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우리가 살아가는 숨겨진 이유

아이루다 2015. 9. 8. 10:29

 
유명한 미드 중에서 '워킹 데드' 라는 작품이 있다. 개인적으로도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게 보고 있는 작품 중 하나인데, 특히 이 드라마는 아주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등장 인물 전체가 모두 평범하다는 점이다. 이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지극히 위험한 상황에 놓인 상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좀비로 가득 찬 세상이며, 생존하기 위해서 인간이 인간을 공격하는 세상이다. 그리고 보통 이런 위기 상황을 배경으로 한 대부분의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는 그 위기를 극복할 영웅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는 그런 인물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그나마 주인공 역을 맡은 '릭' 은 전직 보안관 출신이긴 하지만, 결코 영웅은 아니다. 그는 그저 소중한 가족인, 아내인 '로이'와 아들 '칼'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아버지에 불과하다. 그나마 그가 잘하는 능력은 남들보다 총을 좀 더 잘 다룬다는 점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릭과 함께 생사를 넘나드는 동료들 역시도 평범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많은 인물들이 드라마의 전개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워킹 데드는 이미 설명했듯이 좀비물이다. 어떤 이유로 인해 좀비가 되는 병이 세상에 퍼졌는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대다수의 인류가 죽어서 좀비가 되었고, 소수의 사람들만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과 함께 하는 소수의 사람들 역시도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험한 세상에서 생존은 그리 만만치 않다. 거기에 더해서 이 드라마는 정말로 사실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편이기에 죽음은 흔하고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것은 마치 너무 자주 주연들의 죽음이 일어나서 원성이 자자한, 왕좌의 게임과 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들은 결코 경험하고 싶지 않는, 하나뿐인 동생이나, 아이, 남편이나 아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경험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들은 분노와 슬픔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그들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분노나 슬픔이 아닌 처절한 절망이다.
 
그들이 그 세상에서 눈 앞에 다가오는 좀비, 한때는 인간이었을 존재를 향해 망설임 없이 총구를 겨누고 당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목숨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다른 인간을 향해서도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지켜야 할 것은 단지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고 애쓴다. 그런데 만약 그 대상이 죽게 되면, 마치 자신의 죽음을 자신이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었다면 더욱 더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다.
 
물론 인간의 타고난 생존본능은 개인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든다. 우리가 사람을 해치면 안 된다는 도덕적 규칙을 어기고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을 칼로 찌르거나 총으로 쏠 수 있는 이유가, 결코 우리가 살인자의 본능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죽을 처지에 놓이게 되면, 자신을 위험에 몰아 넣는 상대를 죽이려고 하게 된다. 이것이 생존본능이 만들어주는 힘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좀 단순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그래서 좀비가 창궐해서 온 세상이 좀비로 가득 찬 세상이 되면, 오직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갈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절벽에서 매달려서 도저히 올라갈 수 없을 때, 언제 그 손을 놓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생존본능의 힘만이 아니다. 매달린 팔에서 느껴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생존본능은 그 고통을 느끼느니, 그냥 죽는 것이 낫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를 버티게 해주는, 우리 마음 속에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가치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희망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미래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어울려 보인다.
 
워킹 데드에서는 주인공 가족인 릭과 로리 사이에 아이가 하나 태어난다. 첫 아이인 칼은 그런 미친 세상이 되기 전에 태어났지만, 둘째는 좀비로 망가진 세상 속에서 태어난다. 사실 그런 와중에서 애를 낳는 것은 미친 짓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엄마인 로리는 아이를 낳기 전에 그것에 대해 무척 괴로워한다. 사실 희망도 없고 안전하지 못한 세상에서 아이를 낳아서 키운다는 것은, 사실 어떤 엄마이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는 상황이다. 그리고 아빠인 릭 역시도 그런 그녀와 그 자신을 위해 좀 안전한 장소에 당분간 머물길 바란다. 그리고 그들은 운 좋게 교도소 건물을 발견한다.
 
부부는 결국 교도소 안에서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그 전체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로리는 결국 죽음을 대가로 치워야 하는 제왕절개를 했어야 했고, 결국 죽는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다.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의 전개를 보면서, 이 처참한 와중에 아이를 낳는 것이 과연 괜찮은 선택일까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아이를 대하는 무리의 사람들과 그 아이가 가진 진짜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사실 어미의 배를 찢고 그 죽음으로 태어난 그 아이는, 단지 아이에 불과하지만, 주인공을 비롯해 함께 하고 있는 무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치이고 희망이며 그 무엇보다도 미래였던 것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하루 하루를 생존한다. 매일 힘들게 산다. 먹을 것도 부족하고 늘 불안함에 떨며 산다. 더해서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먼저 죽게 되면 그들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가 오직 죽기 싫어하는 마음뿐이다.
 
그런데 살아 있는 것이 결코 행복하지 않기에, 결국 죽음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등장 인물들 중에서도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 단 둘만 남은 여자 형제 중 동생을 잃은 안드레아는 비슷한 처지로 모든 것을 잃고 연구소를 폭파시켜 자폭을 하려고 하는 CDC 연구원과 함께 죽음을 원한다. 그녀는 한 할아버지에 의해서 강제로 구출을 당해서 살아난다.
 
그리고 살아난 그녀는 살려준 할아버지에게 매우 화를 낸다. 왜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냐고. 지켜야 할 것도 없고, 희망도 없는 이 세상을 왜 살아야 하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로 태어난 아이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지만, 그 질문에 대답을 해준다. 미래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은 우리 인류 전체로도 확대된다. 만약 우리 인간의 미래 세대가 없다면, 현 세대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을까?
 
물론 현재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유일한 목표는 생존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존을 했다고 해서 과연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지금 지구 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200년 후엔 단 한 명도 남아 있질 않을 것이다. 오늘 태어난 아이가 장수를 해서 120살을 산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오늘 이후로 아무도 태어나지 않고 지금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인류의 마지막이라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물론 생존 자체는 가치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이외에 우리가 가치 있다고 느끼는 그 많은 것들이 그때도 동일하게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우리가 문명 사회에 속해있을 때는 법과 질서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도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문명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 때도 그럴까?
 
미래에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날 수 없다면 우리는 과연 지금의 아이들을 더 소중하게 여길까? 아니면 그냥 힘없고 쓸데 없는 존재라고 여기게 될까?
 
매일 나무를 심는 사람은, 그 나무가 한달 후 죽지 않기에 심는다. 오늘 건물을 짓는 사람은 그 건물이 1년 후에 폭파되어 사라질 것을 상상하지 않는다. 오늘 연구를 하는 한 과학자는 자신이 반드시 그 연구를 끝내지 못해도 후배 과학자들이 그것을 해낼 것을 믿는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되면, 하지 않거나 대충 하려고 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가치는 사라진다. 하지 않은 것이나 대충 한 것에서 가치를 찾기란 힘들다.
 
우리가 자연을 보호하거나, 정치 시스템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거나, 노동자의 인권이나 부의 불평등을 개선하려고 목숨까지 바치는 이유도 역시 우리의 미래 세대가 있다는 믿음이다. 미래가 단절되었다면 오늘 참치가 멸종을 하든, 코끼리가 완전히 사라지든, 아마존 밀림이 모두 벌목되어서 사막으로 변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 누구도 1년 후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런 가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말의 거꾸로 누구도 내일 지구가 멸망할 때 사과나무를 심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미래가 없다면, 우리는 이제 오직 하나만 남는다. 모든 가치가 사라진 후, 남은 것은 생존 본능뿐이다. 그런데 과연 생존 본능 하나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나마 행복한 사람이라면 상관없다. 그냥 행복하니까 살 수 있다. 복잡한 생각할 필요가 없이 단지 행복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살 수 있다. 하지만 행복하지 못하거나 불행한 사람은 왜 살아야 할까? 살아봐야 힘들고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말이다.
 
물론 그래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으니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죽으면 될 것을 왜 이렇게 힘들게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을까?
 
단순한 관점에서 보면,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오직 자신을 위해 산다. 그리고 좀 더 더하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나 가치들을 위해서 산다.
 
그런데 만약 10일 후 지구에 소행성이 충돌해서 모두 죽어야 할 처지가 된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남은 10일을 살 수 있을까?
 
워킹 데드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총도 못 쏘고 소리만 낸다. 그 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아이를 위해 어려가지 물품을 준비하기 위해서 위험한 장소에 가야만 했다. 그래도 그들은 불만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인류 전체가 멸망해야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자발적이든 비 자발적이든 그것에 대해 불만을 늘어 놓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아마도 그때가 되면, 서로 으르렁대면서 싸우던 나라들이 손을 잡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공동의 노력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로 유전자의 징검다리이다. 그것이 누구의 유전자이건 간에, 우리는 인간의 유전자를 미래 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물론 그 역할을 못하거나 안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든 간에 우리는 전체의 일부이며, 현재를 미래로 이어주는 중간다리 역할을 맡고 있다. 이것은 좀처럼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원론적인 이유가 되어 준다.
 
이것은 우리가 불행에 빠지고,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사람이 죽음을 생각할 때, 그것을 막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그 사람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그렇다.
 
우리 인간은 더 이상 개인적일 수 없을 만큼 개인적으로 변했지만,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전체의 보존에 대한 보이지 않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보장될 때,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너무도 개인적으로 변한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전체에 속한 개인의 모습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다 못해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우리의 깊은 내면엔 모두 각자가 살아갈 숨겨진 이유 하나는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인류의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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