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혼자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한 흔한 설명서

아이루다 2015. 10. 3. 10:42


최근 뉴스 기사에 서울에 혼자 사는 사람들의 비율이 전체의 25% 정도 된다고 한다. 그야말로 네 집 중 한 집이 혼자 사는 가구인 셈이다. 거기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혼자 산다는 것은 우리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보면, 그다지 좋은 형태의 삶은 아니다. 우리 민족은 과거부터 같이 북적이면서 사는 것을 좀 더 선호했다. 그래서 흔히 혼자 산다는 것에 따라 붙은 해석은 '외로움' 이 되고 만다.

 

그런데 좀 더 정확히 말해서 '혼자 사는 것'과 '홀로 사는 것'은 좀 더 명확히 구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혼자 사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 선택한 면이 있지만, 홀로 사는 것은 같이 살수 있는 다른 존재 자체가 없어서 발생하는 비 자발적 상태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좀 더 부연 설명을 하면, 혼자 사는 것은 사실상 단지 잠을 혼자 자는 것뿐일 수도 있다. 반면에 홀로 사는 것은 삶 자체를 혼자 외롭게 보내야 하는 경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혼자 사는 사람이 혼자 사는지, 홀로 사는지를 결정하는 경계 지점은 그리 명확하지는 않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밖에서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고, 집은 단지 잠만 자는 장소가 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더해서 요즘처럼 온라인 만남이 발달된 상황에서라면, 사실 그 작은 스마트 폰 하나만으로도 혼자 있는 집안이라고 해도 거의 모든 사람들과의 실시간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니 이런 형태의 삶이라면 혼자 사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주 가끔 외로울 수는 있지만, 혼자 사는 삶이 주는 장점을 충분히 누리고 살기에, 그것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반면에 홀로 사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말 그대로 홀로 존재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이 홀로 존재하는 것도 사실은 두 가지 모습으로 분리가 된다. 그것은 두 가지 전혀 다른 이유로 홀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완전히 비 자발적 홀로 사는 것과 완전하게 자발적으로 혼자 사는 것으로 구분이 된다.
 
원래 혼자 사는 것과 홀로 사는 것을 구분하는 중요한 잣대가 바로 자발적이냐 비 자발적이냐 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 사는 것은 완전한 자발적 상태는 아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자발적이긴 하지만 좀 더 나은 삶에 대한 거부하기 힘든 선택이다.
 
하지만 홀로 사는 삶이 온전히 자발적인 경우라면, 그것은 완전히 다르다. 쉽게 말하면, 어딘가 깊은 숲 속에 들어가서 홀로 사는 사람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사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어서 그렇게 사는 경우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완전한 자발적 홀로됨은 사실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다. 그것은 어딘가 암자를 짓고 수 십 년을 홀로 도를 닦으면서 사는 어떤 스님의 삶이 되거나, 신을 찾아 평생을 떠도는 어떤 사람의 삶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삶에 대한 언급은 평범한 우리들의 이해 수준을 한참 벗어난다. 그래서 지금은 홀로 사는 것은 그냥 비자발적 선택으로 간주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홀로 사는 삶의 다른 나머지 부분인, 비 자발적으로 홀로 사는 것은 인간으로써 꽤나 비참한 삶이다. 그것은 독거노인의 삶이며, 가족이나 친구 하나 없이 이 세상에서 홀로 존재하는, 사실은 정말로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가끔 그런 사람들의 쓸쓸한 죽음에 대한 기사를 접한다. 죽은 지 몇 달이나 지나서 발견되었다는 짧은 설명과 함께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증거로써 말이다.

 
누군가는 결국 인생은 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누구나 결국엔 홀로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오래 살수록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음을 맞이하고, 결국 자신의 처나 남편들 조차도 생을 마감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홀로 살게 되는 처지가 될까 봐 꽤나 두려워하게 된다. 사실 두려운 것은 맞다. 더해서 불편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많은 장소는 아직도 혼자가 아닌 다수를 대상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자 있게 되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반면에 혼자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에 비해서 장점도 많다.

 

그것은 어떤 식이든 간에 누군가와 충돌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인간이 둘 이상 모이면, 아무리 잘 맞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의견 충돌이 나게 된다. 서로 컨디션이 다르고, 선호도가 다르기 때문에, 보통 때는 서로 양보하고, 배려해주기에 넘어갈 수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혼자 있으면 이런 문제가 발생할 이유가 없다. 비록 가끔 심심하고 외로울 수는 있지만, 누군가와 끝없이 겪어야 하는 불편함은 배제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 사는 것과 가족이나 친구들과 어울려서 여럿이 사는 것은 각자의 호 불호이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혼자 사는 장점과 여럿이 함께 사는 장점을 모두 선택하려고 한다. 즉, 주거 형태는 혼자이지만, 늘 다른 사람들과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간에 상관없이 끝없이 교류를 한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교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즐거움은 주지만, 관계가 주는 진정한 의미, 즉 불행에 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같이 모여서 즐겁게 놀 땐 좋지만, 아프면 모임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냥 아는 사람들은 걱정을 해주거나 문병을 오기까지는 하지만, 실제로 간호를 해주거나 병원비를 내주지는 않는다. 더해서 병이 깊고 오랫동안 지속될 상황이 되면, 그 사람은 그냥 잊혀지고 만다. 아는 사람들은 장례식장엔 온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불행한 결말을 피하기 위해서 좀 더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보통 가족이거나 혹은 깊은 관계를 맺은 친구가 그 대상이 된다.

 

우리는 흔히 가족을 행복하기 위한 조건으로 보기에, 다른 행복 조건과 비교해서 결혼을 하거나 독신주의를 결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비교이다. 그것은 불행함에 대한 대비로써 비교를 해야 한다. 그래서 가정을 꾸리지 않고 살아갈 생각이라면, 다양한 불행에 대한 스스로의 대비책을 세워 놓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족과 같은 관계를 맺어놨다고 해도 모든 것이 다 준비 된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시기에 어쩔 수 없이 홀로 되어야만 하는 때가 있다. 평생을 함께 하던 남편이나 아내와 사별을 하거나, 다 큰 자식이 독립을 해서 나가거나, 정말로 친한 친구가 외국으로 이민을 갈 때 그렇다.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궤적을 그려야 하기에, 이것이 완전히 겹쳐지는 경우란 절대로 발생할 수 없다. 즉, 혹시나 운명이 존재한다면, 그 운명은 오직 각자의 것이란 뜻이다.

 

그래서 세상 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고유한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면, 그 그려진 궤적들이 만들어 낸 무작위한 형태의 선들이 모여서 만들어 낸 거대한 그림이 바로 삶이 된다. 이것은 예측될 수도 없고, 의도될 수도 없다. 그냥 매일같이 일어나는 각자의 행동들이 모여서 만들어 내는 그림이다.

 

그러니 결국 어떤 노력을 하거나,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살아가더라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지인과의 갈라짐이나, 누군가 먼저 떠나거나, 심하면 죽음이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준비되지 않는 홀로됨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머리 속에서 생각은 했을 것이다. 보통 어떤 일이 일어날 때는 전조라는 것이 있으니까 말이다.

 

자식이 결혼을 해서 독립을 할 때는 결혼식이란 절차가 있고, 가족의 죽음은 보통 병에 걸려서 투병 생활을 하는 시기가 있다. 친구가 외국으로 떠나더라도 보통 사전에 이야기는 한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난 상황은 천지차이가 된다. 심한 경우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후, 우리는 그 동안 해왔던 거의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일들을 같이 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 일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행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맛집을 찾아 다니거나, 등산을 하거나 하는 등의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것들을 스스로 좋아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혼자서도 할만큼은 좋아하지 못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좋아한다고 믿은 이유는, 누군가 같이 할 사람이 있어서 그 존재로 인해 여분의 행복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산이 좋아서 등산을 하는 사람은 같이 등산이 하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더 좋아했을 것이다. 먹을 것이나 기타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우리는 마음에 맞고,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그 행복이 몇 배로 높아진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신이 등산, 먹을 것, 여행 등을 정말로 좋아한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같이 할 수 있는 존재가 없어지고 난 후가 되면, 오직 그 자체만을 통해서 행복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만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다. 거기에 더해서 많은 과정이 귀찮고 불편해지기까지 한다. 둘이 밥을 먹을 때는 한 명이 식사 준비를 하고 한 명이 설거지를 하면 되지만, 혼자 밥을 먹을 땐 혼자서 다 해야 한다. 그것은 많이 귀찮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 밥을 잘 챙겨 먹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변화가 생기는 배경은 바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혼자 되거나, 홀로 살아야 할 때 가장 명료하게 나타나는 감정이 바로 두려움이다. 우리가 어린 아이 시절, 엄마의 모습이 잠시만 보이지 않아도 그렇게 울었던 이유인 그 두려움이다.
 
우리가 혼자가 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감정에 깔린 실체적 감정이 바로 두려움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잠시 잊혀진 상태이다. 하지만 우리가 홀로 되면, 그 잊혀진 두려움은 금새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평생 동안 두려움을 가지고 살며, 그나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때 그것을 잊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은 아주 쉽다. 왜냐하면 답이 이미 질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래 죽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평생 동안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을 돌봐 줄 사람들과 함께 있다면, 죽음은 좀 더 멀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안도를 하게 되고, 행복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비자발적으로 홀로 있는 상태가 되면, 두려움은 상시적으로 찾아 온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찾아 온다. 잠을 자기 전에도 찾아 온다. 그래서 결국 점점 두려움의 노예가 된다. 이것은 아무리 울어도 엄마가 오지 않는 아이처럼 그것과 같다. 이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장기적이고 파괴적인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에 대비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기에 미래를 예측할 수 있으니 그렇다.
 
우리가 만약 어떤 시점에 결국 혼자 살아야 할 상황에 놓일 수 밖에 없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일단 가장 일반적인 선택인, 결코 혼자 살아 가야 할 상황에 놓이지 않는 방법이다. 이것은 많은 가족을 구성하거나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맺는 방법이다.
 
그래서 자신이 맺은 그 많은 관계에서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죽음 때까지 남아 있을 수 있다면 평생 동안 홀로 됨을 경험하지 않고 죽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 힘들지 않다. 보통 자녀를 낳아서 키우기만 해도 성공할 수 있는 선택이다. 물론 자녀를 잘못 키울 경우라면 이야기는 틀려지지만 말이다.
 
문제는 이 선택을 할 경우엔, 평소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투자해야 한다. 관계는 결코 공짜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자될 때, 관계는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발전한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자신의 삶이 다른 이들로 인해서 많이 흔들리게 된다. 물론 이것조차도 행복으로 느낄 수 있기에,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거부하고 혼자 살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언젠가 홀로 되는 삶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관계를 거부하는 삶은 당장은 편하게 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언제나 미래의 홀로 된 삶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공통적으로 그런 사람들은 평소에도 노후에 문제가 없을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나 기타 여러 가지 형태의 문제가 없도록 많은 노력을 하게 된다. 또한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는다. 그것은 몰두할 수 있는 일이나, 취미나, 각종 개인적 선호도에 따른 다양한 행위들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한계는 명확하다. 그것들은 시간을 보내게 해줄 수는 있지만, 홀로 된 삶이 가진 본질적 두려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매일 자전거를 탈 수는 있지만, 암에 걸려서 병상에 누워있을 때는 TV만 볼 수 있다. 그리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면, TV조차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단지 젊은 시절에 혼자 사는 삶에 대한 만족도를 얻기 위해 홀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빨리 그 결심을 깨는 것이 좋다. 사실 그럴 수 있는 나이의 한계점은 40대가 거의 마지노선이 된다. 평생을 같이 같은 길을 걸어 갈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도 그 나이가 되면, 결국 한계를 느끼고 가족을 꾸리게 된다.
 
이때 잘못 판단해서 때를 놓치면 죽을 때까지 그럴 기회가 거의 없다. 물론 50대가 되어서 아예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도 괜찮다. 자신처럼 때를 놓친 사람들과의 만남을 만드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비록 비 자발적 홀로됨이지만, 그런 공통 분모를 통해 서로가 더 많은 것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사람의 50대 나이는 너무 고집이 세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나이에 새로운 사람을 사귀기 위해서는 성격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개인적 역량이다.
 
두 번째 해결 방법은, 사실 불가능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보통 사람의 이해 범주를 벗어나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홀로 되는 삶을 완전히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흔들림 없는 목표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 길은 추천하고 싶지도, 사실 실제로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인 상황이나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첫 번째 해결책을 실행하기가 불가능한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삶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은 불가능하지만 유일한 해결책이 된다.
 
어차피 홀로 살아야 한다면, 비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홀로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슷하게나마 어느 깊은 산중에 가서 그냥 혼자 사는 것도 일종의 비슷한 효과를 가져다 준다. 그게 힘들다면 그냥 도심을 떠나서 시골에 가서 작은 땅과 작은 집과 작은 텃밭을 가꾸고 사는 방법이 있다.
 
돈을 벌 수 있는 동안 최대한 돈을 벌은 후, 혼자 사는 것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50대쯤 그런 선택을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행복하게 살려고만 안하고, 불행하지 않게 살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충분히 선택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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