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왜 사는가를 묻는다면, 두 번째 답변

아이루다 2015. 3. 12. 05:19

 
어떤 영화인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미국에서 제작된 어떤 재난 영화였던 것 같은데, 거기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탈출 전 마지막으로 생사의 위기를 맞는다. 말 그대로 운이 좋다면 살 것이고, 운이 없다면 죽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러자 그때 그들은 서로에게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달라고 한다. 물론 모두 죽으면 그조차도 안되겠지만 말이다.
 
이와 비슷한 장면을 연출한 한국 영화도 있다. 잊혀진 북파 공작원의 이야기를 다룬 실미도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온 장면이다. 쌓인 불만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무장한 채 섬으로부터 나온 부대원들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 죽기 직전에 탈취한 버스 안의 벽과 바닥에 각자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모두 폭발시켜 버스와 같이 최후를 맞이한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실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이들의 마지막 행동은 왠지 마음 한 구석을 묵직하게 한다.
 
누가 자신의 존재를 기억해줄지 보장도 되지 않는 순간에 자신의 이름이라도 기억해주길 바라는 사람이나, 누구도 쳐다보지도 않을 불에 탄 버스 안에서 남겨질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이들의 마음은 온전히 같다. 우리는 누구나 기억되고 싶어한다. 그래서 아마도 사람의 죽음 중에서 가장 슬픈 죽음은 바로 어떤 기억도 없이 잊혀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죽은 자를 위해 무덤을 만들고 묘비를 세우는지도 모른다. 죽는 자들에게 살아있는 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이런 기억에 대한 욕구는 왜 생길까? 우리는 왜 잊혀지는 것을 그리도 두려워할까? 우리는 왜 죽은 후에도 언젠가 동일한 죽음을 맞이할 다른 존재들에게 기억되고 싶어할까? 만약에 죽음이 완전한 무의 상태로 돌아간다면, 사후에는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할 것인데 말이다. 또한 그것이 아닌, 천국과 같은 사후세계가 있다면,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죽음의 끝이 마지막이든 새로운 시작이든 상관없이 왜 기억되길 바랄까?
 
이것은  모든 인간의 삶이 어떤 목적을 가길 바라는 이유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우리는 그 존재조차도 모를 산 속의 들짐승처럼 아무런 의미없이 살다가 죽길 바라지 않는다. 우린 누구도 우리 자신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이길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존재의 의미와 필요성을 갖고 싶어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이것에 명시적으로 집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바로, 절대적 존재의 의미를 찾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집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을 뿐,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많은 행동은 바로 존재의 의미, 가치, 필요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나마 우리가 이것이 아닌 순수한 목적의 생존을 위한 행동들은 주로 본능적인 것들뿐이다. 우리는 먹고, 자고, 싸고 할 때만 비로소 의미나 가치를 두지 않는다. 이외의 거의 모든 행위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끝이 없으며 또한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로 충족되지 못하는 욕구를 가진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의 바램과는 달리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삶의 이유나 목적이 존재할 가능성은 무척 희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 글을 통해서 단순하게 설명했었다. 물론 그 가정과 논리들이 틀렸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부정하기가 조금 힘들어 보이긴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기엔 아직 미련이 남는다. 그래서 어떤 해결책이나 혹은 사고의 전환을 통해서 우리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은 원래 의미가 없고,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니 역시나 의미가 없다는 논리는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그 자연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한다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온다. 즉, 이 사고의 전환은 우리 자신을 의미 있게 만들지 못하니, 우리가 속한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그것이 바위이든 나무이든 동물이든 간에 상관없이 모두 각자 만의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사건들은 모두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확장된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능력이 되질 못하는 지도 모른다.
 
오늘 바람이 부는 것도, 우리는 전혀 모르지만 지금 북극에서 북극곰 어미 한 마리가 출산을 하고 있는 것도, 화성에서 탐사 중인 탐사선이 고장 나는 것도, 좀 더 확장해서 저 먼 안드로메다 은하에 있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외계 생명체가 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단지 우리가 그것을 모를 뿐, 모두 어떤 의미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과학적 고찰의 입장에서 보면, 지구 상의 모든 존재들은 별의 후손이다. 우리의 몸을 비롯해서 지구 자체를 이루는 수 많은 원소들은 모두 우주의 탄생과 별이 죽음으로부터 만들어졌다. 이것은 꽤나 신뢰할만한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있다. 화학 수업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우주에 존재하는 백여 개의 기본 원소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그것은 가벼운 수소로부터 무거운 우라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기껏해야 백여 개에 불과하다.
 
그런데 단지 백여 개가 밖에 안 되는 원자들이 다양하게 결합해서 분자를 이루고, 이 분자들이 다시 대규모로 뭉치면서 고분자가 된다. 그래서 생명체의 가장 기본 요소인 아미노산이 된다. 이 아미노산은 생명체를 이루는 몇 가지 필수 요소인 단백질의 원료가 된다.
 
그래서 우리 인간을 분해하고 또 분해하면 우린 모두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원자들의 일부는 우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어서 130억년이 넘은 것도 있을 것이며, 또 다른 일부는 약 50억년 전 이 태양계에서 초 신성 폭발을 일으켰을지도 모를 어떤 거대 항성의 잔재물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몸 자체는 모두 겨우 백 년도 안되었지만,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재료는 우리가 상상도 못할 수준의 나이를 먹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우리는 별의 후손이 되는 셈이며, 그들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 진 존재들이다. 그리고 이 원재료들은 그 동안 별의 일부였다가, 땅의 일부였다가, 물의 일부였다가, 단세포 생명체의 구성 물질이 되었다가, 공룡의 침이 되었다가, 다른 인간의 몸의 일부였다가, 현재 우리 각자 몸의 일부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상 물리적으로 우주의 일부이다. 즉, 우리는 모두가 우주의 자식인 셈이다. 우리는 지구에서 태어나 이 땅 위해서 살기에, 지구와 우주를 구분하지만, 사실 지구와 우주를 구분하는 경계는 매우 불분명하다. 우리는 분명히 지구라는 땅을 딛고 서 있지만, 우리가 숨을 쉬는 머리는 분명히 지구와 떨어져 있다. 이것의 위치가 높아지기만 하면, 그래서 한 몇 천 KM쯤 떨어지면, 그때부터는 그곳을 우주라고 부른다. 하지만 경계는 모호하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지구의 중력으로 잡혀 있는 공기가 존재하는 우주의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엔 단지 우리가 생명을 유지할 만큼의 따뜻함과 호흡이 가능한 산소가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바로 우주인인 셈이다.
 
요즘은 아예 생명 자체가 외계에서 왔을지도 모른다는 학설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혜성이나 운석에 포함된 다량의 아미노산의 존재가 발견됨으로써 발생된 학설이다. 그런데 이것은 마냥 무시할만한 것도 아닌 듯 하다. 우리는 아직도 과거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는 물리적으로 이 거대한 우주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는 이 우주의 존재 이유 속에서 그 의미를 가질 수 있지도 않을까? 물론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우주가 어떤 의도로 존재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학설이 나와있긴 한데,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증명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현재 가장 유력한 학설인 빅뱅의 흔적만을 찾았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우주의 존재 이유를, 현재는 모르니까 없다고 믿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모르니까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단지 부정적 인식과 긍정적 인식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될 듯 하다. 이것은 사실 좀 더 복잡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이미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이미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뭔가 그럴 듯 하기도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비과학적이고 사이비 분위기가 난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이런 특징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하는 상황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긴 하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종교도 사실상 매우 비슷하다. 그래서 우주가 생성된 것과 우리가 그 거대한 것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다양한 형태의 신을 믿는 사람은 모두 같다고 해도 그리 무리한 말은 아니다. 단지 믿는 사람의 숫자가 많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조금 덜 부정적일 뿐이다.
 
그래서 만약 신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 우주가 어떤 미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도 그리 이상한 생각이 아니다. 괜히 그런 주장을 한다고 해서 가서 돈을 건네는 짓만 안 하면 그것을 믿는다고 해서 크게 손해날 것도 없다.
 
외계 문명에 대한 대표적인 지지자였던 유명한 칼 세이건 박사는 스스로 집필한 소설 컨택트를 통해서 이런 대사를 했다. 사실 소설을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책에 나왔는지는 모르겠고, 영화 속에서는 언급이 되었다. 신이 존재하느냐에 대한 질문을 오캄의 면도날을 통해 설명하면서, 자신을 믿게 하고 싶다면 신의 존재를 증명해보라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아버지를 사랑했다면 아버지를 사랑했는지를 증명해보라는 상대방의 말에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리고 이 오캄의 면도날은 외계 문명을 경험하고 난 후, 아무런 증거도 없이 돌아 온 그녀가 청문회에서 공격을 받을 때 다시 인용이 된다. 그리고 이번엔 그녀는 복잡한 해석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설령 증명이 되지 않더라도 자신의 경험한 것을 믿으며, 여러분들도 그것을 경험했으면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한 단 한 명의 남자만 자신을 믿어준다면 된다고 말한다.
 
사실 이 책과 영화 속에서 신이 있는지 여부를 가지고 직접적으로 싸우지는 않는다. 단지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신이란 존재 역시도 우리가 믿는 그런 신들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그냥 우주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참고로 칼 세이건 박사는 원래 유명한 무신론자 중 하나였다.
 
만약 우주 자체가 신이라면, 우주를 부모로 둔 우리 인간들 역시 신의 후손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목적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존재의 이유를 가질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오직 가정이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은 믿음이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며,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것은 아마도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점점 명확해질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누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었으며,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믿음들은 지동설과 지금도 많은 공격을 받는 진화론의 등장으로 많이 부정되고 있다. 그리고 미래로 가면 갈수록 이 믿음은 점점 더 희석화 될 뿐, 결코 원래 우리가 가졌던 입장으로는 되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전체적인 상황이 이렇고, 이것이 변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자연 그 자체는 무의미하니, 우리도 무의미하다는 입장과, 자연 그 자체 역시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들 역시도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이 둘 모두가 각자 해답이 될 수 있다.
 
이 둘 중에서 어떤 해석을 진실로 선택하느냐는 오직 개인의 판단에 달렸다. 물론 아예 관심 없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느 날 우리가 어느 외진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갈 처지에 놓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칼을 꺼내어 나무를 파면서 자신의 이름을 새기게 될 것이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는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믿기 힘들고 환상적인 소설과 같은 이야기와 지극히 현실적인 두 가지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준 주인공은 과연 이 둘 모두 증명이 불가능하다면, 과연 어떤 것을 믿고 싶은지를 물었다. 신이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할 수 없을 수도 있다면 말이다.
 
단지 조금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의 경우엔 특정 종교의 꽤나 심한 신에 대한 강요로 인해, 우리가 신의 이미지를 너무 고정시켰다는 점이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이것을 한쪽에 밀어 놓고서,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신을 바라보는 것도 나름 괜찮은 방법으로 보이긴 한다.
 
우리 우주는 표면적으로 보기엔 우연함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연함으로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 바람이 부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정확히 알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큰 흐름에서 우리는 날씨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당장 자신의 등 뒤에서 부는 바람의 세기를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 있는 시대가 된다면 가능하지도 않을까?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일어난 사건의 이유만 될 뿐, 의미는 되지 못한다. 만약 의미가 있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정보가 필요하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통해 그 의미를 알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마치 이것은 신을 증명하라는 소리와 같다.
 
그래서 이것의 진실을 알기 전, 인류 문명이 먼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기술이 발전해서 더 이상 생존의 본능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것이 좀 더 현실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신의 존재나 우리의 존재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가치를 찾기 보다는 아마도 우리의 생명체로써의 한계를 벗어나는 쪽으로 발전해 나갈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끝없이 이 문제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답을 내긴 힘들겠지만, 각자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임은 있을 것이란 예상도 된다.
 
그리고 지금의 답이 10년 후, 20년 후 답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은 존재적 목적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나중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지금은 존재의 목적이 없는 우연함만이 오직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 목적성을 믿고 신을 믿을 수도 있다. 단, 지금 언급하는 신은 특정 종교의 신은 아니다.
 
신은 필연성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인데, 어떤 신을 믿는지가 태어난 마을과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면, 이것만큼 우연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지구 상에 있는 그 수많은 신들은 모두 하나의 신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 것이거나 혹은 모두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때론 어떤 우연들은 너무도 독특해서 마치 필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는 과정이 그렇고, 부모와 자식이 맺어지는 것도 그렇다. 그래서 아주 단순한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를 필연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우주에서 우연히 온 신호를 해석하면서 벌어지는 내용을 담은 두 편의 영화가 있었다. 그 중 오래 전 개봉한 영화, 컨택트에서 신의 존재를 믿는 목사의 역할로 나온 매튜 매커너티란 배우가 두 번째로 최근 개봉한 상대성 이론을 다룬 영화 인터스텔라의 지극히 과학적인 상식을 믿는 남자 주인공을 맡은 것을 보면 참 재미있는 우연이라는 생각도 든다.
 
분명히 우리는 매일 수 많은 우연을 경험하지만, 과연 그 모든 우연들은 정말로 단지 우연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이 당연히 일어나야 할 필연적인 사건들인지 정말로 궁금하긴 하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그것의 결론을 쉽게 낼 수는 없다. 단지 지금은 모든 관점이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해되기 때문에, 은연 중에 그 모든 것을 필연으로 믿게 되는 상황만 경계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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