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인간에게 있어서 감정의 역할

아이루다 2015. 10. 7. 06:43

 
예전에 이퀄리브리엄이란 영화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크리스찬 베일이란 배우를 처음 접하게 된 영화인데, 그 후 그 배우가 꽤나 연기력도 있고, 유명한 배우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이 영화는 인간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인간이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를 제거하는 약물을 투여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주제의식과 기타 영화 전개는 너무도 뻔해서, 영화 자체는 그리 기억에 남질 않는다. 그나마 이 영화의 묘미라면, 화려한 권총 액션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흔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복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단순 명료하게 설명해준다. 즉, 감정이 없기에 아무런 것도 느낄 수 없는 인간은, 결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을 영화를 통해서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인간은 원래 감정과 이성을 가진 존재로 설명되곤 한다. 그 중에서 이성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할 수 있는, 인간 고유의 능력으로 취급될 정도로 그 역할에 큰 의미를 부여해왔다.
 
그런데 이런 이성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고 나뉜다. 하나는 어떤 것을 이해하고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지적인 역할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인간의 또 다른 영역인 감정을 억제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조정자로써의 역할이다.
 
여기에서 이성의 지적 역할에 대한 부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성적 능력을 통해서 인간이 가진 가장 중요한 능력인 지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흔히 우리가 이성이라고 말할 때, 이 이성이란 단어는 보통 이 역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쓰는 이성이란 단어는 보통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역할로써 사용되곤 한다.
 
그리고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은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이퀄리브리엄이란 영화나 다른 많은 종류의 작품에서 인간은 감정을 가질 수 있음으로써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성은 그 감정을 조절하려고 애쓴다. 그렇다면 이성은 행복을 방해하는 능력일까?

 

물론 아니다. 이성은 감정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보호하고, 연장하고, 예약하는 역할을 한다. 미래의 꿈을 위해서 오늘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작용하고 있는 이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문득 엉뚱한 생각도 든다. 영화 속처럼 정말로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모두 없애면 영화 속 세상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흑백의 세상이 열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이 반드시 없어져야 하는 나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감정은 크게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이 된다. 우리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감정인 즐거움, 감동, 따뜻함 등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질투심, 분노, 두려움 등은 나쁜 것으로 분류된다.
 
여기에서 물론 좋은 것들은 당연히 남기는 것이 좋겠지만, 반대로 나쁜 것들을 다 없앨 수만 있다면 그것이 정말로 잘못된 선택일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두려움도 질투심도 분노도 느끼질 않고, 기타 다른 모든 나쁜 종류의 감정을 느끼지 않고 오직 이성적 판단으로만 사는 세상은, 영화 속처럼 그런 세상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세상에 큰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거부감의 근원에는 감정의 좋은 면, 즉 나쁜 감정을 안 느끼기 위해서 같이 사라져 버린 좋은 감정에 대한 아쉬움 혹은 깊은 두려움이 존재한다. 말 그대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일단 감정이 없어져 버린 상태가 된다면, 두려움을 느끼지 못할 테니까 이 두려움은 그다지 실제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 말이다.
 
물론 현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이런 세상을 비 인간적인 세상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의 희망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로 그런 세상을 지켜내고 있는 것일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세상의 흐름을 좀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 감정을 점점 더 줄여가는 쪽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그런 판단이 맞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교류 방법인 사람간의 대화 방식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 과거에 비해서 대화의 방식은 어떻게 바뀌고 있을까?
 
전화가 발명되기 이전 수 천 년간 , 우리는 무조건 만나야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100여년 전 전화가 발명된 후, 우리는 먼 거리에서도 목소리만을 들으면서 대화를 했다. 현재 시점은 이제 문자가 많은 대화를 대신 하고 있다.
 
인간의 대화는 원래 목소리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엔 표정, 몸짓, 눈빛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전화기를 통해 나누는 대화는 목소리 톤을 통해서 상대의 감정에 대한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자는 완전히 다르다. 사실 문자는 모든 감정을 숨길 수 있다.
 
우리는 요즘 많은 메신저에서 'ㅋㅋㅋ' 나 'ㅡ,ㅡ' 나 'ㅠㅠ' 등의 이모티콘을 써서 감정 표현을 대신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것은 노력이다. 안하고 싶으면 안 해도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신호들은 노력해서 감출 수가 없다. 흥분한 목소리, 지루한 눈빛 등은 숨기고 싶다고 해서 숨겨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점점 더 목소리를 통한 대화보다 문자를 통한 대화를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문자가 대화보다 편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불필요한 감정 낭비를 안 해도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상대에게 전혀 공감을 못해도, 공감하는 척하기가 매우 쉽다.
 
힘든 일을 당한 친구에게 속으로는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아도 '어떻게 하니 ㅠㅠ' 라고 문자를 보내는 것은 쉽다. 하지만 이것을 직접 만나서 정말로 슬픈 얼굴로 같은 말을 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래도 관계 유지를 위해서 위로를 하기 위해 친구를 만나야 할 때가 되면 결국 부담스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만나게 되면, 친구의 숨겨져 있던 사연들을 더 듣게 되고, 그러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게 좀 더 공감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많은 이런 우연한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좀 더 관계가 깊어지곤 한다. 하지만 문자는 감정을 쉽게 표현할 수 있지만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문자로 전달되는 대화는 이미 깊어진 관계에서는 괜찮지만, 시작하는 단계의 관계에서는 금새 끊겨 버린다. 그리고 깊어진 관계 역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퇴색되어가기에, 가끔은 새로 덧칠 해줘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문자로는 안 된다.

 

물론 전화가 발명되기 이전에도 문자는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편지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편지는 거의 한 편의 수필과도 같았다. 전달이 워낙 느리기에, 사람들은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글을 썼다. 그래서 요즘의 문자와는 완전히 달랐다. 사실 요즘 누가 그런 편지를 쓰겠는가?
 
좀 더 진행해보자. 그래서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더 미래를 향해 가보자. 우리는 미래의 어느 날, 몸의 장기와 신체를 모두 기계로 바꿀 것이다. 오래 사는 꿈은 세포를 늙게 하지 않거나 기계 몸으로 대체되는 것으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기계 몸의 꿈이 더 일찍 이뤄지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이때도 비슷하다. 뼈와 살로 이뤄진 우리 몸은 감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고, 기계로 이뤄진 몸은 이성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기계로 이뤄진 몸은 언제든 어떤 상태가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것은 얼굴을 마주하고 나눈 대화와 문자로 나누는 대화와의 차이점과도 같다. 문자로 나누는 대화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어떤 상태이든 이모티콘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아주 손쉽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화가 난 상태에서도 친구에게 온 재미난 이야기에 'ㅋㅋㅋ' 라도 대꾸를 해줄 수 있다. 비슷하게 기계 몸이 된다면, 우리는 화가 난 상태에서도 버튼을 눌러 춤을 출 수 있다.
 
이것은 결코 감정이 아닌 이성적 능력이며, 기계 몸이 가질게 될 능력이다.
 
이런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우리는 점점 더 이성적으로 사는 세상으로 발전해나갈 것이란 점은 거의 확실하다. 단지 아마도 감정의 좋은 면은 지키고, 나쁜 면만을 없애려 할 것이다. 즉,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감정은 없애지 않으려고 애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생각대로 될까? 또한 어떤 실수로 인해서 우리가 정말로 감정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될까?
 
물론 인간과 로봇의 경계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졌던, 블레이드 러너라는 영화나 이퀄리브리엄까지 일관성있게 감정의 중요성을 주장해왔다. 인간의 감정은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용도로써, 인간이 왜 인간일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써 사용된 것이다.

 
그러니 감정이 없는 삶은 인간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자, 그렇다면 이제 좀 더 상상력을 확장 시키자.
 
과연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면, 그것은 그리도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느끼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아마도 둘 중 하나일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상상은 아마도 아무것도 느끼질 못하니, 전혀 행복하지 못한 삶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무런 감정의 기복이 없으니, 정말로 평온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그것을 경험할 수 없으니, 이 중에서 어떤 상태가 답이 될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그런 세상이 되면 감정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 진 그 모든 인간의 가치가 다 부정될 것이란 것이다. 우리는 감정에 의해 끝없이 흔들리기에, 거꾸로 그것을 극복하고 노력하는 것을 가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죽을 수 있기에,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을 위대하다고 칭한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감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엔 우리가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랑도 포함되니까 말이다.
 
얼마 전 본, 미드 슈퍼 내추럴에는 천국에 대한 상상이 나왔었다. 거기에서 천국은 이승에 있을 때 자신을 가장 행복했던 장소에서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일을 하면서 영원히 사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예전에 죽은 늙은 바비 아저씨는 자신의 낡은 집에서 라디오를 들으면서,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영원히. 
 
그런데 좀 생각해보면 그 장소가 정말로 천국인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은 1년만 그렇게 보내도 지루함을 느끼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끝없이 다른 장소와 다른 일을 한다고 해도 영원한 시간 앞에서 버텨낼 수 있을지는 큰 의문이다. 결코 쉬워 보이질 않는다. 우리는 100년만 살아도 사실 많은 것들에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곳은 잘못하면 지옥이 될 수도 있다. 당장 불 속에서 타고 있지는 않아서 고통은 없지만, 지루함의 고통 역시도 결코 견뎌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곳이 천국으로 유지가 되려면 천국에는 지옥을 볼 수 있는 TV 채널이 반드시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법은 바로 감정을 없애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느 곳에서 영생을 해야 하고, 그것을 버텨내야 한다면 감정을 느끼지 않는 방법 이외엔 없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감정의 변화에 못 이겨서 결국 정신적으로 무너지게 될 것이 뻔하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천국에서는 자살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천국에 대한 상상은, 지상에서 기계 몸 속에 들어가서 영생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영생을 하는 이 세상을 천국으로 여기고, 그런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겠지만, 실제로는 지옥의 문을 연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초기에 영생을 하게 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고 늙어서 죽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상대적 행복감을 통해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천국에서 지옥을 관람하면서 사는 재미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점점 더 기계가 되어감에 따라서 그런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지옥이 없는 천국은 과연 유지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 기계 몸은 절대로 싼 가격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이유로 인해서 인류는 아주 소수의 무한의 삶을 사는 사람들과 대대수의 삶을 사는 사람들로 구성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지켜온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키면서,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미련을 뒤로한 채, 인간에 대한 가치를 지키면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소수의 어떤 사람들은 기계 몸을 갖기 위해서 삶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몇 백 년이 지나게 되면 이것은 단지 상상이 아닌 것이 될 수 있다. 물론 미래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영화 속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감정이 없는 삶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그리고 감정을 유지한 채 천국를 지키기 위해서 지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비열한 상대적 행복감을 얻는 방법일 수도 있다는 점도 생각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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