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이해와 원리

아이루다 2015. 10. 8. 13:24


보통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리를 알아야 한다는 말들을 자주 듣는다. 그리고 이 말은 대부분이 경우에 옳다. 그런데 이 말엔 한 가지 숨겨진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대상이나 현상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 원리를 알아야 한다면, 과연 어디까지를 원리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싶다면, 사람을 구성하는 장기와 식사, 소화, 호흡 등의 작용하는 원리에 대해 이해하는 수준에서 머무를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래야 전해질을 쓰거나, 심장이 멈췄을 때 전기 충격을 줄 수 있는 근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 아니다. 우리는 소화작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화학반응을 이해하기 위해서 분자 단위의 원리를 이해하면 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원자가 있다. 원자도 끝이 아니다. 그 안엔 양성자, 중성자, 전자가 있고 또 다시 미립자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러니 과연 어느 원리를 적용해서 이해를 해야 우리 몸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또한 그 이해를 한다는 것 자체의 목적도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몹시 다른 원리들이 적용된다. 정신과에서는 뇌의 화학작용을 원리로 이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뇌를 연구하는 어느 한 집단에서는 그것이 뇌의 전기적 동작 원리가 최고의 이해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생각보다 중요한데, 이 원리를 잘못 알고 이해하게 되면, 대상에 대해서 큰 착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현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적용한 원리가 정말로 진짜 원리가 아닌, 중간 단계였거나 사실상 중요 원리가 아닌, 곁가지로 붙어있는 수준의 원리였다면 그 현상에 대해 아주 심각한 착각이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류에게 있어서 지구 온난화에 대한 문제는 수 십 년 전부터 큰 문제가 되어왔다. 그래서 각 나라는 협정을 맺고, 이산화탄소 배출 권리를 정해서 지구 대기를 지키기 위해 범 지구적인 노력을 하는 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노력의 배경엔, 인간이 배출한 이산화탄소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라는 연구 결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구 온난화의 원리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산화탄소가 온실효과를 일으켜서 지구 온난화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 위로 그 이산화탄소가 인류의 각종 생산 및 소비 활동에 의해서 크게 증가되었다는 원리가 얹어져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거대한 음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 지구는 지금 자연스럽게 전체 온도가 높아지는 시기를 향해 가고 있다는 원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구는 원래 예전부터 빙하기와 해빙기를 번갈아 가면서 겪었었고, 그 중간을 간빙기라고 부른다. 또한 빙하기 역시도 대규모와 소규모로 나뉘는데, 가장 가까운 과거에 있었던 소 빙하기는 수 만 년 전에 끝이 났고, 그 후로 지구가 점차 따뜻해지면서 인류의 문명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지구가 따뜻해지는 것은 태양을 포함한 큰 우주적 변화로부터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그것이 당연하다는 반론이다. 사실 그리고 이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의 양은 화산이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의 양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의 양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는 지구 전체의 이산화탄소의 양에 비해서 조족지혈 수준이다. 그러니 인간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의 양을 조절함으로써 지구 온난화를 막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헛된 망상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지구 온난화의 원인 중, 어떤 의견이 맞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문제는 이것이 각각 지구 온난화의 원리로써 적용 될 경우, 그것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아주 큰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아주 큰 오류를 범하게 될 여지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보다 더 밑에 깔린 원리인, 이산화탄소가 온난화의 주범이란 것 자체에도 반론이 있는데, 사실 온난화의 주범은 이산화탄소가 아닌, 수증기라는 설명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의 배경엔,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 차지하는 비중이 1%도 안 된다는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엇이 진짜 원리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잘못 이해된 원리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킨다.
 
과거 중국 공산당 혁명을 성공시켰던 마오쩌둥에 대한 일화가 있다.
 
그는 어느 날 농지를 시찰을 하다가, 논에 많은 참새가 쌀알을 훔쳐먹는 것을 보고는, 참새를 해로운 새로 정의하고는 전국적인 참새 소탕을 명령했다. 그리고 참새 한 마리당 돈을 지불했으니, 얼마나 많은 참새가 잡혔을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참새가 사라지자 참새로 인해 그 개체수가 조절되던 수 많은 벌레들이 벼를 모두 갉아먹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 후 중국은 참새의 개체수가 복구될 때까지 엄청난 기근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 굶어 죽은 사람이 4천만명 정도라고 하니, 현재 대한민국 인구의 80%정도에 해당되는 사람이 죽은 것이다. 이것은 참새가 곡식을 훔쳐 먹는 모습만을 보고, 그 겉으로 보이는 원리만을 적용해서 판단한 아주 어리석은 모습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아마도 오랫동안 인류 역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오류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보면, 과거의 어리석은 판단들은 쉽게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시대를 기준으로 이해된 제법 그럴듯한 원리들이 미래의 어느 날에는 비슷하게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이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었던 과거의 믿음처럼 말이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며, 또한 당장은 이해가 되었다고 해도 끝없는 의심을 해야 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당연하게도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적용한 원리가 도대체 얼마나 적절한 수준에서 적용되었는지가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설령 원리적으로는 전혀 틀림이 없지만, 실제로는 전혀 맞지 않는 원리를 적용해서 대상에 대해 터무니 없는 평가를 하거나 판단하는 일이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솔직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무척 중요한 가치라고 믿지만, 사실 어떤 사람이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표현한다면, 우리는 금새 그 사람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누가 속에 있는 말을 다 하는 사람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원리 조차도 사실상 상황에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즉, 우리는 살아가다가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 더 옳은 상황에 자주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거짓말을 하는 원리가 옳은 것인지,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옳은 원리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좀 웃긴 상황을 연출하는데, 어떤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원리를 알아야 하는데, 그때 적용시킬 원리를 결정하려면 이미 그 원리들에 대해서 이미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서로가 물고 물리는 일종의 모순 상태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의도치 않게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잘못된 원리를 적용시키고 만다.
 
40대가 된 아내가 갑자기 외출이 잦고, 화장을 하고, 외모에 신경 쓰는 것이 느껴져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바람이 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도출한 경우도 그것에 해당될 수 있다. 물론 이 의심은 나름 합리적이다.
 
하지만 이보다는 40대 느낄 수 있는 갱년기 증상이나 혹은 우울증에 대해서 걱정해보는 것이 우선일 수 있다. 여기에서 잘못된 판단을 해서 아내를 의심해서 잘못했다간, 그나마 남은 신뢰마저 무너져서 그나마 지탱하던 가정이 완전히 끝날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고민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상대를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다. 만약 상대가 행복한 고민을 한다면, 그 행복을 깨뜨리는 조언을 해 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불행함에 대한 고민을 한다면, 아주 쉽게 그것을 결정하라는 식으로 조언을 하고 만다.
 
예를 들어서 남자와의 결혼을 앞둔 여자가, 남자친구는 돈도 많이 모았고, 외모도 좋고, 직장도 좋은 것 등등 다 좋은데 취미로 게임을 즐기는 것이 좀 걱정스럽다는 고민을 하면, 많은 사람들은 게임을 하는 남자와는 절대로 결혼을 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게임의 문제점에 대해 장황한 문제를 설명해준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취미가 게임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몸 상고, 돈 많이 들고, 잘못하면 여자 문제까지 생길 수 있는 술 먹는 것도 아니고, 비록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주말마다 어디론가 사라지는 낚시도 아니다. 또한 집에서만 하더라도 아주 많은 돈이 드는 오디오를 사는 취미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게임 하는 취미는 그리 나쁜 것이 아니라고 조언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원래 처음 이 질문은 던진 여자의 심리는 그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녀는 그냥 잘난 자신의 남자 친구 자랑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심리를 본능적으로 알아채고는 절대로 여자가 원하는 답을 안 해줬을 수도 있다.
 
우리는 사실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실수를 아주 많이 한다. 그 원리는 맞지만, 적용을 잘못해서 엉뚱한 결론을 내는 실수를 하는 것 말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심리 전문가는 절대로 누구와도 싸우지 않을 것이고, 유아 교육 전문가는 자신이 아이를 언제나 훌륭한 인재로 키워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그들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배운 다양한 원리들을 현실 속에서 적절하게 적용하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암 전문의라고 해서 암에 걸리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설령 어떤 것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원리를 잘못 적용했다고 해도,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평생 동안 모르고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혹시라도 의심이 가더라도, 자신이 적용한 원리 자체는 결코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설령 잘못된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가는 금새 그것을 머리 속에서 밀어내어 버리고 만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하는 짓 중 하나이다.
 
물론 우리는 그런 실수를 한다고 해서 마오쩌둥이 저지른 판단 착오 정도의 큰 실수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운이 좋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럴만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평생 동안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늘 적절한 수준의 원리를 적용해서 이해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그리 좋은 판단은 아니다.
 
사실은 잘 따져보면 잘 적용된 원리보다, 그렇지 못한 원리가 더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 일에 대해서 정말로 아는 것이 적기 때문이다. 즉, 정보 부족으로 인해서 우리는 늘 잘못된 이해를 하거나 판단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이것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다. 그래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스스로 얻은 그 어떤 종류의 이해나, 그것을 근간으로 한 많은 판단들이 늘 옳았을 것이란 것은 경계해야 한다. 즉, 우리는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쉽지 않지만, 그 옛날에 소크라테스가 살아 생전에 그리 주장했던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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