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질 수 없는, 갖고 싶지 않는

아이루다 2015. 9. 12. 07:37

 
살다가 보면, 부러움을 느끼거나 그것을 넘어서 질투가 느껴지는 상황까지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보통 그 대상은 주로 사람일 경우가 많으며 때로는 지역이나 특정 시대일수도 있다.
 
우리가 사람에 대한 부러움을 느끼는 것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연하겠고, 우리는 멋진 자연 풍광을 가진 나라나 혹은 잘 조합된 사회 시스템을 가진 선진국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또한 과거의 특정 시대에만 존재 했었다고 알려진, 오래 되었지만 가치 있었던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의 행운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원래 대부분의 부러움과 질투는 그것을 원하지만 갖기가 힘들 때 발생되는 감정이다. 그래서 결국엔 그것을 갖지 못하게 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어떤 특별한 사람들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그것을 얻어 내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냥 부러워하다가 만다. 혹은 질투가 느껴져서 기분이 나빠지거나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부러움과 질투는 그리 달가운 감정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면 부러움을 느끼거나 질투심이 생기는 경험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은 행복한 상태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행복이란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그것은 현재가 지극히 만족스러워서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니 이것은 당연히 부러움과 질투와는 반대되는 상태이다.
 
즉, 우리는 부러움이나 질투를 느끼는 상태를 행복하지 않는,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불행한 상태로 인식하기 쉽다. 그러니 누가 그 감정을 느끼고 싶어하겠는가?
 
문제는 그러다 보니 우리는 이미 찾아온 감정을 못 본 척 하거나 느끼지 않고 있다고 스스로 부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부정은 어떤 면에서 매우 불합리한 면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자기 부정이다.
 
이 자기 부정의 가장 큰 특징은, 이성적 판단과 감정적 판단의 괴리가 나타나고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럴 경우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이성은 원하지만 감정이 거부하거나 혹은 감정이 원하지만 이성이 거부하는 것이다.
 
일단 이런 자기 부정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지금 능력으로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가지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것인지를 구별하기가 힘들어진다는 뜻이다.
 
이 둘은 갖지 못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는 동일하지만, 그 원인이 너무 다르다. 가지고 싶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그 대상에 대해서 관심이나 욕구가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당사자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은 관심이 있고 욕구도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가지지 못한 상태가 불행함을 의미한다.
 
이것을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의 신포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여우는 포도를 딸 수 없으니, 포도가 달콤하지 않고 시다고 상상한다. 그래야 자신이 포도를 못 먹는 상태가 덜 불행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상태는 괜찮다. 문제는 무엇인가를 갖고 싶은데, 가질 수 없으니 그것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생겨나기 시작한다.
 
원래 무엇인가를 갖고 싶지 않다면 금새 잊혀진다. 물구나무를 서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보고 신기해 할 수는 있지만, 물구나무를 설 수 있는 능력을 그다지 갖고 싶지 않다면 그 사람을 봤다는 사실조차 금새 잊는다.
 
하지만 자신도 물구나무를 설 수 있는 능력을 갖고자 하지만 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무척 힘드니 물구나무 서는 것을 싫어하게 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세상 모든 것에는 단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문제점을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문제점을 찾을 수 있다. 남들이 다 좋은 일이라고 하는, 기부 행위 조차도 어떤 사람들의 자립심을 키우지 못하게 만든다는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 판단의 흐름을 보면, 원래 처음 물구나무를 서는 것을 보고 자신도 하고 싶다는 최초의 감정적 판단에서 시작해서, 결국 물구나무가 가진 어떤 단점, 예를 들면 피가 뇌로 몰려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의학적 관점 등과 같은 것을 지식적으로 접하면서 결국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최종 결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감정적으로 원하는 것을 이성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정말로 우리는 무엇인가를 원하지 않는 것일까?
 
부럽거나 질투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자신이 갖고 싶었으나 가질 수 없으며, 사실은 가질 수 없는 것인데 갖고 싶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거나 혹은 좀 더 극단적으로 가지면 안 된다고 느끼는 것들이 생겨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하게 가식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그 자신도 그것이 가식이란 것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의 경우, 어려서부터 성적인 영역은 꽤나 비밀스럽게 다뤄진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성적인 행위나 그것에 관련된 본능을 숨기려고 애쓴다. 그리고 성적인 것에 관심을 많이 갖는 사람들을 '밝힘 증 환자' 나 '헤픈 사람' 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 있는 그 수 많은 모텔들은 낮이고 밤이고 손님들이 가득하다.
 
그나마 모텔에 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어려서부터 성적인 것에 너무도 강한 압박을 받은 사람들이 '성'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나 관심을 갖는 것을 더럽고 동물적인 모습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무조건 성을 거부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모습에 강한 확신을 갖는다. 사실 우리나라의 많은 부부들 중에서 이 성적인 문제로 인해서 갈등이 벌어지는 부부가 꽤나 많다.
 
물론 섹스를 통해 성적인 즐거움을 아예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 중에서 그것이 정말로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오래된 성적 억압에 의해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감정적으로 원하지만 이성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오래 한 사람이나 좀 더 안 좋은 것은, 원하는 것을 부모 등에 의해서 강제로 억압 당한 사람은 모두 잠재적 욕구 불만 상태로 놓이게 된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자라서 소위 말하는 변태가 되기 쉬운데, 어린 시절의 욕구를 잘못된 방법으로 없앴기 때문이다. 원래 부럽거나 질투가 느끼지는 것은 그 감정 그 상태로 두는 것이 좋다. 그것이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불행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일종의 자극제도 되고, 자신의 장점을 좀 더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을 이성적으로 거부하거나 다른 제 삼자에 의해 강제 거부를 당한 경우에 발생한다.
 
이성적으로 거부한 사람들의 특징은, 당연히 이성적으로 판단한 가치 부여를 통해 모든 것을 판단하는 패턴을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이 단점만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원래 그냥 좋으면 좋을 수도 있어야 한다.
 
산에 올라서 풍광이 좋고, 바람이 좋고, 새소리가 좋다면 그냥 좋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좋다. 그 산이 얼마나 유명한지, 습도가 어느 정도라서 우리가 상쾌함을 느끼는 지, 어떤 새가 우는지를 꼭 알 필요가 없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면서 하는 일들에 대해서 자신만의 가치 판단을 들이대서 마음대로 판단하는 일을 한다.
 
누군가 자전거에 빠져 몇 백만 원을 쓰는 일이나, 오디오에 빠져 몇 천만 원을 쓰거나, 낚시에 빠져 주말마다 어디론가 떠나거나 할 때, 그것을 돈 낭비에 쓸데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한다.
 
물론 정말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이것을 구분하는 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단순하다. 책을 읽은 것을 좋아한다면,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오디오에 빠진 사람도, 낚시를 즐기는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 해야 한다.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고, 다른 사람의 행위를 자신만의 가치 기준에 맞춰서 판단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자신의 것을 제대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느낀 욕구의 감정을 지식을 통해 이성적 판단을 하여 부풀리거나 뒤틀어 놓은 상태이다.
 
욕구를 강제로 거부 당한 사람은 더욱 더 심각하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거부한 사람이 가진 스스로 받아들임 상태조차도 없는 경우이다. 그래서 좀 더 왜곡된다.
 
우리는 흔히 인간의 어린 시절, 즉 아이들은 사랑 받고 커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 말 뜻에는 아이의 욕구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어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강제로 욕구를 압박 당한 아이는, 커서 어떤 식으로든 그 불완전하게 처리된 욕구를 해결하고자 한다. 어린 시절엔 힘도 없고, 돈도 없어서 하지 못했던 일들이 - 장난감을 갖거나 떼를 쓰는 행위 등 - 커서 힘이 생기고 돈이 생기면 매우 폭력적 성향을 보이거나 혹은 돈을 통해서 매우 비 정상적인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남들 앞에서 보이는 모습과 개인적인 모습에서 크게 차이가 나는 이중적 모습을 갖기 쉬우며, 그로 인해서 괴리감이 발생하고 세상에 대한 끝없는 조롱과 분노를 느끼고 살아가게 된다.
 
사실 그래서 욕구는 참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하는 대상이다. 그리고 이 욕구를 통해 발생되는 좋지 않은 감정, 부러움이나 질투 역시도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되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어릴 때는 질투를 그냥 질투로 표현한다. 아이들은 대체로 그렇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부러움과 질투를 드러내는 일을 몹시 경계한다. 그것은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스스로 남들 앞에서 고백하는 행위이며, 그로 인해서 자신의 불행함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싫어한다.
 
행복은 과시하고 불행함은 숨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부러움과 질투에 대한 감정을 왜곡한다. 있는 것을 없다고 여기거나, 좋지 않다고 판단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정말로 자신이 그것을 갖고 싶지 않아서 아무런 욕구가 없다고 믿기까지도 한다. 하지만 입에서는 쉼 없이 그 대상을 비판하는 말이 튀어나고 있다. 사실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나마 부러움은 괜찮다. 이것이 질투로만 확대되지 않는다면 좋다. 우리는 살면서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각자 고유 영역에서 잘난 사람들이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 한 사람에게 모이지 않을 뿐이지, 각자 장점은 대단한 수준이다.
 
그것은 얼굴, 키, 두뇌 능력, 몸매, 운동 능력, 글 쓰는 능력, 각종 재주, 그림, 연기, 노래, 창의적 능력, 기발한 사고 방식 등등 엄청난 수가 존재한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이런 능력은 보통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부러움은 언제나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질투는 가능하면 안 느끼는 것이 좋다. 그리고 설령 질투를 느낀다고 해도 그것을 자기 부정을 통해 왜곡시키면 안 된다. 그 대상에 대한 판단이 왜곡이 되는 순간, 세상을 보는 시선이 왜곡된다. 그리고 그것이 오래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 왜곡되어 본 세상이 진리라고 믿는다.
 
이것이 보통 어른들이 경험하고 있는 세상이다. 그러니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이 어떻게 정상적으로 보이겠는가?
 
지금 이 순간 갖고 싶지 않다면, 정말로 그것을 갖고 싶지 않은지를 다시 한번 오랜 시간을 통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특히나 갖고 싶지 않은데, 그것에 대해서 무관심이 아닌 부정적 의견이 떠오르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 더 의심을 해야 한다.
 
갖고 싶지 않다면, 그냥 무관심해야 한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인 것처럼 그래야 한다. 갖고 싶지 않은데 부정적 의견이 떠오른다면 그것은 미워하고 있는 마음과 같다.
 
그리고 이런 오래된 왜곡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또한 세상을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범주에서 자기 위주로 해석하는 오래된 버릇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때, 이 세상이 가진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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