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이와 욕망의 변화

아이루다 2015. 10. 12. 08:30

 
참 많은 것이 다르고, 그래서 한없이 불평등해 보이는 인간이지만, 단 하나 누구에게나 완벽하게 공평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개개인에게 흐르고 있는 '시간' 이다.
 
물론 현재로써는 '죽음' 도 공평한 것 중 하나이다. 돈이 아주 많았거나, 큰 권력을 쥔 채 살았거나, 수 많은 자녀를 두었거나, 누구보다도 행복했거나 상관없이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
 
하지만 미래로 갈수록 죽음은 공평하지 않은 것이 되어 갈 것이다. 이미 지금도 그런 전조가 있다. 부자일수록 죽음은 늦게 찾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엔 죽음조차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죽음이 사라진다고 해도 시간은 흐른다. 우리가 어딘가 아주 먼 장소에 가서 시공간 자체가 다른 삶을 산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끼리는 공평하다. 단지 외부에서 보기에 달라 보일 뿐이다.
 
하지만 시간은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불공평하다. 물론 우리 지구의 시공간에서의 시간은 거의 절대적으로 동일하게 흐르지만, 우리가 시간을 인식하는 것은 이런 실제적 시간이 아닌, 지각적 시간이기 때문이다.
 
현재 물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흐르는 절박한 시간과 너무도 사랑하는 연인과 보내고 있닌 행복한 시간은, 같은 1분이라고 해도 큰 차이가 난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겐 단 1분이 마치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지고, 누군가에겐 1분이 눈만 깜빡여도 지나가기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모든 이들에게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지만, 모든 이들에게 경험되는 시간은 서로 다르다. 모든 이들은 같은 시간을 모두 다르게 느끼고, 경험하고, 변화하고, 기록된다.
 
그리고 이런 시간과 우리 인간이 매년 먹게 되는 나이를 엮어서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과연 어떤 변화를 겪고, 무엇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어떤 시간이 흐르든 상관없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흐른다. 그래서 누구나 무의지적으로 나이를 먹게 된다. 그런데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은 현재 각자 개인이 어떤 시기를 통과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어린 시절의 나이는 많은 것을 제약하는 것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서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젊은 시절의 나이 역시도 비슷하다. 하지만 소위 말해서 젊은 시절을 벗어난, 30대에 접어들면 우리의 나이에 대한 관념은 완전히 바뀐다. 이젠 본격적으로 나이를 덜 먹고 싶어한다. 그 후로 점점 더 그래진다.
 
그리고 또 하나 바뀌는 것이 있다. 이것 역시도 자신의 어느 시기에 속해 있는지에 따라 다르다.
 
그것은 바로 각 개인이 느끼는 욕망을 대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행복하고 싶은 마음을 대하는 법이다.
 
어린 아이의 시절의 욕망은 부모에게 떼를 써야 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부모와 싸운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울거나, 떼를 쓰거나, 타협을 해서라도 하려고 한다.
 
아이들이 이러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무엇이든 욕망을 느끼는 것을 하면 기분이 좋고 결국 행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런 태도는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어진다.
 
청소년 시절의 욕망은 어린 시절에 비해서는 좀 덜 마구잡이이다. 자신과 잠재적 경쟁자들이 다른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욕망을 어린 아이처럼 표출하다가는 큰 다툼이 일어나거나 친구를 사귀는데 있어서 문제가 된다는 것을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배우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이나마 욕망을 숨긴다. 그렇지만 욕망을 없애지는 못한다.
 
그래서 그 시기는 질풍 노도의 시기가 된다.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넘쳐나는데 많은 외부 및 내부 요소로 인해서 벽에 가로막히거나 좌절을 하게 된다. 그 요소들에는 얼굴, 성격, 몸매, 지능, 운동 능력, 관계성, 노래, 미술, 춤, 흉내내기 등등 정말로 많은 것들이 속해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욕망은 숨겨진다.
 
청소년 시기를 보낸 사람들은 아마도 대부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 받게 된다. 물론 이 시기에도 그것을 잘 못 판단해서 엉뚱한 길을 가는 사람들도 꽤 되기 때문에, 삶은 고달파진다.
 
아무튼 우리는 20대에 들어서면, 이제 먹고 사는 문제, 이성과의 관계 등에 욕망을 느낀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계속돼온 행복에 대한 욕망은 지속된다. 단지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지에 대한 대상만 바뀐다.
 
30대가 되면 이젠 20대의 욕망들이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지가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번뜻한 직장을 잡고 살아가며, 누군가는 미래도 꿈도 보이지 않는 암흑과도 같은 터널을 보내면서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한다.
 
이렇게 꿈과 희망의 30대를 보내든, 아니면 절망의 30대를 보내든 상관없이 40대가 되면 이제 좀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느끼고 품은 욕망을 이젠 어느 정도 가려낼 줄 아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즉, 이젠 모든 것에 대해서 욕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서 할 수 없는 일을 하면서 괜히 불행해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린 시절엔 어떻게든 이어나가려고 노력하던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음에 잘 맞지 않는다 싶으면 서서히 끊어진다.
 
즉, 우리는 더 이상 불필요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노래를 못한다고 해서 노래방에 가서 노래연습을 하지 않는다. 그냥 노래를 부를 기회를 갖지 않는다. 술을 먹지 못하면 술을 잘 안 먹는 모임에만 나간다. 농구를 할 일도 없지만, 농구를 하지 못한다고 해서 친구들과 어울림에 있어서 문제가 없게 된다.
 
모든 것들이 그렇데 변한다. 하지 못하고, 해서 기분만 상한다면 그것을 하지 않는다. 억지로 하지 못하는 일을 하면서까지 다른 이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40대가 된 많은 사람들은 마음이 불편한 것을 그 무엇보다도 피하려고 애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회사에서도 진급보다는 오래 버틸 수 있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 벌고 싶은 돈도 더 많은 돈을 원하기 보다는, 가진 돈을 최대한 잘 지키길 바란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어떤 욕망을 해결하기 보다는, 소극적으로 욕망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바뀐다.
 
물론 이 시기가 영원히 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아직 좌절을 하지 않았다. 회사 내에서 사장의 자리를 노리고, 돈을 더 벌 수 있는 기회가 지속적으로 찾아온다. 생각보다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도, 살아가면서 끝없이 더 많은 능력을 갖기 위해서 노력한다.
 
설령 골프를 치는데 있어서 잼병이라도 해도, 자신의 주변에 자신이 한 번의 샷을 날릴 때마다 '나이스 샷' 을 외치는 사람들을 둘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면 된다. 즉, 돈만 많으면 사실 그런 것들은 쉽게 해결이 된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은 아주 소수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욕망을 대하는 태도가 소극적으로 변한다.
 
50대가 되면 이런 태도는 더욱 더 깊어진다. 그래서 이젠 서서히 욕망 자체를 덜 느끼게 변한다. 우리는 이때 농구를 잘하거나 달리기를 잘하길 바라기 보다는, 몸만 건강해도 충분히 만족해 한다.
 
오랜만에 전해온 친구의 소식은 결코 반갑지 않는 내용들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이거나 자녀를 결혼시키니 와서 돈을 내라는 연락이다.
 
우리는 좀 더 욕망이 줄어든다. 하지만 이때도 역시 그 욕망을 점점 키우는 소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후 60대를 걸쳐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겪는 경험은 이 흐름의 연장일 뿐이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점점 욕망을 줄인다. 심지어 죽음 직전엔 먹은 것을 소화해 내는 능력만 되도 만족해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점점 마음을 비우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래서 스스로도 왜 젊은 시절에 타인과의 관계, 회사내의 승진, 가정에서의 주도권, 돈 같은 것들에 목메고 살았는지 의아해 할 정도로 변하기도 한다.
 
하고 싶은 것 중에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설령 할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이 놓인 처지를 생각해서 결정을 하게 됨으로써 감당하기 힘든 무모한 일을 벌이지 않는 지혜도 얻게 된다.
 
개인적 입장에서 출세를 하거나 명성을 얻는 것보다도 가족과의 관계가 더 중요함을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 이루고 싶은 삶과 행복할 수 있는 삶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행복한 삶을 향해 살아가게 된다.
 
이런 변화는 너무 커서 마치 그 사람에게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이런 변화는 단지 포기된 것뿐이다.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포기한 것뿐이다. 그리고 그 증거는 바로, 나이를 먹어도 결코 변화되지 않은 채 끝없이 개인적 성과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회사 내에서 승진보다는 잘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승진을 포기한 것일 뿐이다. 경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은 더 이상 추구하지 않을 뿐이지, 자신이 충분히 누구든 상관없이 이겨서 사장 자리에 올라갈 능력이 된다면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많은 관계를 맺을 능력만 된다면 더 많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돈 역시도 마찬가지다. 돈을 더 벌 수 있는 능력이나 기회가 확실하게 주어진다면 그것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우리가 그런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는 이유는 불확실성 때문이다. 해낼 수 있는 믿음이 없고, 또한 해냈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명확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없다는 불안함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불확실성과 불안함을 없애기엔 살아오는 동안 많은 실패를 보았고, 스스로도 경험했다.
 
결국 어린 시절부터 다시 살펴보면, 우린 어린 시절에는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울고 떼를 쓰고 해서 얻어내려고 애썼고, 나이를 먹고 난 후에는 그런 노력을 해가면서 까지 갖고 싶어하지는 않을 뿐이다. 물론 울고 떼를 써도 받아줄 사람도, 그것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주변에 존재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포기했다고 표현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우리는 이것을 내려 놓았다고 표현하길 좋아한다. 다른 말로 받아 들였다고 하는 표현도 선호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면 자신의 삶이 그리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길을 갈 때면, 그 길을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결정한 길이길 바란다.
 
우리가 가진 끝까지 남은 자존심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포기한 상황을 인정하기 힘들게 만든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불필요한 욕망을 내려놓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들은 불필요한 욕망이 아니다. 그것들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욕망이다.
 
제주도를 방문한 여행자는 유럽 여행이 부럽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유럽 여행을 가보지 않았고 더해서 유럽 여행을 갈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콩나물 무침보다는 스테이크를 먹는 자신을 좀 더 낫다고 느낀다. 우리는 돈이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것을 선호한다. 우리는 직급이 낮은 것보다는 높은 것을 선호한다. 우리는 친구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보다는 많은 것을 선호한다. 우리는 자신의 결혼식에 사람이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것을 선호한다.
 
우리는 운동을 하면 못하는 것보다는 잘하는 것을 선호한다. 우리는 외모가 못생긴 것보다는 잘생긴 것을 선호한다. 우리는 공부를 못하는 것보다는 잘하는 것을 선호한다. 사실 우리는 모든 것에 선호하는 것이 있다.
 
이런 우리의 특징은 평생에 걸쳐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변화했고, 받아 들였고, 내려 놓았다고 해도 자신의 자식이나 손주가 어떤 식으로든 잘난 존재가 되길 바란다. 이 태도는 우리가 결코 근본적으로 변하지 못함을 증명해준다.
 
사실 진정한 의미의 받아들임은 매우 본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을 마치 하지 않는 듯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할 필요가 없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싶어 할 수도 있다. 단지 하고 싶다고 해도 그 목적이 없다. 그것은 그냥 하고 싶은 것뿐이다. 노래를 해서 행복하다면 그저 노래를 할 뿐이다. 그 노래를 잘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기존으로 봐서 결코 쉬운 변화가 아니다. 이것은 어린 아이시절부터 너무도 깊게 박힌, 우리들의 본성을 뒤흔드는 변화이다.
 
그래서 이것을 스스로 해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런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단지 시간이 흐르고 그로 인해서 나이를 먹다가 보니, 자연스럽게 생겨난 포기 덕분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싶기에 할 수 없는 일을 자연스럽게 포기한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최대한 만족하려고 노력하는 삶을 산다. 그것이 나이를 먹는 사람들의 가장 흔한 흐름이다.
 
손주들의 뛰어 노는 모습에 한껏 인자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 안에 숨겨진 욕망은 동일하며, 그 욕망은 손주들의 미래를 향해 투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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