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간다움에 대한 집착

아이루다 2015. 5. 15. 11:55

 
우리는 가끔 '인간답다' 라는 표현을 듣는다. '인간답게 행동해야 한다', '인간답게 살아라' 라는 등의 말들이 그런 종류이다. 여기에서 인간답게 살고, 행동하라는 말의 목적은, 두 발로 걷고, 숟가락으로 밥을 먹으라는 소리가 아니다. 우리는 이 말을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그 무엇의 의미로 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보통,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들이 포함된다. 아마도 사랑, 믿음, 신뢰, 배려, 관심, 따뜻함, 이해 등이 그것에 포함된 가치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이 인간다움을 통해 동물과 우리 인간을 구분한다. 물론 생물학적 의미로 보면, 인간은 큰 두뇌, 직립 보행, 언어 능력 등이 후보가 되겠지만, 우리가 그런 외모나 생물학적 차이를 가지고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우리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일 수도 있다. 큰 두뇌는, 단지 크기만 할 뿐, 동물들에게 나타나는 공통 특징이다. 직립보행 역시도 우리 인간의 전용이 아니다. 심지어 새도 직립보행을 한다. 언어 역시도 마찬가지다. 고릴라는 인간의 말을 배울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동물을 절대로 갖지 못한 그 어떤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가치들이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간을 조금 특별하게 여기고 싶어한다. 누가 내일 잡혀갈지도 모르는 우리 속에서 오늘도 맛있게 밥을 먹는 돼지처럼 살고 싶어할 것인가? 우리는 그런 동물의 삶과 우리의 삶이 사실은 같다는 점을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너무 세다.
 
그래서 이 부분은 이해해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너무 인간다움에 심취해서 매우 심란한 생각이나 행동을 하기도 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믿는 좋은 가치들을 너무나 신성시 해서 이 가치를 조금이라도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거의 죽일듯한 비난을 퍼 붇는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거의 절대 명제이다. 그래서 자식을 사랑할 줄 모르는 부모는 인간이 아닌 존재로 취급 받는다. 우리는 사람이다. 이성도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거의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다. 그런데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고는 오직 감정적 영역이다.
 
물론 자신이 낳은 아이는 이성적 영역에서 보면, 분명히 자신의 책임이다. 그래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런 책임을 질 수 없는 처지나, 혹은 그 책임으로 인해 그 자신이 행복하지 못할 때, 이것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사람마다 다른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에 대해서 단 하나의 해답만을 요구한다. 그것은 바로,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스로 낳은 아이이니까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소중하다고 알고 있는 부모의 사랑인 것이다.
 
토끼는 놀라면 자기 새끼를 죽인다. 사자는 자신의 자식이 아닌 새끼들을 죽임으로써 암컷들의 발정을 유도한다. 북극 곰은 배고프면 다른 북극 곰 새끼를 잡아 먹는다. 이것은 동물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이 인간에게서 일어나면 안 된다.
 
그래서 인간의 부모는 동물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부모는 자식을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좋은 권유이다. 기왕 자식을 키우려고 마음 먹었다면,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모두에게 강요되며, 벗어나는 순간 비 인간적인 사람으로 낙인 찍힌다.
 
이것이 연장되면, 낙태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도 나온다. 낙태는 아직 태어나지 않는 애를 죽이는 행위이다. 사실 그래서 낙태는 매우 혼란스러운 개념이 될 수 있다. 도대체 생명의 범위를 어디까지라고 봐야 할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낙태는 부모, 즉 주로 엄마의 입장에서 결정이 된다. 당연하게도, 아이를 품은 당사자가 원해야 낙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아이를 키우는 기본적인 책임은 엄마에게 있다. 여기에서 만약 엄마가 자식을 버리고 도망치는 경우엔, 앞에서 말한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행하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에, 비 인간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그래서 키워야 한다. 그런데 만약 아빠가 없는 미혼모가 될 경우, 과연 이 엄마의 삶은 도대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물론 누군가는 평생 아이만 보고 살 것이다. 하지만 모든 여자가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행복에 대한 조건이 다르다. 누군가는 아이만 보고 평생 아이를 위해 살아가겠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행복을 찾아야만 살 수 있다.
 
부부가 이혼을 할 때, 아이를 서로 키우려고도 싸우지만, 아이를 서로 키우지 않으려고도 싸운다. 이것은 정말로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아이를 원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럴 때, 우리는 의견은 낼 수 있다. 낳은 아이는 본인의 책임이니, 어떤 식으로든 최선을 다하라고 조언할 수는 있다. 하지만 비난은 안 된다. 도대체 어떻게 비난을 할 것인가? 아이를 낳을 상황이 되지 않거나, 아이를 전혀 가질 생각 없이 즐기기 위해 섹스를 했다가 실수로 아이를 가진 사람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을 왜 비난하는 것인가?
 
이 비난의 기반에 제일 먼저 말한 '인간다움' 에 대한 깊은 믿음이 숨겨져 있다. 인간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믿는 것이다.
 
도대체 인간다움은 누가 정했으며, 왜 그것은 어떤 상황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할까? 설령 이 인간다움을 받아들여서 그것이 정말로 최고의 가치이며,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하는 가치라서, 많은 사람들이 아이만 가지면 무조건 낳는 사회가 되었다고 치자.
 
과연 이 늘어나는 인구는 누가 감당할 것인가? 또한 적절하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 상처받고 삐뚤어지는 아이들이 삶을 누가 책임져 줄 것인가? 우리는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지구를 망칠 수 있는 인간 지옥을 만들고 있는 것인데 말이다.
 
왜 책임질 자세는 없고, 자신이 믿는 인간다움에 대한 주장과 그것을 절대적 기준처럼 주장할까? 물론 아이를 낙태하거나 낳은 아이를 두고 도망치는 엄마들이 지구를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즐기기 위해 섹스를 했다가 덜컥 아이를 갖게 된 엄마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모두 실수를 한다. 단지 그들의 실수는 치명적이다. 생명에 대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실수는 절대로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인가?
 
죄 없는 여인이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돌 세례를 받을 때, 죄 없는 사람만이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은 절묘하다. 누가 죄가 없단 말인가? 누가 실수를 안 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인간다움에 대해 끝없는 욕구를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 인간다움에 대한 집착은, 오직 인간이기 때문에 갖고 싶은 인간 자존감일 수도 있다. 우리는 스스로 인간이란 점 하나 때문에 상상도 못할 만큼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제 태어난 겨우 6개월도 안된 닭을 매일 죽여서 튀겨서 찢어서 먹는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배가 터질 듯이 소고기를 먹는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수 많은 다른 동물들의 삶을 뺏고는, 그것을 먹는 것을 행복하게 한다.
 
만약 여기에서 우리가 그 동물들과 같은 입장이 되면, 우리는 마치 동족을 먹는 짓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니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라도 동물과 분리되어야 한다. 단지 머리가 조금 더 좋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다.
 
인간다움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다움은 각자 인간에게 다르다. 그래서 누구는 풀만 먹고 살고, 누구는 하루라도 고기를 먹지 못하면 죽을 듯 설친다. 도대체 이 명확하지도 않고 정체도 모호한 인간다움을 어떻게 그렇게 확신 있게 판단의 잣대로 쓰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사실 그런 행동은 어떤 면에서 비 인간적이다. 왜냐하면 인간다움의 한 요소인, 이해와 배려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을 과도하게 비난하고 욕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도 좋아하는 인간다움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되고 있다. 인간답기 위해서 비 인간적인 짓을 하는 것이다.
 
스스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상관없다. 종교적 이유든, 믿고 있는 인간다움에 대한 가치이든 상관없다. 그저 그것은 자기 안에서 머물러야 한다. 그것이 표출되고 다른 이들의 가치를 침범하는 순간, 그것은 그 자신이 그리도 비난하는 짓을 스스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처벌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는 복수를 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다움과는 먼 것들이다. 이것은 규칙이고 지켜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사는 사회가 유지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그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는 다른 이들의 행동에 대해, 그저 자신이 믿는 것과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무조건 적인 비난을 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시대에 따라 생각이 바뀌고, 시대에 따라 판단 기준이 달라진다. 100년 전과 지금이 다르다. 또 100년이 지나면 달라질 것이다. 미래엔 인공 자궁이 나오고, 여자들이 아예 임신을 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도 꼭 임신을 하길 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인공 자궁에서 태어나는데, 아이를 꼭 스스로 키우겠다는 부모는 비 인간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훨씬 안전하고 관리자 잘 되는 인공 자궁에서 키워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때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 비인간적인 짓을 자신의 아이에게 하냐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연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증오와 싸움과 비난과 혐오가 판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다. 비 인간적인 짓을 해서 비난을 받는 사람이나, 비 인간적인 행위를 보고 비난하는 사람이나 사실 다를 바가 없다. 좌측이나 우측이나 같다. 위나 아래나 같다. 가운데 입장에서 보면, 모두 치우친 위치일 뿐이다.
 
이해가 가면서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옳다고 느끼면서도 답답하다. 우리는 왜 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일까? 비난을 듣는 사람도 비난하는 사람도 모두 말이다.

 

우리는 좀 더 다른 이들의 삶을 보고 판단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 봐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한계를 명확히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한계를 끝없이 자각해야 한다. 우리는 늘 틀릴 수 있고, 오판도 할 수 있으며, 편견과 오만에 빠질 수 있다. 남들에게 갖는 관심의 10%만 가져도 우리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남들이 단점을 지적하고, 남들의 실수를 비웃을 시간에, 자신의 단점과 실수를 자각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단점과 실수는 웃어 넘기고, 다른 이들의 단점과 실수엔 날카롭게 지적 하길 바란다. 끝없이 자신에게는 자애롭고, 다른 이들에겐 냉정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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