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내가 나인 이유

아이루다 2015. 7. 14. 07:32

 
한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한 여자가 있었다. 둘은 서로 너무도 사랑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둘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여자가 그랬다.
 
여자는 지금은 너무도 사랑하는 남자를 처음 보았을 때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남자의 작은 키와 그리 잘 생기지 못한 얼굴은 그녀의 이상형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그나마 그 남자의 유일한 장점은 다정함이었다. 사실 남자는 참 많이 다정하긴 했다.

반면에 남자는 여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져버렸다. 마치 그의 영혼이 어딘가에 끌려간 것처럼, 그는 영화처럼 단 한 순간에 사랑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슬프게도 여자는 그에게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남자는 좌절했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단 한번 만난 기회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꾸준함을 믿었다.
 
그 날 이후로 남자는 여자의 주변을 맴돌았다. 하지만 여자의 태도는 한결같이 명확했다. 맴도는 것 까지는 허용하지만, 그 이상의 접근은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남자는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의 진심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둘 사이엔 3년 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여자는 한 명의 다른 남자를 만났다가 1년 도 채 안되어 헤어졌고, 그 후로 몇 달을 실연의 슬픔에 빠져 보냈다. 남자는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듯 했고, 그녀가 헤어진 후 남몰래 기뻐했다. 하지만 그녀가 슬픔에 빠져 울고 있을 땐 그 자신의 마음도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래서 그녀를 위로 하고 싶어 했으나, 여자는 거부했다.
 
시간 앞에는 장사가 없다던가? 결국 남자는 변함이 없는 그녀의 모습으로 인해 천천히 지쳐갔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평생을 기다릴 자신이 있었건만, 3년이란 시간이 그를 많이 지치게 한 듯 했다. 하지만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었다.
 
그 사이 여자의 삶도 그리 평탄하지는 못했다. 한 남자를 만났다가 남자가 바람을 피워서 상처를 받고 헤어졌고, 그녀가 너무도 사랑하는 유일한 가족인 엄마가 암에 걸려서 투병 중이었다. 아빠는 이미 중학교 시절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시게 되면, 그녀는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 처지였다.
 
하루하루 상태가 나빠지는 엄마를 보고 있는 것도, 그로 인해서 매달 쌓여가기만 하는 병원비도, 그녀로서는 감당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들이었다. 언제나 청초하고 밝던 그녀의 얼굴은 초췌하고 그늘진 얼굴로 변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그녀의 엄마에게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그녀의 엄마는 홀로 남겨질 딸과, 그 동안 들어간 병원비를 걱정하면서 감기지 않는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엄마를 보낸 후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질 않았다.
 
텅 빈 빈소엔 가끔 그녀가 다니던 회사 사람들이 다녀갈 뿐이었다. 그런데 그 빈소엔 첫날부터 그 남자가 있어줬다. 원래라면 나가라고 쫓았어야 했지만, 그녀는 이상하게도 그렇게 하기가 싫었다. 설령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라고 해도, 그 사람 마저 떠나면, 그녀에게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듯 한 두려움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실 그 남자가 떠난다고 할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빈소를 지켜줬다.
 
엄마의 장례식 이후 여자의 마음에 어떤 변화의 시작이 된 듯 했다. 여자는 그 후로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결국 남자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후 2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 둘은 결혼을 했다.
 
여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선택한 남자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란 것을 더욱 더 크게 느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가 점점 더 소중해졌다. 부모님도 없고, 딱히 친하게 지내는 친척도 없는 그녀로써, 남자가 그녀의 전부가 되어갔다. 그리고 남자는 충분히 그 역할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가을, 둘은 어딘가로 여행을 떠났다. 둘이 처음 만난 지 6년 째 되던 해였다. 결혼 한지 일주년 기념 여행이기도 했다.
 
하지만 삶은 참 슬픈 면을 가지고 있다. 행복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그들에게 불운이 찾아왔다. 차를 몰고 가는 도중에, 중앙선을 침범한 다른 차를 피하려다가 차가 근처 전봇대와 강하게 충돌을 한 것이다. 불행 중 다행하게도 둘 모두 생명에는 큰 지장은 없었다. 하지만 어떤 문제가 하나 생겨버렸다.
 
그것은 바로, 여자의 기억 중 일부가 사라진 것이다. 그것도 최근 5년 정도의 기억이 말이다.
 
며칠간 혼수상태에 있던 여자가 깨어난 후, 그녀는 자신의 나이를 실제 나이보다 5살 낮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남자를 못 본 척 했다. 그것은 마치 과거에 그녀가 그 남자에게 했던 태도와 완전히 같았다. 그녀는 또다시 남자가 자신의 주변을 맴 도는 것은 허용했지만, 다가오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그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도 부정했다.
 
둘은 얼마 후 퇴원을 했으나, 여자는 두 사람이 결혼을 했으며, 한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전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서, 집을 나갔다.
 
남자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한없는 슬픔을 느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 번 해봤다면, 두 번 못할 것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두 번째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처음 기회는 그녀가 가장 힘든 상황에 놓였을 때 자연스럽게 얻어졌으나, 이젠 그런 기회는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여자는 남자에게 이혼을 통보했고, 결국 둘은 이혼을 하고 말았다. 너무도 여자를 사랑한 남자는, 여자의 강경한 태도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헤어지고 말았다.
 
그 후 시간이 흘러 또 다시 2년이란 시간이 지났으나, 둘의 관계는 결코 아무것도 진행된 것이 없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여자는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했고, 둘의 관계는 매우 긍정적으로 진행되었다. 남자는 그런 그녀를 말리기 위해 설득도 하고, 현실적 문제를 설명해주기도 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나면, 남자를 스토커로 신고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남자는 물러 설 수 밖에 없었고, 그 둘은 결혼했다. 그녀의 결혼식을 바라보는 남자의 마음은 찢어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언젠가 그녀의 기억이 되돌아 온다면, 과연 어떤 일이 생길지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여자의 기억은 되돌아 오지 않았다.
 
그나마 여자가 자신의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전혀 기억도 나질 않는 엄마의 죽음과 병원비로 인해 아직도 다 갚지 못하고 남은 빚을 재촉하는 은행의 고지서들뿐이었다.
 
* * *
 
이 이야기는 한 20년 전에 미국의 뉴 멕시코주에서 일어난 한 쌍이 부부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비슷하지만 다른 결말로 각색한 이야기이다. 현실의 실제 부부도 사고가 났고 아내가 둘 사이의 기억인 2년의 시간을 잊어버려서, 남자를 멀리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기다림으로써 둘은 다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헤피 엔딩이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영화의 제목이 '서약' 이고,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에게 사랑이란 감정이 가진 위대함을 보여줌으로써 큰 감동을 줬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운명적 사랑이란 말을 떠올리게 된다. 마치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끈이 두 사람을 묶고 있는 것처럼, 둘의 관계가 절대로 이뤄질 수 밖에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이 났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그런 이야기들은 그것을 각색한 또다른 이야기처럼 둘의 불행한 결말로 끝이 날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추가적으로 드는 생각은, 과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나' 라고 느끼는 이유가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한 생각이다. 다른 말로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과연 나의 정체성은 무엇을 근거로 만들어지는 지에 대한 궁금함이다. 그리고 이 글의 나머지 부분은 그것으로 채워질 것이다.
 
일단 위의 이야기를 통해서 5년의 기억이 사라진 여자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여자는 단지 5년의 기억을 잃었지만,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림으로써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녀의 과거는 변함이 없지만, 그녀의 미래는 완전히 다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혀 다른 아이를 키우게 될 것이며, 그 아이를 너무도 소중하게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기억 속에 그녀는 다르다. 5년의 기억이 온전히 남아 있는 남자의 머리 속에서 그녀는 전혀 다른 여자이다. 물론 처음 만난 3년의 시간은 무척 쌀쌀했지만, 마음을 연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따뜻한 여자였다. 그리고 남자에게도 무척 헌신적인 존재였다.
 
두 사람의 기억 속에서 여자에 대한 기억은 서로 다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녀는 어떤 여자라고 정의해야 옳을까? 여자의 기억처럼 남자에게 쌀쌀한 여자일까? 아니면 남자의 기억처럼 남자에게 따뜻한 여자일까?
 
객관적으로 보면, 남자의 판단이 옳을 것이다. 아무래도 여자가 그런 식으로 자신에 대한 정의를 내린 이유는 바로, 자신의 소중한 기억을 잃어버려서 그랬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여자의 머리 속은 확고하다. 그녀는 자신이 기억을 잃었든지 말든지, 결국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충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자신의 남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남자에 대한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도 없었고, 숨길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 누군가가 되는 이유는 아주 쉽게 풀어진다. 그것은 바로 각자의 머리 속에 있는 기억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정의된다. 똑같은 몸을 가졌지만, 다른 기억을 가진 존재는 서로 다른 사람이 된다. 이것은 수 많은 일란성 쌍둥이들의 삶을 통해서 쉽게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이런 확대도 가능하다.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다 마치고 죽음으로 갈 때, 그 사후 세계에 대한 다양한 가설들에서 과연 우리의 존재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일단 가장 흔한, 천국에 가는 영혼을 상상해보자. 지옥에 가도 마찬가지다. 결국 영혼은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 영혼이 기억을 잃게 되면, 그때부터는 살아 생전의 육체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일단 영혼이 기억을 잃지 않는 존재라고 가정하고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일단 어린 시절에 죽은 아이의 삶을 떠올려보자. 기억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는 짧은 삶은 과연 어떤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까?
 
사실 우리는 영혼을 순수하고 선한 존재, 즉 인간이 가진 각가지 나쁜 것들이 모두 사라진 존재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래서 어린 아이의 죽음도 역시 비슷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아니, 좀 더 순수할 수 있기에, 아이의 영혼은 좀 더 나은 것을 판단하기 쉽다.
 
하지만 아이의 기억은 너무 적다. 그래서 아이는 더 이상 그 자신이라고 말하기도 힘들 수 있다. 왜냐하면 보통 어린 시절에 기억은 많이 사라지고, 새로운 환경에서 생겨난 기억만이 쌓이기 때문이다.
 
설령 어른들이라도 해도 비슷하다. 우리는 오래된 기억은 지속적으로 잊는다. 그런데 천국이나 지옥에 간 영혼들은 영원히 산다. 그렇다면, 살아 생전에 기껏해야 100년 살았던 기억이 백만 년 후엔, 1조년 후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인간의 삶을 살았던 100년의 시간을 다 잊고 나면, 과연 우리는 지금 우리가 자신이라고 믿는 그런 사람이 될까?


또한 영혼의 순수함과 선함 역시도 몹시 애매해진다. 우리 인간은 인간 세상에 살 땐는 어쩔 수 없이 이기적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기억이 유지된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가 원하는 순수하고 선한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순수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바로 정체성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결국 기억의 일부를 지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억이 지워진 존재는 지금의 나와 동일한 존재일까?
 
두 번째로 또다른 가설인, 환생을 상상해보자. 만약 우리가 죽은 후, 환생을 해서 살아간다면, 과연 우리는 전생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사실 환생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는 보통 전생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전생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즉, 우리가 아무리 반복적으로 살아난다고 해도, 우리는 늘 현생의 삶만이 자신의 정체성이 된다.
 
그러니 환생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영생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매번 현생의 기억을 전생의 기억에 덮어 쓰는 것이다.
 
이것을 짧은 인간의 삶에서도 적용시킬 수 있다. 우리는 잘 변하지 않지만, 확실히 조금씩 변한다. 그렇다면 10살 먹은 시절에 우리 자신과 70살이 되었을 때 그 두 시절의 동일한 사람은 과연 얼마나 겹쳐질까? 정말로 각 시간대에 있는 존재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둘의 기억은 엄청난 차이가 날 것이고, 육체적으로도 완전히 다를 것이다. 아는 사람과 만나는 사람도 다를 것이며, 그나마 같은 기억은 부모에 대한 기억이나 형제들과의 관계 정도 일 것이다. 물론 형제들과의 관계도 무척 많이 바뀌었을 것이 확실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현재의 자신, 즉 지금까지 머리 속에 기억된 것들을 기준으로 정의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꽤나 확신 있어 하는 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왜 우리 자신으로 정의되는 지에 대해서 그다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이것을 자기 확신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사실 누가 자신에 대해서 그리 의심을 하게 되겠는가?
 
하지만 상상 속에서나 일어나긴 하겠지만, 어떤 미지의 존재들이 밤마다 찾아와서 우리 머리 속의 기억을 매일 바꿔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매번 조작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라면 어떨까?
 
이 생각과 관련된, 예전에 봤던 영화 한 편이 기억난다. '더 문' 이란 제목을 가진 영화였는데, 이 영화 속에서는 달에서 혼자 일하는 근무자의 이야기가 다뤄진다.
 
이 근무자는 3년간의 임무를 마치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지구로 돌아오기로 되어 있는데, 사실 이 기억은 온전히 조작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단지 3년간만 생존 가능한 일종의 생체 로봇이었으며, 3년이 시간이 지나면 폐기되고, 조작된 기억을 가지고 똑같이 생긴 새로운 샘이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어 있다.
 
아무튼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 샘은 어떤 이유로 인해 폐기되지 않고 있다가, 자신을 대신하는 새로운 샘이 나타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기억이 조작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란 점을 알게 된다.
 
만약 이 영화처럼 우리들 역시도 이런 조작된 기억에 의해서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느낌이 들까?
 
사실 이런 종류의 비슷한 설정은 그 동안 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다뤄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스쳐가듯 한번쯤은 생각해 봤을 수 있다.
 
그리고 설령 오랜 시간을 생각한다고 해도, 결코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우리가 우리인 이유는 오직 기억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 자신에 대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런 기억들은 혼란과 답답함의 근거가 될 뿐이다. 여자가 남자의 기억에 대해 느낀 감정처럼 말이다.
 
죽음이 완전히 끝이거나, 영혼이 있거나, 환생을 하더라도 우리가 영원히 현재의 우리일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나마 영혼이 되어 천국에 간 후, 모든 기억이 고정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이 우리를 정의하는데, 기억이 고정되어서 변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는 천국이나 지옥에서 살아가면서도 전혀 기억이 쌓이지 않는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답도 없는 질문이지만, 그냥 한번쯤은 생각해 볼만한 주제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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