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간 분류

아이루다 2015. 7. 3. 08:23

 
세상엔 참 많은 사람들이 살아왔었고, 현재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인간의 후손들이 또한 이 땅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그만큼이나 다양한 형태의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사실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형태의 삶을 살긴 한다. 그래서 이것을 큰 단위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사람의 삶의 종류를 구분할 수 있는 요소는 참 많을 것이 있을 수 있다. 성격, 지능, 돈, 신체 능력, 가치관, 종교, 인종, 지역 등등이 모두 그것의 후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삶을 구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각자가 가진 자아, 즉 에고 혹은 자의식이라고 불리는 존재의 상태이다.
 
그래서 오늘은 이 자아의 상태를 기준으로 해서 인간을 분류해보도록 하겠다. 그 시작은 자아의 존재가 매우 약해진,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없어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유형부터 시작하겠다. 그리고 뒤쪽 분류로 갈수록 자아가 강해지는 형태로 진행 될 것이다.
 
이 순서상으로 볼 때, 가장 첫 번째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자아의 존재가 거의 찌그러진 사람들이다. 물론 이들은 의지적으로 자아를 찌그러뜨린 것은 아니다. 어떤 큰 고난이나 실패 등을 통해서 겪은 고통이 남달랐거나 혹은 생각만 해도 견디기 힘든 고통들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주로 노숙자나 세상을 생존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포함된다. 즉, 이들에게 자아의 존재는 거의 사라지고, 당장 하루를 살아가는 생존 본능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에 대해서 좀 더 심하게 포함한다면, 이들은 우리가 흔히 인간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거의 없고, 대부분을 동물의 영역, 즉 생존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누구도 이런 삶을 원하지 않는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그런 삶을 원한 것이 아니라, 살다가 보니 자신도 어쩔 수 없게 그런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걔 중의 소수는 어떤 계기로 인해서 자신이 속한 영역을 탈출 하기도 한다.
 
두 번째는 흔히 잉여나 외톨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로 젊은 층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이미 충분히 나이를 먹고 스스로 독립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을 계기로 크게 상처받은 자아가 그것 자체를 매우 두려워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한 이 분류에 속하려면 한가지 조건이 추가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경제적 지원이다. 즉, 적어도 누군가는 이들에게 밥을 먹여줘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 부모들이 그렇게 한다.
 
이 분류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는 사람은 바로 첫 번째 분류로 떨어지고 만다. 즉, 집도 없고 매일 밥 끼니를 걱정해야 할 처지라면, 바로 노숙자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젊고 먹고 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며 또한 일을 하지 않기에 많은 시간이 남아서 주로 대부분의 시간을 인터넷 속에서 보내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게임이나 각종 커뮤니티에 참가함으로써 자신의 상처입고 찌그러진 자아를 어떻게든 보존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자칫 잘못하면 삐뚫어진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인터넷 상에는 다른 이의 자아를 무시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만족을 얻는 악풀러나 혹은 심하게 자신을 과대하게 포장하는 사람들이 가끔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진짜 모습은, 현실 속에서 상처받고 적응하지 못해서 한없이 약해진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특별한 상처나 성격적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타고난 외모, 성격, 육체적 능력, 지적 능력 등이 전체적으로 부족해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 분류에 속한 사람들은 앞에서 나온 두 개의 분류의 사람들보다는 적어도 경제적 문제만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이들 역시도 살아오면서 끝없이 받은 상처로 인해서 자아가 많이 축소되어 있는 상황이다.
 
아무튼 이들은 축소된 자아로 인해서 매우 소극적이고 의기소침하며 꽤나 부정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들 역시도 끝없이 부족한 자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가진 돈도 부족하고 어떤 것을 추진할 자신감도 부족하기 때문에 주로 쉽고 간단히 자아를 충족시킬 것들을 하고 산다.
 
그것은 TV 드라마 보기, 게임 하기, 맛난 먹거리 먹기, 친구들 만나서 수다 떨기,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 등이다. 이들에게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행복을 얻을 수록 그것이 중요한 가치가 된다. 그리고 이들 계층부터 보통 인간의 영역에 들어 선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네 번째는 가장 흔히 보이는 유형이다. 적당한 능력과 외모를 가지고 세상을 적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너무도 많아서 흔하게 경험한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다. 이들은 주로 경제적으로 풍족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만큼 먹고 살만큼은 되며,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산다. 비싼 외식도 하고, 비싼 명품 가방도 살 수 있으며, 해외 여행도 한 번 이상은 경험한다. 즉, 우리가 요즘 흔히 말하는 행복 공식을 대부분 해 낸 사람들이다.
 
이들의 자의식 수준 역시도 평균적 수준이라서, 서로 매우 비슷한 만족도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부러움 혹은 질투심이라 불리는 감정이다. 원래 질투는 한쪽이 너무도 확실히 열등하거나 우월할 경우엔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노숙자를 보거나 대기업 회장님을 보고 질투하지는 않는다.
 
질투는 원래 비슷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난다. 그러다 보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계층이라서 끝없이 질투심에 노출이 된다. 그리고 이 질투심은 바로 장사꾼들의 먹잇감이 된다. 즉, 장사꾼들은 개인의 질투심을 자극해서 그들이 그다지 불필요한 물건을 사게 하거나, 꼭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행동을 하면서 돈을 지불하게 만든다.
 
이미 말했듯 이 분류에 속한 사람들은 그 숫자가 매우 많아서 사실 우리가 보통 대중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주로 모든 기업의 마케팅 타겟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끝없이 자극이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자극은 그들이 힘들게 번 돈을 쓰게 만드는 목적이 된다. 행복이란 이름으로 허울이 둘러써져서 말이다.
 
다섯 번째 분류에 속한 사람들은 남들에 비해 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인데, 이들 중에서 자아를 제대로 만족시킨 사람들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축에 속한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원래 다 강한 자의식을 가진 채 태어난다. 왜냐하면 자의식 자체가 생존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생존 욕구를 강하게 느낄수록 자의식이 강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동물들과는 좀 다른 형태의 생존 욕구를 가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장 하루를 먹고 사는 것만을 생각하고 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획적으로 살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있다. 그리고 이런 능력이 당장 토끼를 잘 잡거나 노루를 활로 쏴 잡는 능력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물론 문명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생존 본능을 좀 더 지적 영역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아가 추구하는 생존 방법인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똑같은 강한 자의식을 갖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오면서 그것이 뜻대로 이뤄지지 못해서 좌절하고 포기하면서 앞의 네 가지 분류로 나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주 소수는 자아를 제법 잘 만족시킬 능력을 타고 난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그래서 당연히 자신감이 넘치고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 받는다. 또한 당연하게도 지적 능력이 뛰어나거나 육체적 능력이 강한 경우가 많다. 특히 육체적 능력보다는 지적 능력이 좀 더 높은 평가를 받는 편이긴 하다. 아무튼 이들은 대부분 잘 먹고 잘 산다.
 
여섯 번째 분류는 다섯 번째 분류에 속할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 좀 더 다른 해결책을 찾고자 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내부 속에서 끝없이 좌절하는 자아를 해결 하는 방법으로써 성공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아의 존재를 인식하고 바라보길 바란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대부분 생각을 많이 하게 되기 때문에 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되고 만다. 우리는 보통 인간에 대한 깊은 생각과 이해를 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기 때문이다. 뭐 혹은 심리학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들은 자신의 자아를 본격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앞의 다섯 개의 분류에 속한 사람들과는 확실하게 구분이 된다. 왜냐하면 사실상 앞의 다섯 개의 분류에 속한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이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조차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즉, 자신이 어느 분류에 속할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자아가 있는지조차 모를 만큼 완전히 무의식적이다.
 
하지만 이 여섯 번째 분류에 속한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자아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바라보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들 역시도 자아가 있고, 그 자아가 자신의 모든 욕망과 가치나 행복 등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냥 두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오랜 시간 연구하고 생각한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책이나 논문으로 써서 세상에 발표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내부에 자아라는 존재가 있음을 세상에 알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행동 자체도 역시 자아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노력에 불과하다는 점이 아이러니 하다. 즉, 자아는 그 존재를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의 손아귀에서 전혀 벗어날 수 없다.
 
일곱 번째 분류에 속한 사람들은 이제 좀 더 본격적으로 자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즉, 이들은 자아의 노예가 되는 것이 싫을 만큼 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것은 좀 비논리적인 말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주로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거나 여러 가지 형태의 훈련을 하게 된다. 몸에 강한 고통을 줘서 자신의 자아를 버리려고 하거나 오랜 시간을 혼자서 살아가면서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미 처음부터 자아를 벗어나려는 노력 자체가 자아의 의지에서 나왔기에 평생을 쳇바퀴 돌고 만다.
 
즉, 아무리 노력해서 벗어나려고 해도, 단지 보고 듣지 않아서 그 존재가 유명무실해진 자아를 지낸 채, 마치 자아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들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면, 아직 자아의 노예인 사람들은 그들의 등장에 크게 환호하게 된다. 그리고 당사자는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거대하게 커져버린 자아에 대해서 그렇게나 커진 자아를 아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자신이 자아를 버린 줄 알게 된다.
 
여덟 번째 분류에 속한 사람들은 사실 거의 없지만, 말 그대로 정말로 자아를 버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바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사실 이 분들이 경험한 세상은 단지 지식적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들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는 경지에 올라서면 자아가 사라지고 거대한 전체의 일부가 되며, 그럼으로써 생과 사를 초월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참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아는 바로 생존에 대한 욕구이기 때문에, 자아가 사라지면 당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지까지 올라 선 사람들의 숫자는 매우 적으며, 가장 유명한 사람은 부처나 노자와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분류에 속한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목표가 바로 이 여덟 번째에 속한 사람들이 모습이 된다. 즉, 일곱 번째에 속한 사람들 역시도 이루진 못했지만 깨달음을 얻고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대충 이렇게 분류를 마무리하고, 좀 더 남은 이야기를 해보자.
 
일단 첫 번째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가 소위 인간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들은 과연 어떤 분류에서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자. 이것의 답은 쉽다. 그것은 바로 주로 여섯 번째 분류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일곱 번째에서 더욱 더 치장이 된다. 즉, 이들의 입장에서 인간은 적어도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존재들인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인간의 대부분은 첫 번째에서 다섯 번째에 속해 있다. 즉,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아닌 다른 분류에 속한 사람들이 책을 쓴 글이나 말로 한 얘기를 근거로 우리들을 정의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이것이 뭔가 잘 맞지 않는다.
 
즉,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믿고 있는 인간의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고 행동하는 우리 자신과 괴리가 있음을 아주 가끔 느끼는 것이다.
 
사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주 소수의 계층에서만 나타난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사고 영역 안에서 인간을 이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의 머리 속의 인간에 대한 정의는 당연히 그들 자신의 모습을 기준으로 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이것이 일반 사람들과 잘 맞을 턱이 없다.
 
단지 그들의 말은 아주 가끔 일반인들 사이에 퍼져서 뭔가 작은 충격이나 되돌아 봄을 유발시킬 수는 있다는 점에서 유효할 뿐이다. 그 외에는 단지 철학자들의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한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다시 설명하면, 우리는 모두 비슷한 수준의 자아를 가지고 있지만, 타고난 집안, 능력, 성격, 경험 등을 통해서 그것이 어느 정도 충족되거나 심하게 상처를 받게 된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차이가 바로 앞의 여덟 개의 분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대충 비율로 보면, 첫 번째, 두 번째에 속한 사람들은 전체의 5% 정도, 세 번째가 20% 정도, 네 번째가 50% 정도, 다섯 번째가 20% 정도 될 것이다. 그리고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가 5% 정도 될 것이고 여덟 번째는 아예 수학적으로는 0%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겨우 5%에 해당하는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가 정의한 인간에 대한 부분을 90%에 해당하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에 속한 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가진 가장 자기 착각이자 모순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정의한 인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두 번째로 할 얘기는 과연 어린 아이들은 어디에 속해 있을까에 대한 생각이다. 그리고 당연히 아이들은 경제적으로 그다지 문제가 없으면서 자의식이 좀 덜 찌그러진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들은 주로 두 번째 분류에 속해 있지만, 아직까지는 좀 덜 충격을 받은 상태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두 번째에 속해 있지만, 주로 하는 게임 속에서는 말 그대로 '지존'의 취급을 받는 사람의 모습일 수 있다.
 
아이들의 모습 속에 들어 있는 자아는 말 그대로 우리가 가진 자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릴수록 좀 더 덜 상처받은 상태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릴수록 좀 더 자연스럽고 좀 더 행복하다.
 
세 번째는 그렇다면 과연 각 분류는 좀 더 큰 관점에서 분류해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단 자아에 대한 인식, 즉 의식적인 삶과 무의식적이란 삶의 관점에서 보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까지의 삶은 무의식적이고 그 후로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는 의식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무의식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을 조정하는 것이 자아라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살다가 보면 들어는 보았다. 그래서 의식, 자아, 에고 라는 말을 들어 보았기에 사실 자신이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따로 노는 개념이 된다. 즉, 지식으로만 알고 있고 그것을 전혀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다리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들이 가진 장애로 인해 그들이 힘들 것임을 알지만, 사실 얼마나 힘들지는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관점으로 자아의 유무를 기준으로 보면 앞의 일곱 개와 나머지 여덟 번째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 크게 나눈 두 분류는 사실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즉, 앞의 일곱 개는 단지 자아의 상태에 따라 분리된 것에 불과하고 마지막 여덟 번째는 그 자아 자체가 사라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마치 0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숫자와의 관계와 같다. 0은 온전히 없음이고 나머지는 0.000000001 이라고 해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은 거의 같은 모습이다. 단지 상황에 따라 조금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즉, 노숙자나 크게 성공한 대기업의 사장이나 모두 자아의 노예일 따름이다. 또한 그래서 그들 모두 자신이 얼마나 잘났느냐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욕구, 즉 타인의 부러움이나 관심을 받고 싶은 욕구의 노예이다.
 
단지 노숙자는 할 것이 없어서 조용히 있고, 대기업 사장은 할 것이 많아서 자주 드러내는 것뿐이다.
 
누구든지 인간을 이해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자아의 존재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모든 욕구와 그것을 이룸으로써 얻는 모든 행복이 실제로는 자아가 원함이란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이란 개념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여덟 번째를 경험할 수 없는 한, 우리에게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아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가치가 절대적 이길 원한다. 그럴수록 더욱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끝없이 신념이나 믿음에 대한 욕구를 느끼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고집스럽고 가치 주입적인 사람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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