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고정된 선택

아이루다 2015. 8. 21. 07:33

 
우리는 살아가면서 꽤나 자주 그리고 다양하게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신이 가진 지식, 경험 등을 총 동원해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나은 것을 고르려고 애쓴다.
 
우리가 선택을 할 때, 최고의 선택을 하려고 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그것은 행복 하려고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덜 불행하기 위해서 하는 선택도 있다. 아무튼 우리는 모두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더 나은 것을 고르기 위해서 선택이란 것을 한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도 더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과일 가게에 가서 수박을 살 때도 조금이라도 잘 익은 것을 고르려고 애쓴다. 사실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작거나 큰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을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우리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 증거가 바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이란 뜻이다.
 
만약 우리가 모두 정해져 있고, 오직 정해진 대로만 살아야 한다면, 자유의지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는 동안 많은 선택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자신이 한 선택에 만족하기도 하고 후회를 하기도 한다. 이것은 평생 동안 반복되며,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자신만의 노하우가 쌓이게 된다. 그래서 나이를 먹고 연륜이 쌓일수록 우리는 좀 더 안정적이고 현명한 선택을 하는 존재로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좀 과신하는 경향도 생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정말로 우리가 선택을 하고 살고 있다는 자신감이다. 사실 후회를 하는 이유도 바로 같은 이유이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경험과 기억을 가진 채 돌아가야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 원래 그때 가졌던 상태 그대로라면 역시나 같은 선택을 할 것이 확실하다.
 
물론 우리는 커피 가게에 들어가 마실 음료수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에 그 많은 커피 가게 중, 어떤 가게에 들어갈 것인지를 먼저 선택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에 커피 가게를 갈지, 도넛 가게를 갈지, 햄버거 가게를 갈지를 먼저 선택 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에 어디선가 가서 쉴지, 집으로 갈지를 선택 할 수 있다.
 
그런데 선택의 과정을 거치지만, 사실상 선택이 아닌 것들도 있다.
 
우리가 아주 더운 여름에 땀에 쩔어서 길을 걷고 있을 때, 우리는 근처에 있는 가게 중에서 문을 열고 영업하는 가게와 문을 닫고 에어컨을 돌려서 시원한 가게 중에서 하나를 골라 들어갈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물론 여기에서 문을 열고 있어서 더워 보이는 가게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일 경우, 두 가게에 딱히 큰 차이가 없다면, 당연히 에이컨이 돌아가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시원한 가게를 들어가게 된다.
 
물론 둘 중 하나를 골랐으니, 선택을 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이것을 과연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강아지를 무척 사랑하면서 키우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 다가와서 그 강아지를 죽이는 대가로 10억을 내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사람은 10억을 거절하고 강아지 목숨을 살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거절하는 사람도 있고, 10억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들 각자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미 돈이 충분한 사람이라면 거절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돈이 부족하거나 혹은 지금 급하게 돈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과연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 그래서 강아지를 주고 10억을 받기로 했다면, 이것을 과연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혹시 거절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 강아지의 목숨을 내 놓으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그때도 거절할 수 있을까?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서 20년 간 일을 한 사람이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 회사에서 잘리거나 하지 않는 한 말이다. 복권에 당첨되어 100억이란 돈이 생긴다고 했을 때, 그것을 받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런데 과연 이것 역시도 선택 가능한 일일까?

 

물론 이런 예는 극한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상황이라면 충분히 둘 중 이나 혹은 다수의 것들 중에서 선택을 한다. 그런데 이런 흔한 선택의 경우도 역시 좀 더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통 선택이라고 믿는 것들 역시도 이미 우리가 선택 가능한 후보들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사실 늘 사지선다형 질문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주관적 선택이 아닌, 객관식 문제를 풀고 있는 것이다.
 
커피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 10개의 커피 가게가 늘어서 있는 거리를 지날 때, 이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10개의 커피 가게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가게를 고를 여지는 거의 없다. 그나마 조금 멀지만 이미 자주 가던 단골 커피 가게가 있을 경우에만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
 
그런데 단골 가게를 가는 일은 오히려 10개 중 하나를 고르는 것보다 훨씬 덜 선택적이다. 마치 그것은 정해진 것과 같다. 단골 가게가 있는 사람은, 그 가게 근처에만 가면 늘 거기만을 가게 된다.
 
아무튼 우리는 그것이 10개이든 100개이든 상관없이 주어진 상황에서만 선택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상황을 만드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몫이 아니다.
 
큰 마트에 가서 오렌지를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수천 개가 쌓여 있는 오렌지 중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싱싱하고 큰 오렌지를 열심히 고르지만, 아무리 그 숫자가 많아도, 우리가 고를 수 있는 한계는 바로 그 수천 개의 오렌지 중 일부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선택을 하지 못한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DNA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우리는 누구도 부모를 선택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정해진 정답 후보들 중 자신의 최선을 다해 고를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둘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은 선택이 맞다. 그런데 우리는 왜 셋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상황에는 놓일 수 없을까?
 
돈이 없어서 해외 유학을 가지 못하는 것은 선택인 것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사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두고 선택에 대한 개념을 생각하다 보면, 그 경계가 무척 애매하다. 왜냐하면 바로 같은 질문에 대해서도 다른 선택이 나오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똑같은 상황에 놓여도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해외 유학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의지로써 선택을 한 사람은 정말로 선택을 한 것일까?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사람을 선택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인, 의지와 그것을 감싸고 있는 성격 그 자체가 바로 이미 타고나거나, 자란 환경에 의해서 비선택적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즉, 이 사람은 성격으로 인해서 필연적으로 유학을 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포기를 다른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도 포기를 했지만, 그것도 일종의 선택이며, 그 포기를 하는 근원에는 바로 자신의 타고난 성격과 자란 때 만들어진 성격이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사실 작은 일들은 그나마 선택이 가능하다. 배고플 때 뭐를 먹을지는 가진 돈에 따라서 다른 후보를 가지고 선택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선택이란 것을 할 수 있다. 모래 사장에 가서 어느 모래를 가지고 놀지를 결정할 때는 더욱 더 선택의 폭이 넓다. 물론 해봐야 그 해변의 모래에 한정되지만 말이다.
 
그리고 큰 선택으로 가면 갈수록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고 믿긴 하지만, 사실상 그 선택들은 거의 고정되어 있는 편이다. 그것을 고정시킨 것은 바로 타고난 성격과 자란 후 덧붙여진 후천적 성격 그리고 자신이 놓인 환경 등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건물에 불이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는 선택을 하지만, 직업이 소방관이 사람은 설령 그 건물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스스로 불을 끄려고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휴가를 떠난 형사는 범죄가 일어난 현장을 보면, 남들처럼 그냥 넘기기가 힘들다.
 
이런 형태의 선택은 성격도 한 몫 하지만, 사실 어떤 환경에 놓여서 살고 있느냐가 더욱 크게 좌지우지 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놓인 것 그 자체도 일단의 선택이긴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런 것을 꿈이나 하고픈 일로 정의해서 그것을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오기도 했다. 누군가는 소방수를 누군가는 경찰을 꿈꿨던 것이다.
 
결국 우리 인간이 선택을 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큰 착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행복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돈이 무척 많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줬을 때, 이 사람이 돈을 받을지 말지를 과연 선택할 수 있을까? 암이 걸린 사람에게 그 암을 치료할 가능성이 있는 약이 있을 때, 그 약을 먹을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까?
 
물론 소수의 사람들은 돈을 거부하고, 단지 가능성만을 가진 약을 먹기를 거부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한 상황도 이미 그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남의 도움을 받느니 죽는 게 낫다고 여기는 여기는 사람들이나 혹은 가능성만을 믿고 약을 먹다가 병원에서 죽을 때까지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상황이 되면 늘 같은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
 
매일 종점에서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만의 자리가 생긴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보통 자신에게 여러 가지로 가장 나은 조건을 갖춘 자리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누가 먼저 그 자리에 앉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지게 된다. 그리고 불안도 하다.
 
사실 그 사람은 그 많은 빈자리 중 하나를 앉으면 되는 것이지만, 그리고 사람이 많은 버스라면 아무데나 빈자리가 나면 앉겠지만, 고정석이 생기게 되면 이상하게도 그렇게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그 사람은 그 버스나 지하철에 타서 자신이 앉을 자리를 선택하고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우리는 선호도가 있고 자신에게 적합한 것과 유리한 것 등을 계산하는 능력이 정해져 있다. 사실 머리가 좋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인데,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더욱 더 자신에게 더 유리한 계산을 잘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 대한 결론은 어떨까? 사실상 동일한 조건이라면 늘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물론 다른 경험이 쌓이고, 지난 번에 비슷한 경험을 하고 나면 다름 경험에서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는 있다. 그것은 수박을 한 번 잘못 고른 사람이 다음에 수박을 고를 때 좀 더 나은 수박을 고를 수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어떤 선택의 순간에는 그 사람이 가진 지식과 경험, 판단능력은 사실 고정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서 선택되는 결과 역시도 고정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방금 전 누군가 집에 찾아와 위협을 한 행위로 인해 무척 놀란 사람의 집의 밖에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사실 반가운 마음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먼저 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이것의 이유는 단순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판단 목적은 바로 행복이며, 행복은 이성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판단을 하는 역할을 하는 이성은 단지 감정이 원한 결과를 해낼 방법을 찾는 능력일 뿐이다.
 
우리가 바다를 보고 싶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감정이다. 그리고 이성은 바다를 볼 방법을 찾는다. 버스를 이용할 방법을 찾거나, 차를 몰고 갈 경로를 찾는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그냥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우리가 바다를 보고 싶다고 느끼는 것 자체는 시작부터 선택이 아니다.
 
선택은 이후에 이뤄진다. 버스를 타고나 차를 몰고 가거나 한다. 혹은 혼자 가거나 누구와 함께 가려고 한다. 이것들이 모두 선택이다. 하지만 운전에 자신이 없는 사람이나 차가 없는 사람에겐 이조차도 선택 하지 못한다.
 
우리가 느끼는 욕구는 모두 감정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결코 이성적으로 욕구를 느낄 수 없다. 남자는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와 섹스 하겠다고 느낄 수는 없다. 그냥 여자를 보면 느낀다. 반대로 여자도 마찬가지다.
 
행복을 느끼고 싶은 욕구가 자연발생적으로 필수적으로 시작되고, 그 행복을 얻고 싶은 시점에 우리가 가진 생각, 능력, 사고 방식, 주변 환경은 이미 고정되어 있다. 물론 우리는 시간을 통해 그것을 조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시간에 따라 행복의 욕구는 계속 바뀐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한, 최선을 다하게 된다.
 
그러니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행복의 욕구를 느끼고 똑같은 지식과 경험과 환경에 놓인 사람은 늘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선택했다고 믿는다.
 
물론 선택은 분명히 했다. 하지만 적어도 무작위 선택은 아니다. 이것은 이미 고정된 선택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물에 나오는 선택과 거기에서 노는 선택 중 하나를 할 수 없다. 우리는 보통 물에 들어갈 때는 노는 것을 선택했었기에 들어가지만, 물에 빠져서 숨이 막히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나오는 선택을 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다.
 
우리는 시작인 태어남과 끝인 죽음을 선택할 수 없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선택 불가능 하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무엇을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유전자 속에 담긴, 생명을 보전해야 한다는 거의 유일한 목표를 가지고 평생을 살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끝없는 이성적 선택을 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택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사실 좋아하는 음악조차도 선택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이미 정해져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살아온 삶을 후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늘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우리는 단지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보기 때문에 후회를 하는 실수를 한다. 만약 후회스러운 마음이 든다면, 그것을 깊은 반성으로 변화시키고, 현재와 미래엔 그런 후회 할 짓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좀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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