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사실 해결책은 아주 단순하다

아이루다 2015. 9. 6. 07:26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만약 그 아이가 공부를 잘 못할 경우 속이 많이 상하게 된다. 그런데 시험을 보고 상대적 순위를 매기는 현재 교육 시스템 하에서는 무조건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생겨나게 된다. 당연하게 공부를 잘하는 50%가 존재하려면 반드시 공부를 못하는 하위 50%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때 자신의 아이가 과연 어느 쪽에 속할 것이냐는 정말로 확률적 문제이다. 둘 중 하나인 것이다.
 
모든 부모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보통 공부를 못하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어떻게든 아이가 공부를 잘하길 바라는 심정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된다. 그것은 돈을 들여서 과외를 시키거나 학원을 보내거나 매일 집에서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할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수 많은 시도는 모두 헛수고가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보통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끝까지 공부를 못한다. 그것에 대해서 부모가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말이다. 물론 소수의 아이들은 운이 좋게 공부를 잘하는 아이로 변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아이의 반항심을 불러와 삐뚤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다면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공부를 잘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로 없는 것일까?
 
아니 있다. 분명히 있다. 그것은 아이가 공부에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하면 된다. 그리고 타고난 머리가 좋을 수록 유리하다. 이것은 공부를 잘하는 방법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머리가 좋고, 열심히 하면 성적은 무조건 오른다. 반대로 열심히 하지 않거나 머리가 나쁘면 어떤 다른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의 지적 능력은 거의 태어난 상태로 고정되어 있고, 학습을 하는 성격 또한 대부분 잘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결국 공부를 잘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다. 그러니 어떤 노력을 해도 아이의 성적은 올라가지 않는다. 단지 포기하지 못하는 부모들은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다.
 
요즘은 모태 솔로라는 말이 유행한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남자나 여자 친구를 사귀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물론 연애 경험이 있다고 해도 결혼까지 성공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과거와 달리 많이 줄었다. 아마도 대충 통계적으로 보면, 전체 인구의 약 70% 정도만 결혼에 성공하고 있고, 설령 결혼을 한 사람들이라도 30% 정도는 결혼 후 이혼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이 숫자는 어림잡아 대충 계산한 것이니 정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터무니 없는 통계는 아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해도 이혼을 하고, 결혼을 아예 하지도 못하고, 심하면 아예 이성과 단 한번의 교제도 하지 못하는 만년 솔로의 상태로 살아가게 될까?
 
이 역시도 어떤 해결책이 없을까?
 
당연히 있다. 다른 이들에게 호감을 주는 외모나 성격 그리고 이것이 다른 이들에 비해 부족하다면, 외모의 단점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다른 능력, 특히나 경제력 등을 갖추게 되면 가능하다. 돈만 충분하다면 사람을 만나는 것도, 결혼에 골인 하는 것도, 결혼 후 이혼을 하지 않고 사는 것도 모두 가능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라면, 자신의 수준에 맞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공부를 못하는 자녀를 둔 부모의 심정과 같다. 공부를 못하면 그 이유가 뻔히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꾸 다른 이유를 찾으려 한다. 남자가, 여자가 자신의 짝을 못 만나는 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럴 만큼 매력이 (외모, 성격, 재산, 직장 등을 모두 포함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그냥 인정하려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핑계거리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때, 비난 받을만한 상대방의 돌출된 행동들은 일반화가 되어 자신의 처지가 그렇게 된 것에 대한 방패막이가 되어 준다.
 
즉, 외모 지상주의나 돈에 환장한다는 이미지를 남성이나 여성의 이미지에 덧칠한 후, 상대를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과연 이런 이유로 인해서 결혼할 상대를 못 만나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런 비 상식적인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런 사람의 숫자가 적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 오직 그런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들의 숫자는 적다. 말 그대로 소수가 전체를 흐리는 경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오직 외모로만 판단하고, 사람을 오직 돈으로만 판단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진상들의 숫자와 비슷하다.
 
진상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비율상 적다. 그럼에도 진상들의 파괴력은 강력하다. 이들은 한 가게를 망하게도 하고, 잘 다니던 직원이 사표를 내게 만들기도 한다. 숫자는 적지만 한 명 한 명은 영향력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진상들의 행동을 보면서, 우리 인간 전체를 그 진상들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어떤 이유로 좌절을 겪은 사람들은 그런 시도를 끝없이 한다. 할 수 없는데, 포기도 못하니, 결국 그것을 비난해야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결코 공부를 잘할 수 없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포기 하지 못하니, 끝없이 아이를 비난한다. 다른 아이와 비교하고, 공부를 못한다면서 같은 자식끼리도 차별을 한다. 그 아이가 가진 다른 장점을 볼 생각도 안하고 끝없이 공부만을 강요한다.
 
연애를 하거나 결혼할 상대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돈이나 외모로 획일화 된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는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상처 입은 자존감을 달래기 위해서 하는 말과 행동이라면 이것은 문제가 있다.
 
사실 그런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이유는 바로 그래야 자신의 마음이 편해서 그렇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수준을 끌어 내리고, 성적, 돈, 외모와 같은 개인적 가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심함을 느낄 때, 그것을 하지 못하고, 갖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일종의 합리화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인터넷 상에서 나타나는 악플러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가, 다수에 대한 끝없는 공격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가치들에 대한 부정이다. 그들은 작은 단점이나 부작용을 크게 부각시켜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 어떤 선행을 한 사례가 알려지면, 그것에 대해서 그것을 통해 어떤 이득을 얻으려고 할 것이라는 추측성 댓글을 남긴다. 물론 그들의 말이 맞다. 그 누가 이득 없이 자기 손해만을 감수하려고 할 것인가? 그 이득이 돈이 아닐지라도 정신적인 만족을 얻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싸잡아서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그 안에 담긴 이기적 본능은 또 다른 영역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그 부정적 의견이 바로 자신의 처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미 충분히 가지고 많은 사람들과 잘 사는 사람들은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고, 반대로 가진 것도 없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으며 평소에 열등감에 가득 찬 사람들은 끝없이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물론 이때 부정적인 의견은 마냥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분명히 어떤 생각이나 사건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의견도 존중은 되야 하지만, 그것이 충고의 입장에서 한계가 지어져야 한다. 그것이 비난을 위한 비난으로 가게 되면, 아무리 좋은 의견도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리고 그런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포기를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그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다른 주변 환경에서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가 주변 환경에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은 전체 이유의 일부이고, 사실상은 그 자신이 문제가 거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니, 전체 이유의 일부에 불과한 주변 환경에 대한 문제점을 크게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런 우리들의 생각 패턴은 다음과 같은 평범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어떤 것에 대한 과도한 비난을 하지 않으려면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자칫하면 처음부터 포기하라는 말로 해석되기 쉽다. 그리고 노력이란 과정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사례도 있기에 함부로 단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조건이나 결혼을 해서 잘 살 수 있는 조건은 우리가 믿는 것보다 훨씬 더 고정되어 있다.
 
지능이나 외모와 같은 타고난 능력치는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하게 될 것이고 노력하는 성격도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거의 고정되어 있다.
 
물론 사람이니 그것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는 경험한다. 그래서 매일 아침에 늦잠을 자면서 새벽 운동을 계획한 사람은, 분명히 처음엔 그런 실수를 해서 돈을 날릴 수는 있다. 하지만 두 번째 그것을 반복한다면, 그때는 문제다.
 
아이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고, 그것이 얼마간 노력에 의해서 극복이 되질 않는다고 판단이 된다면, 사실 공부는 그 아이가 나갈 길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것이 좋다.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아이에게 지속적으로 공부를 강요하게 되면, 아이는 아이대로 스트레스를 받아 자신이 가진 또 다른 장점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대학 등록금부터 해서 취업에 결혼까지 가는 길이 이리 힘든 요즘 세상에서 남들처럼 사는 것 역시도 포기하는 것이 좋다. 이것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비 자발적으로 포기되는 것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 사실 요즘 삼포 세대라고 불리는 세대는 자발적 포기가 아니라 포기할 기회조차도 없기에 더욱 더 문제가 심각하다.
 
즉, 요즘 젊은이들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 중 하나인, 연애, 결혼, 출산을 자기도 모르게 포기한 것이다.
 
이것은 결코 좋지 않다. 포기 자체도 좋지 않지만, 그나마 포기를 할 때는 마음의 상처라 덜 하다. 하지만 포기되면 분노가 남게 된다. 그리고 그 분노는 결국 밖으로 향하게 되며, 모든 문제점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는 자기 방어기제가 발동되게 만든다.
 
원래 포기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해결책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없어질 수 없는 욕망을 줄여야 한다. 그것을 없앨 수는 없으니 줄여야 한다는 뜻이다.
 
공부 못하는 아이에게는 공부를 시키면 안 된다. 결혼을 하기 힘든 상황에 놓은 사람은 결혼을 포기하면 된다. 그런 것들은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남자로 태어난 것과 같다. 또는 여자로 태어난 것과 같다. 그렇게 태어났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래서 남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자기 비하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타고 나지 못한 것으로 인해 자기 비하를 하면 안 된다. 자기 비하는 반드시 자기 합리화를 불러온다. 그리고 자기 비하를 통해 발생한 열등감은 반드시 우월감을 불러온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신을 망가뜨린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행복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외의 모든 것은 모두 개인적인 영역이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나 멋진 배우자를 만나는 것도 행복의 길일 뿐이다. 행복으로 가는 모든 경로는 개인적인 영역이다. 좋은 직장, 많은 돈, 넓은 인간관계, 뛰어난 능력, 멋진 배우자, 사랑스러운 아이, 호화로운 집, 비싼 가방이나 차 모두 그렇다.
 
행복의 길은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잘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리 탐탁해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혹은 남들에 비해 적은 돈을 받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남들보다 못한 능력을 붙잡고 평생을 불행함에 빠져서 끝없는 자기 비하와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말이다.
 
어떤 복잡하고 어려운 일도 사실 생각하면 해결책은 단순하다. 우리의 머리가 복잡하고 한없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하기 힘들거나 혹은 아예 불가능한 일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전원주택을 짓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짓는 집이 뭔가 제대로 지어지지 못할까 봐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집을 짓는 것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은 사람을 속이려고 드는 전문 업자를 당해낼 수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포기하고 중요한 부분만 신경 쓰든지 아니면 집을 아예 짓지 않으면 된다. 왜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하면서 업자와 크게 싸워서 감정이 상하고, 결국 지어진 집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는 동안 끝없이 스트레스를 받는가? 그럴 것이라면 몇 년 동안 집 짓기 공부를 하든지 아니면 직접 집을 짓는 훈련을 받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노력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전체 중 몇 %나 될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듣게 되는 꾸준함과 노력을 겸비한 사람들의 멋진 삶은, 말 그대로 남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보통은 그런 삶을 못산다.
 
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고 사는 삶, 좀 더 나아가서 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인 삶은 그것에 미련을 가지고 평생 동안 곁눈질하면서 사는 삶보다 훨씬 낫다. 그런 곁눈질을 할 시간이 있다면,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하는 것을 찾아서 하려고 노력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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