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왜 사는가를 묻는다면

아이루다 2015. 3. 10. 15:19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거의 대부분이 목적을 가지고 있다. 또한 우리는 보통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을 왜 하는지에 대해서 남들이 인정해주든 말든 상관없이 자기 나름대로 적절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이유는 바로 우리가 목적으로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계기가 되어 준다.
 
우리는 운동을 한다. 이것은 우리가 건강해지기 위한 목적일수도 있고, 우리가 재미있기 위해서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보통 혼자 매일 꾸준히 하는 것은 재미보다는 건강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고, 여럿이서 모여서 농구나 축구를 하는 이유는 건강보다는 재미를 목적으로 한다. 물론 이 둘 모두 한 단계 더 내려가면 건강을 통해 얻는 행복과 재미를 통해 얻는 행복으로 귀결된다. 즉, 이 둘은 결국엔 행복을 최종 목적으로 하고 있다.
 
사실 인간은 목적 없는 일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사실 본인이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뿐이다. 그리고 그 모든 목적들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자신의 행복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는 정작 가장 중요한 삶에 대해서 목적과 이유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 물론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도 하나의 목적이고 이유가 될 수 있지만, 행복은 삶을 사는데 있어서 바라보는 지향점이지 목적은 될 수 없다. 우리는 행복하길 바라지만, 행복하지 못하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단지 삶을 사는데 있어서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죽을 때는 행복하지 않을 때가 아니라 희망이 없을 때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 인간의 삶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왜 살아야 할까?
 
사실 삶의 목적은 사람마다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이 정말로 우리가 존재해야 할 목적이냐의 여부에 상관없이,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소중한 아이를 위해서, 지켜야 할 가치를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을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산다. 하지만 이 목적들은 이유는 될 수 없다. 우리는 정말로 왜 살아야 할까 에 대한 답으로 쓰기엔 너무 개별적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왜 살아야 할까에 대한 질문은 정말로 오래된, 자기 인식에 대한 본질적 의문이다. 우리가 이성이란 것을 가지고 세상의 이치를 알려고 노력하면서부터 우리는 존재론적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는 이것에 대한 아주 다양한 답이 나와 있다. 그것은 종교를 통해서, 철학을 통해서, 과학을 통해서 대답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왜 사는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누군가 정해 놓은 답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아예 그런 질문조차 던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사는지를 꼭 제대로 알아야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도 나온다. 사실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답을 얻기가 무척 어렵다.
 
이유를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우리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살고 내일도 살 것이다. 또한 그 여정 중에서 단기적 목적이 있고 장기적 목적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점심 식사를 무엇으로 먹을지도 고민하고, 자신의 노후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도 걱정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끝없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걱정한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대부분의 일의 목적은 바로 이런 고민과 걱정을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평생을 그렇게 해도 결국 우리는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죽는 순간, 우리를 평생 괴롭혔던 문제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사람을 수없이 많이 죽인 살인범도 죽는 순간부터는 처벌할 수 없다. 우리가 가진 모든 가치와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괴로움은 오직 살아 있는 순간에만 유효하다. 그리고 당연히 행복도 그렇다.
 
물론 그래서 사후 세계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사후 세계가 있다는 것은 실제로 명확하지는 않다. 사실 사후 세계가 있다면, 우리의 삶은 명확한 목적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천국을 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이것은 아직까지는 증명되지 않은 미완성된 이론이다. 언젠가 천국이 있음이 명확히 증명되는 날이 온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생각해야 한다. 왜 우리는 살아야 하는지, 우리의 삶은 과연 최종적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설령 이 생각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극히 일부라고 해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살아가는 동안 평생에 걸쳐서 생각해봐야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인간 이외의 존재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서 답을 찾지 못하면, 외부의 존재들을 관찰하는 것이 작은 힌트를 줄 수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일단 자연 현상을 바라보자.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눈이 내린다. 그렇게 내린 물은 모여서 시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어 바다로 간다. 분명히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비가 내리는 목적이나 눈이 내리는 목적 같은 것은 없다. 이것은 현상이지만, 목적은 없다. 그렇지만 원인이나 원리는 있다. 이것은 물의 순환이다. 태양에 의한 물의 기화 현상과 높은 고도로 올라가면 응결되는 물방울이 비의 원인이 된다. 빗물이 모여서 바다로 흐르는 것은 중력 현상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다.
 
다음은 다른 생명체를 바라보자. 가을에 맺은 열매는 땅에 떨어진 후, 다음 해 새싹이 되어 자라난다. 이 열매는 태양의 에너지와 땅의 양분으로 미래의 부모의 모습을 향해 매년 자란다. 한해살이 식물들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 동물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로 넘기려고 애쓴다. 그것은 마치 징검다리와 같다. 이것은 어떤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저 무한히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사실 목적이 없다. 이것을 목적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이 부여한 의미일 뿐이다. 우리는 가을에 수확을 하면서 농사의 목적을 이루지만, 식물들 입장에서는 단지 때가 되면 꽃이 피고 또 시간이 흐르면 열매를 맺고 있을 뿐이다. 식물들은 자신이 애써 맺은 씨앗이 앞으로 어떻게 이용될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모든 생명체는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생존하려고 애쓸 뿐이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후손을 남기려고 한다.
 
양계장에서 태어난 닭들을 짧은 생애 동안 알만을 낳다가 결국 닭고기가 되어 죽어갈 뿐이다. 이들 역시도 인간에게만 이유와 목적이 될 뿐이다. 우리는 달걀과 고기를 얻기 위해서 닭을 키우지만, 닭에게는 존재론적 목적과 이유는 아예 없다. 심지어 이 닭들은 후대를 남긴다는 징검다리 역할 조차도 없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인간은 과연 이런 목적이 없는 자연의 일부가 아닌가에 대한 생각이다. 이것은 우리는 우리가 속한 자연과 완전히 분리된 존재이며, 우리 인간만은 유일하게 목적과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 온전히 타당한 질문일까에 대한 의문을 뜻한다.
 
사실 과학은 그렇지 않다고 답을 주고 있다. 우리는 생명체의 한가지 형태이며, 단지 그 중에서 가장 지능이 뛰어난 존재라고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근거로써 우리는 자연계에 속해 있는 모든 생명체와 동일한 원리로 작동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즉, 우리는 유전자를 통해 설계되었으며, 다른 동물과 똑같이 외부의 음식물을 먹고 소화하고 배설하는 작동을 통해서 에너지를 만들고 있다. 또한 남녀 구분 및 성행위를 통해 자녀를 만들고 키우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도 역시 다음 세대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 역시도 자연계의 모든 것들처럼 존재론적 목적이나 이유가 없어야 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 아닐까? 물론 이런 과학적 입장과는 달리, 종교나 철학적 입장은 다르긴 하다. 종교는 우리 인간과 동물을 이미 분리시켰으며, 철학은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으로써 존재론적 목적과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타당한 생각일까? 우리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그 존재의 목적과 이유가 있는 특별한 존재일까? 아니면 우리도 그들처럼 그저 아무런 목적이나 이유가 없이, 태어났으니 살고 자식을 키우며 때가 되면 죽는 그런 평범한 생명체로써의 존재들일까?
 
물론 이것에 대한 답은 쉽게 낼 수 없다. 하지만 인간으로써의 특권을 내려놓고 상식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봤을 때,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다를 이유를 찾는 것은 그리 쉬워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우리가 다른 생명체들과 다르다고 하기보다는, 다른 존재들 역시도 우리가 그것을 정확히 알지 못할 뿐, 그들만의 목적과 이유가 있다고 믿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가 원래 목적이 없는 존재라면 한가지 흥미로운 힌트가 생긴다. 만약에 우리가 아무런 목적이나 이유가 없는 존재라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우리는 더 이상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원래 목적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의 목적과 이유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도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냥 태어났으니 살면 된다.
 
원래 모든 능동적 행동들은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반대로 수동적인 행동은 그것의 이유가 필요가 없다. 즉, 스스로 그 일을 해야 한다고 결정했다면 그것에 대한 납측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만,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을 해야 할 목적이나 이유는 알 필요가 없다. 그냥 시키니까 하는 것이다.
 
이 원리를 삶에 적용시켜서 우리 인간의 삶을 산다고 표현하면, 그것은 원래 목적을 가져야 정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진다고 표현하면 반드시 목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이 말을 다시 표현하면, 우리가 매일 삶을 이어가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우리는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났고 죽기 싫기 때문에 살아지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삶이란 과정을 유지하는 이유가 '사는 것'이 아닌 '죽지 않는 것'이라고 바꿔서 생각하게 되면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난다. 가장 첫 번째로 일어나는 변화는 바로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 해왔던, 우리가 사는 이유를 원래부터 알아야 할 필요 자체가 없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죽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고 할 뿐인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능동적인 입장이라면 사는 목적이나 이유는 찾아야 하지만, 죽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고 하는 수동적인 입장이라면 목적이나 이유가 필요 없다. 살아지기 때문에 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왜 많은 사람들이 왜 사는지에 관심이 없는지에 대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처음에도 말했듯, 우리의 모든 행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능동적 행위가 아니라 수동적이라면 원래부터 그것에 대해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비누나 치약 하나 사는 것에도 이유와 목적을 따지는 보통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는 가장 중요해야 할 질문인 삶의 목적과 이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리고 인류가 그 동안 삶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 역시도 이해가 간다. 당연히 원래 처음부터 하면 안 되는 질문을 한 것이다. 우리는 최초에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냥 태어났기에 살아갈 뿐이다. 우리는 좀 더 잘 살기 위해서 두뇌를 발달시켰는데, 그 두뇌가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될 질문을 떠올린 것이다. 이것은 마치 존재의 이유를 찾고 있는 로봇의 모습과 같다.
 
사실 이 생각의 전환은 우리가 존재하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모든 인간은 어느 누구도 태어나고자 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의 탄생 자체가 수동적이다. 우리는 모두 부모로부터 만들어 진 것이지, 부모를 통해 스스로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태어난 인간은 또한 자신의 의지와 반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즉, 우리에게 삶의 시작과 끝은 전혀 의지적이지 못하다. 설령 자살을 하는 사람들도 역시 완전히 죽음을 의지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도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죽음을 택한 것뿐이다. 즉, 죽음이 삶보다 더 낫기에 선택한 것이다.
 
인간인 우리는 누구도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두려움이다. 아니,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은 최고의 나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은 바로 죽음이 사는 것보다 낫거나, 혹은 더 이상 사는 것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일 때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한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우린 왜 살아가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삶의 목적이나 이유가 아닌, 왜 우리는 죽지 않으려고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질문이다. 물론 생명체가 죽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타고난 본능이다. 그래서 이것의 이유를 알려고 하는 것은 마치 왜 중력이 서로 끌어당기는지를 알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을 생각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린 누구나 죽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하기 때문에 죽지 않아야 할까?
 
사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듯, 죽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다. 단지 이 질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삶이란 과정에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암시해준다. 그래서 결국 삶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즉, 우리는 삶이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그래서 산다는 것에 대한 그 어떤 가치를 부여해서도 안되며, 그래서 살아갈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해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목표를 위해 살아갈 필요는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좀 웃긴 말이긴 하다. 죽지 않기 위해서 살면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없다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그 어떤 절대적 진리는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사람마다 상대적 가치는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을 위해, 행복을 위해, 가족을 위해, 신념을 위해, 나라를 위해, 인류를 위해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오직 상대적일 뿐이다.
 
그리고 이 상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단지 우리가 착각하게 되는 것은 이런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우리가 마치 어떤 절대적 진리를 추구한다고 믿게 되는 현상만 조심하면 된다. 즉, 우리가 능동적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사는 목적이 있으며, 사는 이유가 있다고 믿지만 않으면 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다면 누구나 원하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많은 고통은 바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해서 생겨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 받지 못해서 나타난다. 또한 자신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어서 일어난다. 이런 것들이 원래 없다면 우리 마음 속에서 혼란이나 갈등과 고통이 일어날 수가 없다. 바위가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고민할 필요가 없듯 말이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은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될 수 있다. 물론 무척 힘든 일이지만, 이것을 위해 평생을 훈련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모두 그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이것이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만의 행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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