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이야기들

편히 쉬세요

아이루다 2015. 8. 15. 03:59

 

지난 8 11일 날, 매형이 떠났다. 잠시간 안정된 듯 하더니, 11일 새벽부터 상태가 좀 많이 나빠졌다. 그리고 오후에 만 49세의 나이로 떠났다.

 

매형의 마지막은 며칠 전 의사의 설명으로 어느 정도는 예상이 되고 있었다. 사실 그들의 말보다 좀 더 오래 견뎌내기도 했다. 매형은 떠나기 이틀 전 정도부터는 거의 무의식 상태였고, 내가 본 마지막 반응은, 딸인 다은이가 아프냐고 물었을 때, 고개를 흔들던 모습이었다.

 

화요일 오후에 심박수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누나의 말을 듣고는 모든 일을 멈춘 채,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행이라면 다행스럽게, 매형의 임종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눈물이 흘렀지만, 너무도 슬퍼하고 그 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누나와 다은이의 오열하는 모습 속에서, 나는 아직 그렇게 감정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다행스럽게 빠르게 병원에 온 막내 누나가 누나와 다은이와 함께 울어주고, 기도를 해줬다.

 

누군가의 임종을 지키고, 그 마지막을 함께 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나에게 장례식은 의례히 가서 부의금을 내고, 밥을 먹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보고 오는 자리였다.

 

처음 경험한 장례식은 시작부터 끝까지 절차였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역할을 해야 했다.

 

매형이 떠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장례식장을 잡는 일이었다. 누나는 살고 있는 집과 가깝고, 시설이 좋은 삼성 병원 장례식장을 원했는데, 다행히 자리가 있다고 한다.

 

두 번째 일은 화장터 예약을 하는 일이었다. 이 역시 다행히 13 12시로 예약이 가능했다.

 

매형이 지난 두 달 가까이 머문 순천향 병원에서는, 병원 나름대로 분주했다. 매형이 떠난 후, 그들이 처음 한 일은 바로 매형의 몸에 달린 수 많은 줄들을 제거해주는 것이었다.

 

매형의 몸엔, 포도당 수액, 강한 마약성 진통제, 가끔 들어가는 전해질 액, 몸의 상태를 체크하는 모니터 선들, 오줌 량을 체크하기 위한 선, 망가진 대장을 대신하는 장루, 수술한 부위에서 나오는 복수를 담기 위한 흡입선 등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의사들은 매형의 몸을 깔끔하게 꿰매주었다. 복막염 수술 후, 결국 붙지 않아서 매형의 직접적인 사인이 되고만, 그 배 수술 부위를 정리했다. 그리고 환자 복이라도 정갈하게 입혀서 정리를 마무리 했다.

 

병원은 사후 처리를 위해 분주했고, 우리들은 슬퍼하면서, 해야 할 일들을 했다. 그리고 삼성 병원에서 운구용 차량이 도착해서 매형을 실었다.

 

중간에 사망 진단서 내용에 문제가 좀 생겨서, 상황이 좀 꼬였지만, 다행이 누나가 잘 참아줘서 넘어갔다. 나와 누나는 매형을 뒤에 태우고좁은 엠블런스 좌석에 꾸겨지듯 앉아서 막히는 서울의 퇴근 시간을 뚫고 삼성 병원으로 향했다.

 

오는 도중, 매형과 누나의 친목 모임으로 보이는, 삼겹줄 사람들이 먼저 병원에 도착해서 장례식장을 5호실로 잡아줬다. 지금 생각하면,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너무 작은 장소였지만, 매형은 작고 간소한 장례식을 원했으니, 그 뜻은 따른 셈이 되었다.

 

일단 장례식장에 도착하고 나니, 조문객들로 인해서, 정신이 없었다.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다녀갔다. 아마도 가장 친했던 분들은 그때 다 온 듯 하다.

 

소식을 듣고, 재빨리 차를 몰고 온, 막내 매형 덕분에 나는 잠시 집에 가서 양복으로 갈아 입을 시간이 있었다. 그리도 다시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0시가 넘어 있었다.

 

그리고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요즘은 12시가 넘으면 문상객들이 안 온다고 한다. 나는 내일 남은 하루를 위해 체력을 비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12일날은 하루 종일 사람이 많았다. 6시쯤 나와서 간밤에 들어온 부의금 입금 처리를 하고, 나는 거의 하루 종일 조문객들이 들고 온 돈을 정리했다. 생각해보면, 사실 장례식 절차에서 이 일이 제일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루를 정신 없이 후다닥 지나갔다. 그사이 부모님과 큰누나도 오셨고, 떠난 매형과 누나를 서로 소개시켜줬던, 막내 작은 아버지 부부도 역시 함께 하셨다.

 

이날은 10시가 좀 넘어서, 너무 지쳐서 집으로 돌아갔다. 역시나 다음날 발인 일정을 위해서 몸을 추슬러야 했다.

 

13일은 부의금 입금, 장례식 비용 정산, 발인 준비 등으로 오전이 바빴다. 누나와 다은이와 아침을 먹고, 늦게 온 조문객도 응대를 했다.

 

10시에 발인 예배가 진행되었고, 10시 반쯤 발인이 시작되었다. 매형 스스로가 준비해 둔, 영정 사진을 들고 앞에 선 다은이와, 매형이 누어있을 관이 여섯 명의 사람들에 의해서 들려 나왔다.

 

아마도 내가 이 장례식 중에서 가장 많이 운 시간이 이때였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맡은 일을 다 해내고, 이젠 나도 조문객들 중 하나처럼 버스를 타고 화장장과 장지를 갔다 오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나의 긴장감을 낮춘 듯 했다. 일단 터진 눈물은 버스를 타고 달리는 중까지 계속 되었다.

 

화장장은 가까웠다. 그리고 한 시간 10분 정도 소요되었다. 고인의 몸이 태워져 뼈만 남는 사이, 살아있는 자들은 점심을 먹었다. 아니, 먹어야 했다누나와 다은이는 아침도 점심도 잘 먹어서 너무 다행이었다.

 

장지는 곤지암에 있는 어떤 장소였다. 차가 좀 막히면서 전체적으로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오후 5시쯤 서울에 도착한 듯 하다.

 

마지막으로 누나와 다은이 그리고 막내누나 부부와 함께 식사를 했다. 가는 도중, 내 차에 탄 누나가 차가 더럽다고 뭐라고 했다. 그런데 누나가 그런 말할 처지는 아니다. 본인들 차, 이젠 매형이 딸인 다은이에게 증여해서 공식적으로는 다은이 차가 된, 15년 된 소나타 역시 결코 깨끗하지 않음을 내가 알고 있는데 말이다.

 

그 오래된 차처럼 매형은 살아 생전에 그리도 자신에게 쓰는 돈을 아꼈다. 그래서 본인이 쓰는 것들은 수년에서 수십 년이 넘은 것을 많았다. 옷이며, 가구며, 차도 그랬다.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일에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매형이 매년 복날 때마다 우리 부모님에게 삼계탕 재료를 보내고 있음을 작년에 처음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 중에서 더 젊은 시기에 죽은, 친구의 아내와 딸을 잊지 않고 매년 생일과 크리스마스를 챙겨주고 있음을 얼마 전 알게 되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에게는 대책 없이 짠돌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끝없이 베푸는 사람.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자신이 믿는 종교가 말한 삶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가장 기독교인 다운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매형은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저녁 식사 시간은 지쳤으나 따뜻했다. 지난 삼 일간의 장례식을 함께 한, 다섯 명이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은 채,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는 마지막으로 누나와 다은이를 집까지 태워다 주고는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매형은 비록 50년 정도의 삶을 살았지만, 누군가의 100년 이상의 삶을 압축시켜 놓은 듯, 그렇게 살아가 갔다. 본인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 때, 남은 누나와 딸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게끔 그렇게 모든 준비를 해두고 떠났다.

 

가는 순간까지 장례식 절차와, 이후 추도모임까지 모두 결정지어 두고 갔다.

 

그런 사람이 떠났다. 그리고 먼저 가서 누나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다은이가 늦게 오길 기다릴 것이다.

 

누구보다도 누나를 사랑했고, 딸인 다은이를 사랑했던 한 남자가 그렇게 떠나갔다.

 

 

매형은 발이 참 예뻤다. 사실 왠만한 여자들보다 더 예뻤다. 발이 부어서 통통하니, 더 예뻤다. 그래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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