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죽음의 두려움

아이루다 2015. 6. 5. 07:52

 
현재까지 과학기술의 발전 상황에서 보면, 우리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미래의 어느 날 우리는 반드시 죽지만은 않을 수 있다. 영생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때가 되면 우리 인간은 더 이상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을까? 이것은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이기에 답할 방법은 없다.
 
아무튼 과거와 현재 시점에서 우리 인간은 누구나 죽으며 또한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산다. 물론 이것은 인간만의 특징이 아니다. 원래 모든 생명체가 그렇다. 단편적으로 죽음은 분명히 삶의 반대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우리는 왜 죽음을 그렇게 두려워할까? ***
 
사실 이 질문은 너무도 평이해서 답을 모르는 이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진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자.
 
죽음에 대한 공포는 총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일단 첫 번째로 죽음이 가진 두려움은, 생명체 본질적인 공포이다. 우리는 그냥 죽는 것이 두렵다. 왜냐하면 보통 죽음은 고통을 동반하고, 이 고통은 우리를 매우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자다가 죽는 것 같은 죽음은 상대적으로 덜 아프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고통의 두려움이 떠오른다.
 
칼에 벤 상처도 그리 아픈데, 죽음을 당할 때 고통은 얼마나 아플 것인가? 잠시 숨을 못 쉬어도 그리 힘든데, 숨이 막혀서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그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살아 있는 우리들은 아직 그 고통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오직 죽은 자들이나 혹은 죽은 후 다시 살아난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놓은 말이기도 하다. 우리의 신체가 고통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죽음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불행하기도 하지만, 더 큰 불행을 막을 수 있다. 손이 칼에 베면 아픈 이유는 바로 감염되기 전에 치료하라는 신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무통증 현상을 겪는 사람을 부러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사실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다. 그들은 매일 자신의 몸을 살펴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고통이 없다는 것은 당장은 좋은 것일지 모르지만, 생명체의 장기적 관점으로 봐서는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죽음의 두 번째 두려움은 존재의 종말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인간의 고유 영역에 해당 된다. 지구 상의 모든 존재들 중에 유일하게 스스로를 자각한 존재인 인간만이 존재의 사라짐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생각과 경험을 가진 존재라고 믿는다. 우리는 모두 각각 고유한 존재이며, 그 존재는 그 어떤 누구와 중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유일한 고유 가치이다. 그런데 우리 개개인의 죽음은 그 고유 가치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짐을 의미한다.
 
우리는 죽는 순간, 죽기 전까지 경험 모든 기억과, 자신만의 생각, 스스로 의미 있다고 믿는 가치들이 같이 죽는다. 그것들은 모두 살아 있는 순간에만 의미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소중한 사람과 사랑에 빠져 있어도 죽은 후에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물론 남은 사람은 그것의 의미를 간직한다. 하지만 오직 산 사람만의 입장이다. 이미 죽은 사람은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
 
이렇게 죽음은 존재의 끝을 의미한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깊은 생각을 안 해봐서 별 것 아닐 것이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깊게 생각해 볼 기회가 생기면 무척 큰 두려움이다.
 
밤에 불을 꺼 놓고 자신의 죽음을 가정한 채, 유서를 써 본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때 그 분위기에 온전히 집중해 본 사람이라면, 그 무게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경험을 해 보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사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너무 외면하고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과 생각에 대해 스스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이 현실 세계의 의미를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먹는 음식, 친구와의 대화, 수 없이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모두 자신의 머리 속에서만 이뤄지는 감각의 경험이란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사라지면, 그 모든 것이 같이 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개인의 죽음 후에도 세상은 존재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개인에게서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의 종말은 세상의 종말과 같은 의미가 된다.
 
결국 존재의 종말, 이 말은 별 생각 없이 들으면 그냥 무시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사실 이 말을 조금만 깊게 생각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든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해도, 세상으로부터 잊혀지는 것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다른 이들의 무덤을 만들고 묘비를 세운 후 찾아 감으로써, 자신의 죽은 후에도 남은 사람들이 그것을 잘 해주길 바란다.
 
죽음의 두려움 중 마지막 세 번째는, 남은 자들에 대한 슬픔과 아련함이다. 이것은 앞의 두 개의 이유와는 조금 차이가 난다. 그리고 동물들도 이것을 느낄 수 있을지 여부를 판단하기도 힘들다.
 
한참 자라고 있는 아이를 키우던 엄마가 암에 걸려서 죽어야 할 때, 이 엄마는 자신의 죽음이 두려운 것보다, 한참 엄마 손길이 필요한 목숨처럼 소중한 아이를 두고 떠나는 것에 마음이 찢어진다. 이것은 사실 설명하기도 힘들만큼 무겁고 진지한 마음이다.
 
누구나 소중한 존재를 두고 떠나야 할 때, 더해서 그 존재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 그것을 두고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견디기 무척 힘들다. 또한 이것은 반대로 죽지 않았을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도 되어 준다.
 
꼭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평생을 연구한 학문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노학자의 뒷모습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이 부여한 큰 가치를 지녔지만 완성되지 않는 것을 두고 떠나야 할 때는 그런 감정을 느낀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 가치가 있는 것이 있을 때, 이 세상에 더 큰 미련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미련은 죽음을 앞에 뒀을 때, 훨씬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죽음에 대한 세 가지 두려움 중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될 수도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세상 사람들 중에서 앞의 두 개의 두려움보다 이 두려움을 더 크게 경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즉,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가진 사람이 드물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죽음을 좀 덜 고통스럽게 바라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웬만큼 강한 믿음이 아니고는 죽음의 두려움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그나마 인간이 죽음을 좀 덜 두렵게 느낄 수 있는 상황은 바로 많이 불행하거나 나이를 먹었을 때이다. 즉, 충분히 살아서 삶의 미련이 줄어들었을 때나 각종 문제로 인해서 현생이 삶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조금 더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 그렇다면 원래 죽음은 이런 것이어야 할까? ***
 
사실 생명체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은 당연히 이런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죽음은 그것의 공포로 인해서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은 사실 삶과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꽤나 철학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 어려운 개념도 아니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완전히 반대로 정의한다. 하지만 삶은 죽음으로 인해 가치를 지닌다. 다르게 말하면, 삶은 죽음에 종속된다. 우리의 행복은 모두 죽음의 반대편에 있기에 발생한다. 우리는 행복에 대해서 많은 착각을 하지만, 본질적으로 행복은 죽음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몸이 주는 보상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행복 하려고 애쓴다. 이 말은 우리는 평생 동안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려고 애쓴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결국은 죽음에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결국 죽는다.
 
즉, 우리는 평생을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행복을 얻고 살아가다가 결국엔 필연적으로 가장 큰 불행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죽음이 없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행복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것을 좀 더 깊게 파고 들면,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빛과 어둠이 서로 완전히 반대의 영역에 있어서 절대로 다른 개념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하지만 빛이 있어야 어둠의 의미가 생겨나며, 어둠이 있어야 빛의 의미가 생겨난다. 이것은 신이 악마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되며, 악마가 신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된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죽음을 바라보는 작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 있기에 우리가 오늘도 행복을 향해 열심히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나 희망하는 영원한 삶은 사실 영원한 지루함과 권태일 수 있다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예측은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좀 더 가치 있고, 의미 있으며, 열심히 살아가야 할 의무를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우주적 시간으로 보면, 정말로 작은 시간만 존재하고 떠나지만, 그 안에서 얼마든지 우주의 시간을 품을 수 있다. 그것은 모두 개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을 것이다.
 
설령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삶의 끝자락에 섰을 때, 스스로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이었다 라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만이라도 자신의 삶에 좀 더 집중해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 하루 어떻게 시간을 '때우냐' 로 고민할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느냐를 가지고 고민하는 삶을 사는 것이 좀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둘 모두 사실상 의미가 없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적어도 죽는 순간에 덜 후회를 하고 싶다면 말이다.
 
그리고 잠시라도 시간을 내어 자신이 주어진 삶 속에서 매일매일 살고 있는지, 아니면 시간을 때우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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