지고 있는 모습이다. 또한 2차원에 존재하는 면이 공간 속에서 무한히 위로만 오르는 모습이다.

 

그렇기에 1차원의 존재는 넓이를 이동할 능력이 없어도 된다. 2차원에 사는 존재는 높이를 이동할 능력이 없어도 된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는 시간을 이동할 능력이 없어도 된다. 하지만 4차원에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시간을 이동할 수 있다. 아니, 3차원의 개념으로 따지면 동시에 모든 공간에 존재할 수도 있다.

 

또한 우리 3차원에 사는 우리는 3차원에 걸맞은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구라는 3차원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는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무척 훌륭하지만, 그것은 우리들 기준일 뿐이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들은 우리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각 고유 종의 생존 능력의 결정판이다. 즉, 각자는 자신이 생존하기 위한 가장 뛰어난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바로 눈에 해당된다.

 

물론 인간의 눈은 아주 좋은 시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은 정말로 많은 색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사실 그 어떤 동물보다도 뛰어난 능력 중 하나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우리의 감각기관을 무척 맹신한다. 그리고 우리가 아예 느끼지 못하는 어떤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물로 이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의심이 든다. 어떤 정보들이 있는데, 우리의 오감이 그 정보를 인식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박쥐가 초음파를 감지하듯, 우리는 주변에 늘 들리고 있는 초음파를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이다.

 

물론 초음파 역시 음파의 일종이니, 이것은 그냥 귀가 좀 더 발전된 형태일 뿐이다. 이런 것 말고, 우리가 육감이라고 부르는, 설명하기 힘든 느낌은 어떨까? 그것은 정말로 단지 육감일까? 아니면 우리가 증명할 수 없는 여섯 번째 정보를 취득하는 방법일까?

 

예를 들어서, 만약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파장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육감이라면 어떨까? 우리가 예지몽을 꾸는 사람들처럼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미리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말이다. 사실 우리 인간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거의 쓸 일이 없어서 퇴화되어 버린 것이라면 어떨까?

 

오랜 지하 생활로 인해 눈을 가지고도 볼 수 없는 두더지처럼 말이다.

 

아니, 그것은 퇴화된 것이 아니라, 원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오감 이외에 그 어떤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지 못할 수 있다.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속한 세상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 바탕이 된다.

 

인간은 인간의 사회에서 태어나 자람으로써 감각기관으로부터 얻어진 정보와 이성적 능력을 통해 얻어진 지식을 바탕으로 한 명의 인간으로써 자라게 된다.

 

이 둘 중 하나가 없으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는 죽은 존재가 되거나, 외부로부터 도착하는 정보들을 전혀 해석해내지 못해서 동물과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된다. 즉, 인간이 아닌 동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험을 통해 이해하는 세상에 대한 한계는 명확해진다. 우리는 스스로 느끼고 그것을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오감이 주는 능력과 인간 사회가 만들어 놓은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너무 부정확한 이해이다. 이것은 상대적이며, 시대적이며, 지역적이며 심지어 성별적이며, 성격적이다. 즉, 우리는 어느 시대에 어느 지역에서 어떤 성별과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냐 에 따라 모두 다르게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거기에 종교에 대한 이해까지 곁들여지면, 사실 그 차이는 끝도 없이 벌어진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각자가 경험한 세상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산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귀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어떤 사람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자신이 나무를 만진 촉감이 너무 좋아서 그것이 좋은 촉감이라고 믿고, 다른 사람은 뱀을 만진 촉감이 너무도 좋다고 믿는다.

 

각자 경험하는 세상은 모두 다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자가 경험한 세상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산다. 그러니 우리는 3차원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3차원이 절대적 세상이라고 믿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맞을 수 도 있다. 사실 우주는 아무리 봐도 3차원적인 존재로 보여진다. 적어도 우리들 인간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적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4차원의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상상은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상상은 이 3차원의 세계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깨뜨리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지금 현재 각자의 옆에 있는 다른 사람과 사실은 하나의 커다란 개체를 같이 구성하고 있는 연관된 존재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세포적인 관점이라면, 같은 간에 있는 세포인 셈이다. 이 세포는 뇌 세포와 폐 세포와 같은 세포이긴 하지만, 가까운데 있다는 점에서 더욱 더 친밀한 연관된 존재일 수 있다.

 

그렇다면 노래 가사처럼 너는 내가 되고, 나도 네가 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반쪽이 한쪽이 된다는 시적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정말로 둘이 사실은 하나일 수 있다는 상상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또한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닌 것이 된다. 그것은 단지 변형되는 것뿐이다. 오래된 것이 새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상상에 불과하다. 이 세상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듯 그냥 3차원에 끝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론 물리학자들은 끈 이론을 통해 이 세상은 사실 12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것만 증명해 낼 수 있다면,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혹시 12차원이 존재할 수도 있다. 사실 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차원은 무한대로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원리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한다. 그럼 이론적 근거는 있는 셈이다.

 

이것은 그냥 어느 날 문득 든 조금 흥미로운 상상이다. 그리고 할 수 있으니 해보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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