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사이코 패스, 인간

아이루다 2015. 3. 27. 09:54

 
사이코패스, 즉 반사회적 인격장애라고 일컬어지는 병이 있다. 이 증상은 이런 식으로 설명해놓으면 잘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냥 단순히 표현하면, 공감능력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현격하게 떨어져서, 타인이 어떤 상황에 느낄 감정을 잘 예상하지 못함으로써 나타나는 병이다.
 
그리고 이 병이 문제가 되는 상황은 보통 그 감정이 좋은 것이기보다는 좋지 않은 것일 때가 많다. 즉, 타인의 즐거움에 대한 공감이 잘 안 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나, 타인의 슬픔, 아픔, 고통에 대해서 잘 공감하지 못할 때, 그런 태도로 인해 상대는 아주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최근에 사랑하는 아이를 잃고 절망에 빠져 고통스러워 하는 어떤 아이 엄마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그녀를 위로할 의도를 가진 사이코패스가 한 명 있다. 그런데 그는 아이를 위해 그녀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기에, 전혀 다른 시선으로 그녀를 보게 된다. 그래서 사놓은 많은 장난감과 아직 한 번도 입어 보지도 못한 옷을 아깝다고 말하면서, 이것을 중고라도 팔아서 돈이라도 건지라고는 조언을 한다.

 

그런데 이때 이 조언이 비록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맞을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감정은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만약 이런 말을 하면서 돈이라도 건졌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밝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면, 아이의 엄마는 화가 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섬뜩함과 공포스러움으로 인해 이 사람을 다시는 보려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실 사이코패스는 오래된 용어는 아니다. 그것은 최근에 많이 회자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지난 십 수년 간 우리나라에 일어났던 무차별적인 연쇄 살인범들의 심리 검사 결과로 이 사이코패스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이 증상에 대한 인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에게서 폭력적인 행동이 나타날까? 사실 공감능력은 타인의 기쁨, 슬픔, 고통, 즐거운 등의 감정을 자신의 기억을 통해서 간접 경험을 해내는 능력이다. 그래서 타인의 기쁨을 보면 자신도 기뻐하고, 타인의 고통을 보면 자신의 아팠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들이 아프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인데, 단지 왜 이 능력이 결여되었다고 해서 그렇게 폭력적으로 행동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일단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은 왜 공감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이유를 이해할 때,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이 왜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를 위한 첫 걸음으로써, 어떤 사람이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간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상황일 때 이 사람에게 공감능력이라는 것은 사실 아무런 필요도 없고 의미도 없다. 물론 인간은 하늘, 바다, 나무, 물고기 등에도 공감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래 처음부터 혼자 살았고 그래서 공감능력을 발휘하거나 배울 기회가 전혀 없었던 사람이라면, 말 그대로 공감능력이 전혀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래서 그는 거의 사이코패스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배가 고프면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 졸리면 잤을 것이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보면서 감성에 젖거나, 비 오는 날에 빗물을 바라보면서 누군가를 떠올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삶은, 말 그대로 생존만이 유일한 목표일 뿐,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은 필요도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 잡힌 물고기의 눈을 보면서, 그 공포와 고통스러움을 공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불가능한 가정이다.

이 예를 통해서 공감능력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공감능력란 것은 원래 우리 인간이 가진 능력이 아니라,인간이 아주 오랫동안 무리를 지어서 살았던 시대를 거쳐 오면서 얻은 능력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이 공감능력을 꾸준히 발전시킨 덕분에 무리를 지어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 능력이 없이 같이 모여 살게 될 경우, 우리는 타고난 이기심으로 인해서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끝없는 충돌 속에서도 공감능력을 통해 완전히는 아니지만, 타인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됨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처한 상황과 입장을 받아들여서 결국엔 어느 정도 한계를 가진 채 같이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식량을 훔친 사람에게 죽이고 싶을 정도로 화를 내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그 사람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을 듣고 난 후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다른 식량도 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관계가 돈독하다. 아마도 인류에게 있어서 이 공감능력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했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문명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기심으로 인해 언제나 경쟁하고 싸우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감능력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어느 한계선 내에서라면 나름대로 안정된 평화를 유지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 덕분에 지금처럼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해서 우리는 모여 살수록 더 강한 집단 지능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결국 그것이 현대 문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기반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공감능력은 원래 우리가 가진 본질적인 능력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무리를 지어서 생활을 하면서 - 처음엔 가족 단위 정도 - 그 능력이 좀 더 발전되는 방향으로 진화를 해 온 것이다. 이것은 그리고 매우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공감능력이 발달된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무리는 좀 더 안전해지고 좀 더 나아졌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 무리는 좀 더 많은 후손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공감능력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우리는 과거 오래 전 공감능력이 조금이라도 더 발달했던 조상들의 남긴 후손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다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원래 그것을 가진 것이 본능적 영역에 속한 믿게 된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즉, 인간에게 있어서 공감능력이 마치 우리가 먹고 자고 싸는 것처럼 타고난 본질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인식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갖지 못한 것은 이상한 것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식욕이나 수면욕구이나 배설욕구를 가지지 못한 사람을 거의 볼 수 없다. 아니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는 본 적이 없다. 물론 아주 오랫동안 잠을 안 자는 사람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예외로 하고, 아무튼 우리의 생존에 관여된 본능은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다고 스스로 발현이 된다.
 
하지만 공감능력은 우리가 믿는 것과 달리 그리 본능적인 것이 아니다. 즉, 인간이 공감능력을 가져야 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은 아니란 뜻이다. 단지,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람은 앞에서 예를 들었듯, 다른 사람에게 큰 상처를 입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소름 끼치거나 공포스러움을 느끼게 해서 인간관계가 힘들어지고, 그 결과로 인해 사회 생활 자체가 힘들어지는 결과를 낼 뿐이다. 그래서 살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당장 죽는 것은 아닌 것이다. 즉, 결론적으로 공감능력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필수조건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감능력의 본질에 대해서 이해하고 나면 당황스러운 결과가 하나 생긴다. 정말로 공감능력이 우리가 가진 본질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인간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는 인간다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결국 단순한 산술적 논리로써, 인간에게 있어서 사회적인 삶을 위해 필요해서 가지게 된 공감능력을 제거하고 나면, 드러나는 모습이 바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원형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원형 상태를 사이코패스라고 부른다. 그러니 인간이 사이코패스인 것은 어떤 면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모습일 수도 있고, 사실상 우리는 자신은 부정하지만 우리 모두는 어떤 면에서 일종의 사이코패스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이 공감능력의 깊이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것이 아주 깊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있어도 얕은 사람은 사실 사이코패스라고 부를만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악당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런 그가 잘 먹고 잘 살다가 어느날 암에 걸려서 죽게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과연 이 사람의 죽음을 공감하면서 그것의 고통만을 공감하는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보면서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할 뿐, 그의 고통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기뻐할 것이다. 그런데 이때 그 고통을 공감한 사람의 시선에서 다른 이들의 그런 반응은 단지 다수의 의견일 뿐, 사이코패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리고 또한 공감능력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으로 바라 볼 필요도 있다. 왜냐하면 공감능력은 우리가 믿는 것보다 그리 좋은 의도만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공감능력이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선한 의도가 아닌, 우리가 다 같이 잘 살기 위해서 기능성으로 얻은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감능력의 방향성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타인의 많은 감정에 대해서 공감하지만, 사실 즐겁고 행복한 것보다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에 훨씬 더 강하게 교감을 한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타인의 슬픔에 대한 배려나 우리의 타고난 동정심과 같은 좋은 것으로 치장하려고 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기쁨보다 슬픔에 더 많은 공감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기쁨은 질투를 증폭시키지만 슬픔은 상대적 행복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상대가 기쁠 때는 공감은 하지만 속으로는 뭔가 부러움이나 질투와 같은 찜찜한 구석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가 슬플 때 역시도 공감은 하지만 속으로 자신에게는 그 불행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만족감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감을 할 때 훨씬 더 깊어지는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상대가 불행하다고 느끼면 느낄 수록 더욱 더 상대적으로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상대의 감정을 공감하는 것은 맞다. 단지 기쁨에 대한 공감은 질투심으로 인해 온전히 발현되지 못하고, 슬픔에 대한 공감은 행복으로 인해서 훨씬 과도하게 포장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기쁨이나 슬픔을 온전히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럴 수 있으려면, 이미 그 자신이 충분히 행복해서 다른 이들의 행복이 부럽거나 혹은 다른 이들의 불행을 통해 행복함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만을 보고는 자신의 공감능력 역시도 그렇게 순수할 것이라고 믿는다.

 
즉, 이 말은 우리는 공감능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반사회적 인격장애라는 명칭으로 칭하고 사이코패스와 정상을 구분하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들 역시도 누구나 종류는 다를 뿐, 나타나는 현상은 매우 유사한 본질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한다. 그래서 우리는 불행한 상태에 놓이게 되면, 사이코패스처럼 행동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 자신이 불행할수록 타인의 기쁨을 질투하고 타인의 고통을 통해 즐거움을 얻으려고 한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볼 때, 아이를 잃은 엄마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해서 옷을 팔라고 조언하는 사람보다, 겉으로는 같이 슬퍼해주면서 속으로는 그 엄마의 고통을 통해 상대적 행복감을 얻고 있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소름 끼칠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은 마치 먹고 살기 위해서 동물을 사냥하는 사람들과 사냥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사냥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 자신이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 얼만큼 온전히 공감하느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에 대한 질문도 해야 한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슬픔의 표현은 그렇지 않겠지만, 자신도 모르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숨겨진 본질적 감정을 상상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리고 사실 그것을 알까 봐 매우 두렵기도 하다.
 
우리 인간의 공감능력은 오랜 시간을 걸쳐서 발전되어왔기 때문에 이젠 그것을 갖지 못한 것을 병이라고 부를 만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공감 자체가 바로 삶의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나온다는 점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원래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유추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이를 한번도 낳아 본 적이 없는 남자가 여자의 출산의 고통을 아예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같은 경험을 통해서만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고통이 순간을 통해서 당사자의 고통을 유추한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고통을 느낀 경험이 아주 적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 쉬운 예로 아주 부자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하인을 때리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가 제대로 된 공감능력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클까? 그리고 그런 그가 어느 날 문득 그 하인들의 삶이 불쌍하다고 느끼고 그들에게 잘해줄 가능성과 그도 그의 부모처럼 하인을 함부로 대할 가능성 중 어떤 것이 더 높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타고난 사이코패스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사이코패스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타고난 사이코패스보다 차라리 이렇게 만들어진 사이코패스가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사람들의 좀 더 큰 문제점은 기본적으로 공감능력 자체는 타고 났기 때문에, 평소엔 그냥 멀쩡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즉, 사이코패스는 뇌의 특정 기관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병이긴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더라도 후천적으로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서 충분히 만들어 질 수 있는 병이기도 하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단지, 그럴 경우 자신과 이득이 공유되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그렇지 않고,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만 사이코패스적 기질이 나타나는 증상만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이 중요한 공감능력이 없다는 말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이득을 아무런 제약없이 추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남의 아픔을 공감할 수 없으니, 당연히 하고 싶은 것을 허용만 된다면 추구한다. 또한 더해서 보통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상황조차도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못하기에 전쟁터와 같은 곳에서 아주 냉철하게 임무를 수행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이코패스는 결국엔 반드시 폭력적인 존재만은 아니지만, 폭력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들의 행동은 사회적 문제가 되고 만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결국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한 존재라기 보다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로 인해서 선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적인 연쇄 살인범들의 90% 이상이 사이코패스라는 통계치가 있다. 즉, 이들은 인간에게 있어서 공감능력이란 사회적으로 요구된 능력을 제거하고 나면 드러나는 우리의 맨 얼굴이다. 말 그대로 우리는 공감능력으로 인해 우리가 말하는 그 모든 종류의 인간다움의 본질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공감능력을 통해 사랑, 배려, 관심 등의 좋은 개념들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관점으로는 사이코패스를 인간의 가장 최종 단계로 진화된 모습을 보는 시선도 있다. 이것이 좀 황당한 의견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냥 마냥 헛소리로 치부하긴 힘들다. 예를 들어서 상상도 못할 기술 문명을 이룩한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자신에게 그 어떤 고통이 올 가능성도 없고, 죽음조차도 없다면, 과연 우리에게 다른 이들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이 과연 정말로 필요할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도, 아무런 양심적 가책이 없이 오직 즐거움을 위해서만 동물을 죽이고,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고통 정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럴 수 있지만 그것이 일어날 이유조차 없어서 아예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는 사건이라면, 실제로 어떤 문제가 될 수 있겠는가? 사실 사이코패스가 살인을 하지 않았다면, 그걸 이유가 없어서 그랬거나 혹은 법적인 처벌을 받을까 봐 그랬을 것이다.
 
또한 경험해보지 못해서 정확히 말하기는 힘들지만, 사이코패스는 우리 인간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단 하나의 거리낌없이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을 위해서 끝없이 감정을 숨기거나 제어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 그 감정을 완전히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단지 현재는 그런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공감능력으로부터 나타나는 감정 표현은 거의 필수적인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이것은 현재까지의 상황이다. 우리가 미래로 갈수록 사실상 점점 다른 이들을 덜 필요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보다는 기계를 통해 일을 하고 즐거움도 더 얻게 될 것이다. 사실 100년 전 사람들은 요즘 사람들이 사람이 아닌, 기계의 일종인 스마트 폰을 바라보면서 사는 삶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먼 미래가 되면, 실제로 공감능력 자체가 발휘될 기회가 없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이때 공감능력은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데 방해가 되는 불필요한 요소가 될 뿐이다.
 
현재도 게임 속에서 사람을 죽이고, 동물을 죽이는 수 많은 일들을 할 때마다 자책감과 상대의 고통을 공감하는 느낌이 든다면, 과연 그 게임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까? 사실 그 게임을 하는 개개인은 모두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겠지만, 현재도 그런 행위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미래엔 현재의 이런 게임들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나타날 것이지만, 그 게임을 즐기는 우리는 더욱 현실감이 느껴진다고 좋아하면서 지금 게임을 하듯, 사람들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게임이 발전해서 현실과 구분이 안 되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과연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게임 속 세상이 너무 현실 같으니 공감능력을 발휘할까? 아니면, 너무 현실 같으니 더욱 즐거워져서 그 안의 사람들을 재미로 죽이게 될까?
 
아직까지는 공감능력이 필수적으로 느껴지는 우리 인간 사회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공감능력의 필요성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사이코패스라는 낙인을 찍어서 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미래엔 뒤바뀔 수 있다. 아마도 미래의 어느 날엔 다수의 사이코패스들이 소수의 공감능력자를 보면서 그들의 증상을 치료해야 한다고 말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니면 큰 변화 없이 지금처럼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지키면서 살아갈지도 모른다.
 
과연 인류는 어떤 길을 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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