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신뢰의 가치

아이루다 2015. 5. 19. 08:11

 
개신교 교회에 가게 되면 부르는 자주 듣는 찬송가가 하나 있다. 그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 라는 가사를 가진 노래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세 가지의 중요한 가치 중에서 사랑을 가장 중요한 것임을 뜻하는 가사일 것이다. 사실 이 가사는 성경, 고린도 전서 13장 13절에 나오는 말씀을 노래로 만든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로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 가사를 신의 마음으로 보았을 때 정말로 옳다. 사랑이야 말로 모든 것의 시작이며 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의 마음처럼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군가를 사랑을 하기엔 너무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상 인간이 입장에서 보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믿음, 즉 신뢰이다.
 
물론 이 가사에서 믿음이란 단어가 가진 의미는 신에 대한 믿음일 수 있으니, 방금 말한 해석은 시작부터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가정하자.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왜 인간에게 있어서 신뢰가 그토록 중요한지 생각해보자.
 
원래 믿음보다 중요하다고 알려진 사랑이란 감정은 아주 다양한 관계 속에서 나타날 수 있다. 신과 인간, 부모와 자식, 연인, 친구, 이웃, 연예인과 팬 등등 우리가 연을 맺고 삶을 살아가는 중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 사랑이란 감정이 생기고 유지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아니, 사랑의 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가 생기고 유지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이것의 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이 바로 신뢰이다. 설령 신과 인간간의 사랑이라고 해도, 신은 아니겠지만, 인간은 신뢰가 있어야 신을 믿고 사랑할 수 있다. 인간은 믿지 못하면, 그 어떤 관계도 맺질 못한다. 우리가 그나마 믿지 못하면서도 맺는 관계는 사업적 관계, 즉 이득을 얻기 위한 관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의 사업적 관계를 맺을 때, 계약서라는 것을 쓴다. 계약서를 쓰는 것은 당연히 서로 믿지 못하기에 그렇다. 우리는 믿지 못하는 상대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법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냥 계약서를 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수 많은 계약서는 우리가 서로 믿지 못함을 증명하는 증거이다.
 
반면에 신뢰가 쌓인 관계는 계약서를 쓰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좋고, 잘한다는 뜻이 아니다. 살다가 보면, 신뢰한다고 생각했던 상대에게 배신을 당하는 일이 너무도 많이 일어난다. 그리고 계약서 등을 쓰지 않아서 낭패를 보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것은 믿으면 안 되는 사람을 잘못 믿는 탓이다. 즉, 사람의 신뢰도를 판단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모두 믿은 사람의 잘못만으로 몰 수는 없다. 사기를 치려고 치는 사람은 구별하기도 힘들고, 수 년간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돈을 떼어먹고 잠적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따로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는 누구나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모든 관계에서 기본이다. 설령 사업적 관계여서, 계약서를 쓴다고 해도 기본적인 신뢰가 있어야만 그 일을 진행한다. 아예 처음부터 믿지 못할 사람하고는, 아무리 그 일을 해서 이득이 된다고 해도 꺼려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사실 우리가 매일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상대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 끝없이 저울질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을 믿을 만 한지, 아니면 믿으면 안 되는지를 계속 측정하면서, 둘 사이의 거리를 잰다.
 
이렇게나 조심스럽게 신뢰에 대한 접근을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젠가는 자신이 신뢰를 깨거나 다른 이들에게 깨짐을 당한다. 그토록 중요한 신뢰인데도 그렇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우리나 그들은 원래 신뢰가 없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혹은 신뢰를 깰 수 밖에 없는 상황일 수 있다. 이것을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가 신뢰를 깨는 것은 각 개인별로 이득과 관계유지라는 목적 사이에서 적절한 절충점이 된다.
 
만약 다른 이들의 관계보다 이득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신뢰를 쉽게 잘 깬다. 반대로 관계가 이득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은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이득을 포기한다.
 
그런데 이 말은 좀 이상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래 처음부터 관계를 맺는 이유가 바로 이득을 위해서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 더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관계를 통해 얻는 이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는 점이다.
 
하나는 일단 계속 말해왔던, 실제적인 이득, 즉 금전이나 기타 명시적인 이득을 말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관계에서 얻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정신적 이득이다.
 
이런 정신적 이득엔 여러 가지가 속해있다. 그것은 안도감, 존재감, 즐거움, 동지애, 만족감, 소속감, 따뜻함 등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가족이나 친구 등과 어울리면서 이런 감정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얻을 수 있기에 그들의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원래 금전적인 이득은 어느 선에서 한계가 있다. 물론 돈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긴 한다. 돈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돈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돈은 그 역할에 있어서 한계는 있다. 어느 선까지만 행복에 깊게 관여하고, 어느 정도를 넘어가면 큰 의미가 없어진다.
 
하지만 정신적 이득은 다르다. 이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리고 금전적인 이득이 어느 정도 보장된 상태에서 이 정신적이 이득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깊은 불행에 빠질 수도 있다. 돈은 우리를 생존하게는 해준다. 하지만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돈이 아니라 정신적 이득으로 얻은 가치들이다.
 
이 두 이득 중 어느 한쪽이 명백하게 좋다고 결정할 수는 없다. 아마도 가장 좋은 형태는 신뢰할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얻는 금전적 이득이 될 것이다. 이것은 참 좋지만, 쉽게 얻을 수가 없다. 우리는 보통 다양한 관계 속에서 금전적인 이득만 추구하든지, 아니면 정신적인 이득만을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일반적 관계는 회사 동료와 친구로 나뉜다. 물론 이것은 섞일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가능하면 이것을 구분하려고 한다. 그래서 회사 동료는 적절하게 어울릴 정도만 유지하고, 친구와는 금전적 이득으로 얽히지 않으려고 한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리 중요한 신뢰는, 사실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우리는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신뢰의 가치를 잘 느끼지 못할 뿐이다.
 
낯선 곳을 혼자 걸어갈 때, 어떤 사람이 보이면, 우리는 그 사람이 반갑기 보다는 먼저 두려움이나 경계심이 든다. 이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신뢰의 부재로부터 오는 현상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믿질 못한다. 그래서 낯선 사람을 보면 경계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그럴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기본적으로 서로를 믿는 사회를 살아간다면 어떨까? 우리는 낯선 곳에서 만난 사람에 대해서 반가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무도 없어서 심심하고 외로운 시간에 말동무라도 하나 생기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사실 이런 일은 일어날 경우도 있다. 아주 특정한 장소나 특별한 행위를 하고 사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사람보다 기본적으로 신뢰도가 높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경찰서나 경찰 제복을 입은 사람들, 히말라야를 도전하는 사람들, 교회와 절 같은 장소와 종교인, 사회적으로 신망이 있다고 알려진 직업 종사자들, 남을 돕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 등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아주 국부적으로만 존재한다. 우리가 맺는 대부분이 관계의 시작은 일단 경계심이다. 그렇지만 상상해보라. 세상 누군가를 만나도 반갑기만 한 세상이라면, 우리가 낯선 곳에 가서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 얼마나 그것이 우리를 편하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를 말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룰 수만 있다면 우린 상상도 못할 큰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또한 신뢰는 단지 인간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일종의 신뢰이다. 우리는 자신의 집에 익숙하다. 그리고 이 익숙함이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데, 사실 익숙함 자체가 바로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다루는 것에 각자 익숙하다. 보일러를 켜고, 물을 틀고, 화장실을 쓰고, 전등을 켜고, 가스 레인지를 이용한다. 그리고 그것을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어떤 동작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익숙함이기도 하지만, 그 동안 잘 되어왔기 때문에 믿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가스 렌즈의 불이 잘 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잘 켜지지 않을 때가 있으며, 안 켜지더라도 가스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나 혹은 가스 레인지가 고장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라이터나 기타 불을 붙일 수 있는 도구를 이용해서 불을 켤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신뢰는, 어느 날 자신의 의도대로 동작하지 않는 집안의 물건이 나오게 되면 잠시 깨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직접 고치든, 돈을 주고 사람을 써서 고친다. 이런 것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점점 더 집에 대한 신뢰도를 높인다.
 
그리고 이것이 아주 오래되면, 아예 새로운 곳으로 옮길 엄두가 나질 않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오래된 집에 사는 나이 드신 분들은 몇 십 년간 익숙해진 공간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분들은 다른 이들은 낡고 오래되고 지저분하다고 말하는 그 공간에서 최대한의 신뢰를 얻고 있는 것이다. 신뢰는 우리를 안정적으로 해주기 때문에 그분들은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실 신뢰가 가진 가장 큰 힘이 바로 안전성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두려움을 가진 존재들이다. 만약 두려움이 없는 듯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며, 그 사람은 바보이든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든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사람이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근원은 바로 죽음이다. 우리는 누구나 죽기 때문에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신뢰는 이 두려움을 줄여준다. 우리는 가족에게서 가장 큰 신뢰를 느끼는데, 그것은 바로 가족이야 말로 우리가 아플 때, 유일하게 자신을 간호 해줄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병에 걸리는 것과 같이 개인에게 닥칠 수 있는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불행은, 바로 신뢰를 통해 그 두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한 신뢰관계가 잘 구축되어 있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가족이 화목해야 행복하고, 친구와 잘 지내야 행복하다. 직장에서 동료와 친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 행복하다. 그리고 그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신뢰이다.
 
신뢰가 깨진 가정은 남보다 못하다. 아내를, 남편을, 아이를, 부모를 못 믿는 가족은 매일 싸우게 된다. 신뢰가 깨진 친구는 다시는 보지 않는다. 우리에게 있어서 남은 신뢰할 수도, 신뢰하지 않을 수도 있는 대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정되기 까지는 그나마 얼굴을 본다. 하지만 이미 신뢰를 잃은 사람은 남보다 못하다. 그래서 다시는 안 보려고 한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그 안에서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신뢰를 지켜야 한다. 그것이 아마도 우리가 살아갈 좋은 미래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  (0) 2015.06.01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로써의 나  (0) 2015.05.21
인간다움에 대한 집착  (0) 2015.05.15
어떤 실험  (0) 2015.05.04
사이코 패스, 인간  (0) 2015.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