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다양한 행복의 기원

아이루다 2015. 7. 10. 09:24

 
동물의 세계를 살펴보면, 그들의 승자와 패자를 구분 짓는 것이 바로 육체적 능력이란 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즉, 단순화 시켜서 말하면, 힘이 센 녀석이 힘이 약한 녀석을 이기는 것이다.
 
물론 동물 세계에서도 속임수는 존재할 것이다. 인간이 보기엔 뻔하고 단순해 보이는 행동이지만, 그들 역시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상대를 속이기도 한다. 우리는 가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자연 다큐멘터리를 통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한계는 명확하다.


아무튼 동물의 세계에서 승리는 생존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고, 동종의 동물들인 경우에도 사냥터를 지키거나 짝을 얻을 기회를 결정하기도 한다. 또한 이것은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나 동물들이나 모두 공통적으로 왜 경쟁에서 이기고 싶어할까?
 
이 질문의 답은 단순하다. 승리자는 이득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이득은 생존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모든 생명체는 생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떄문에, 당연히 모든 경쟁에서 이기려고 노력하게 된다.
 
인간도 동물들처럼 끝없는 경쟁을 통해 승부를 가르지만,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지능이란 새로운 능력을 가지게 됨으로써 경쟁 구조 자체가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추가적 요소들이 덧붙여짐으로써 현재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세상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복잡함은 결국 우리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다양한 형태의 행복을 만들게 된다. 이제 이것에 대해 좀 더 파악해보도록 하자.
 
아마 우리의 오래된 조상인, 원시인들은 사실 동물들의 세상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즉, 그들 세상도 역시나 강한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었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지금과 같이 날카로운 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멀리서 상대를 죽을 수 있는 활이나 총이 있지도 않는 시절, 두 주먹이 최고의 무기가 되던 시절이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 틀림없다.
 
이 상황에서 도구의 발달이란 요소를 하나 첨가해보자. 그런데 이것 하나만 추가되어도 기존의 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비약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무기는 기본적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훨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상황에 따라 약자로 하여금 강자를 극복해낼 수 있게 해줬다는 점이다. 즉, 무기의 발달은 오직 힘만이 지배하던 사회구조를 허물어 낸 것이다. 

 

예를 들어서 현대에 사용되고 있는 가장 범용적인 무기 중 하나인 권총은, 경험만 있다면 약자로 알려진 아이나 여자들도 충분히 사용 가능하다. 즉, 약자들에게 있어서 좋은 무기는 강자를 대적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 되어 준다.  


이 변화는 단순하지만 극적이다. 이제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는 단지 힘만 세다고 해서 무조건 승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도구를 가지고, 그것을 잘 쓰는 사람이 승자가 될 가능성도 생겼다.
 
이미 언급했듯이 승리는 이득의 다른 말이다. 공동의 노력으로 멧돼지를 잡아서 나눌 때, 가장 강한 자, 즉 승리자가 가장 좋은 부위와 가장 큰 크기의 고기를 가져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구나 이기고 싶어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런데 어떤 도구들은 최종 승리자를 바꿀 수 있다. 또한 도구는 단지 도구를 쓰는 사람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도구 자체를 만드는 사람, 그것도 도구를 아주 잘 만드는 손재주가 있는 사람의 가치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원래 도구를 잘 만드는 사람은 경쟁에서의 승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사실 그는 승리하고자 하는 욕구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손재주는 그의 가치를 급상승 시킨다. 그래서 승리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그 사람을 보호하고, 그에게서 좋은 무기를 얻으려 애쓰게 될 것이다.
 
결국 이런 자연스러운 진행으로 인해, 도구를 만드는 사람은 최종 승리자만큼 크고 좋은 고기를 받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좋은 도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기대치로 인해서 꽤나 괜찮은 고기를 받게 될 것이다. 이 역시도 큰 변화를 의미했다. 즉, 이젠 직접적으로 싸움을 하고 순위 경쟁을 하지 않아도, 어떤 능력을 갖게 되면, 충분히 자기 몫을 챙기면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또 하나의 요소가 첨가된다. 그것은 바로 다수의 힘이다. 다른 말로 패거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아무튼 혼자가 아닌 다수의 힘이 지닌 가치가 점점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원래 싸움을 1:1로만 하면 그 결과를 예측하기는 쉽다. 단순히 쎈 녀석이 이긴다. 하지만 1:다수의 구조가 되면, 단지 쎈 녀석이 이기는 것이 아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다수가 이긴다. 즉, 다수의 힘이란 요소가 첨가됨으로써 이제 힘과 도구 그리고 무리짓기라는 세가지 요소가 어우러져서 최종 승리자를 결정짓게 한다.
 
힘은 일단 육체적 능력이다. 그리고 도구를 만드는 것 역시도 일종의 육체적 능력이다. 하지만 무리를 짓는 것은 매우 고난이도의 지적 능력이다. 사실 힘이나 도구를 만다는 능력은 그 결과가 확실하기에 쉽게 그 능력이 드러나지만,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능력은 평가 자체가 매우 힘들어서 그것의 가치를 간과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그 어떤 능력보다 관계를 맺는 능력이 최고의 것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특히 이 능력이 이득을 위해서 발휘될 때 더욱 더 가치가 있어진다. 그래서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두뇌 능력은 단지 싸움을 할 때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거나, 도구를 만들 때 이용할 수 있는 이론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서로 최소한의 손해를 통해 가장 효율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으로 진화된 것이다.
 
아무튼 힘이 지배하던 세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좋은 무기를 만드는 장인을 옆에 두고, 다수의 추종자나 혹은 동료를 가진 자가, 혼자서 독불장군 식으로 강한 힘을 가진 자를 억누를 수 있는 세상으로 변화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우리 인간은 이것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가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신뢰이다.
 
다수가 서로 힘을 합쳐서 어떤 일을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서로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의 여부가 된다. 적 앞에서 나를 배신하고 상대에게 넘어가서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동료는 눈 앞의 적보다 훨씬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사회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큰 도시를 이루고, 국가를 구성해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의 근간 역시도 신뢰도의 상승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오늘 하루를 도심지를 걸으면서, 누군가 나를 칼로 찌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심을 지배하고 있는 공권력에 대한 신뢰, 누군가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지는 않을 거이란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매일 신문에 백주대낮에 사람이 찔린 소식이 들리거나, 전염병이 돌아서 누가 감염이 되었는지 모르는 상황이 벌어지면, 누구도 밖에 나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장소, 즉 집 안에서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 즉 가족과 함께 움츠러들어 있게 된다.
 
이 모든 설명은 신뢰가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사는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작은 예에 불과하다. 사실 신뢰는 인간이 이룬 그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해도 과정된 표현이 아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도 도구와 신뢰를 기반으로 한 무리짓기는 생존에 있어서 아주 큰 도움을 줬을 것이다. 즉, 그들은 좋은 도구와 다수가 가진 힘으로써 경쟁에서 승리자가 됨으로써 더욱 더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입장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신뢰의 가치는 당연히 무리짓기를 기반으로 하고, 그 무리짓기는 또한 승리를 통한 이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즉, 신뢰 역시도 그 본질적 영역에서는 승리를 통한 이득을 통해 그 가치가 만들어지고 있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원래 각종 이득들은 당사자들을 기분 좋게 해준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이득을 얻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이것은 우리 몸의 기본적인 동작 원리이기도 하다.
 
뇌는 우리 몸이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고통을 통해 스트레스를 줘서 몸이 움직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들고, 그 움직임의 결과로 인해서 만족할 만한 이득을 얻으면, 그것에 해당하는 편안함을 줌으로써 쉴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동작원리인데, 뇌는 주로 이것을 호르몬을 통해서 조절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뇌의 만족스러움에 대한 결과물을 인해 기분 좋아진 상태를 '행복' 이란 용어로 칭하고 있다.
 
즉, 우리는 힘과 도구와 무리짓기를 통해 승리자의 입장이 될 때마다 이득을 얻기 때문에 결국엔 행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느끼는 행복의 가장 기초적인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이런 원시적인 행복은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다양한 다른 요소들과 복잡하게 얽히면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종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원래 좋은 도구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원래 그냥 손재주가 좋은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좋은 도구가 경쟁에서 이길 수 있거나, 사냥감을 좀 더 쉽게 잡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가치가 높아져서, 결국엔 어떤 중요한 이득을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어떤 좋은 도구를 만드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행복으로 발전된다. 그래서 원래 그냥 아무 생각없이 만들던 도구들은, 그 도구를 만들 때마다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미래의 이득을 상상하게 됨으로써 행복한 시간이 되게 된다. 또한 그 결과물이 자신의 기대만큼 혹은 기대 이상으로 잘 나왔을 때, 우리는 그것이 당장 이득과 연결되지는 않아도 그것을 예상함으로써 아주 큰 만족감을 느끼고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젠 단지 그것을 어떻게 쓸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고, 단지 만드는 것 자체에 집중하고 그것을 통해 행복을 얻기도 하고 있다. 사실 현대인들의 많은 취미 생활이 그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아무리 변형이 된다고 해도, 그 근원에는 오직 이득을 얻는다는 단 하나의 본질적 욕구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은 역시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 그것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 역시도 잠재적 이득에 대한 가능성을 높였기 때문에, 그것을 느낄 때마다 기분이 좋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좋은 관계는 적극적인 태도인, 이득만을 위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태도로 볼 수 있는, 개인의 안전에 대한 측면에서도 매우 크게 중요한 요소가 된다. 즉, 남과 경쟁해서 적극적으로 이득을 얻을 때도 중요하지만, 밤에 잠을 잘 때, 잠든 나를 적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불침번을 서줄 수 있는 존재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도 무척 중요하다.
 
이것은 두 명일 때, 세 명일 때 다르다. 서로 번갈아 가면서 불침번을 서야 한다면,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힘과 도구와 무리짓기를 통해 승리자를 결정하던 우리 인간 사회는, 점점 시간이 지나 발전이 되자 이젠 원래 처음에 왜 그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줬는지에 대한 본질적 이유들은 숨겨지고, 단지 표면적으로는 그 행위 자체만이 남아서 그것들을 추구하고 있는 쪽으로 변화되기 된다.
 
이것은 마치 임신을 원하지 않는 섹스의 개념과 비슷하다. 원래 우리는 자녀를 얻기 위해서 섹스를 했으나, 이제는 단지 섹스 중 얻는 즐거움을 위해서만 섹스를 한다. 그리고 아이러니 하게도 임신은 원하지 않는다.
 
인간의 행복들 모두가 이런 형태로 발전되었다. 우리는 이젠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풍족하다.
 
무리짓기 역시도 비슷한 변화를 겪었다. 우리는 무리를 지어서 적과 싸우거나 밤에 잘 때 쳐들어 올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모두 신뢰 있는 사람이 하나씩 늘어갈 때 느낄 수 있는 행복은 온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면 좀 더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때마다 대한 큰 만족을 느끼고 행복해 한다.
 
사실 현대에 이르러 관계 중, 가족은 바로 이것을 충족시키는데 있어서 최고의 역할을 해준다. 사실 이것은 거꾸로 이해해야 한다. 가족은 혈연의 관계라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은 모든 관계 중에서 가장 신뢰 높은 관계이기에 최고로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어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승리를 위한 세가지 요소, 힘, 도구, 무리짓기를 통해 얻는 만족감은 결국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거의 모든 행복의 기본이 되어주고 있다. 이 중에서 힘은 현대에 와서는 건강함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몸을 건강해주는 모든 행위, 다른 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행위, 다양한 형태의 생산적인 일을 하는 행위, 이 세 가지를 주로 하면서 살아가고, 이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바로 불행이 찾아온다. 즉, 건강을 잃거나, 관계를 잃거나, 직장이나 기타 자신을 만족시켜줄 생산적인 행위를 하지 못하면 불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근본적 동작 원리에서 추가로 하나 더 넣어야 할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이다. 그리고 이 행위는 이득과는 반대편에 서 있기 때문에, 문제를 매우 복잡하게 만든다.
 
자연계도 그렇고 인간도 마찬가지지만,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은 부모의 입장에서는 기본적으로 손해를 의미한다. 하지만 또한 자녀를 남기지 못함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의미성을 가중시키기에 이것을 단순하게 손해라고만 판별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젊은이들의 불타는 사랑을 보면서 관계의 기본은 신뢰보다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사랑이 시작될 수 있는 근거 역시도 신뢰일 뿐이다. 하지만 그 신뢰가 없음에도 관계가 시작될 수 있는 유일한 예외상황이 바로 섹스에 대한 욕구가 된다.
 
그리고 이 섹스의 욕구의 기반은 당연히 임신과 출산의 목적이다. 물론 우리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내용은 삭제하고 쾌락이라는 형식만 남았지만, 신뢰의 가치를 뛰어 넘는 것을 보이는 남녀의 불타는 사랑이 왜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된다.
 
하지만 호르몬에 의해 격발된 사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지고, 결국엔 그들 역시도 신뢰의 문제로 수렴할 수 밖에 없다. 즉, 젊은이들의 사랑은 잠시 동안은 신뢰의 가치를 뛰어 넘을 수는 있지만, 결국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뢰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수 많은 부부가 이혼을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인간은 승리자의 입장이 될 때 행복하다. 우리는 누구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때,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육체적 능력, 도구,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능력 등이 매우 중요하게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들은 현대에 와서는 많이 은밀해져서 직장과 같은 생활 전선에는 아직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 외의 삶에서는 내용은 숨고 형식만 남아서, 우리들 대부분은 그 형식 자체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즉, 우리는 오늘도 수 많은 다양한 행위들을 통해서 행복함을 느끼지만, 사실 그 행복들이 모두 승리자가 되어서 이득을 얻는 것으로부터 오는 만족감에 의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숨겨져 진실이 있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거의 무시하고 살고 있다.
 
아마도 인간의 미래 사회에서는 이것이 점점 더 심화 될 것이다. 그래서 왜 섹스를 하는지도 잊고, 왜 이기고 싶어하는지도 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작동되는 우리의 육체는 끝없이 그것을 추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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