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로써의 나

아이루다 2015. 5. 21. 07:31

 
내가 생각할 때 인간의 의식이란 건 말이야, 진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착오였어.
불필요한 지경까지 스스로를 의식하게 된 거 말이야.
자연이 자신으로부터 고립된 본성을 인간에게 심어주다니, 자연적 법칙에 의거해 볼 때 인간이란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될 피조물인 셈이지.
우린 지금 망상에 휘둘리며 뺑이 치고 있는 거라고.
우리에게 자아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오감에 의한 경험과 감정의 막으로 겹겹이 쌓이는 과정을 겪다 보면 우리 각자가 중요한 존재라는 철저한 믿음에 이르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거든.
허나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철저하게 무의미한 존재거든.
인간이 택할 수 있는 명예로운 선택이 있다면 각자에게 심어진 프로그램을 거부하고 생식 과정을 중단하고 손에 손잡고 멸종 과정으로 걸어 들어가 마지막 날 한 밤중에 형제 자매 모두 모여 자연의 불공정한 대우로부터 벗어나는 선택을 하는 거야.

 
이 내용은 우연히 보게 된, 트루 디텍티브라는 미드에서 나오는 장면 중 주인공인 러스트 콜이 (매튜 매커너티 분) 차 안에서 자신의 동료와 대화를 나누는 중 흘린 듯 내뱉는 대사이다.
 
사실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 대사를 보면서 속으로 조금 놀랐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의식에 대한 정의와 너무도 유사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인간의 의식을 과도하게 발달한 두뇌 능력이 갖게 된 우연하고 어떤 면에서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여긴다.
 
사실 의식이 없다면, 즉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와 같은 답도 내기 힘들고, 답이 라고 알려진 것들을 수긍하기도 힘든 질문들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 인간은 이런 것 없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자신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안다고 해봐야 행복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심지어 방해만 된다. 괜히 회의적 사고를 하게 되고, 즐겁고 행복하게만 살아도 되는데, 꼭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게 된다. 그래서 현재 행복하면 그것에 만족하고 살면 되는데, 자꾸 뒤돌아 서서 이것이 제대로 된 삶인지를 고민하기 때문에, 현재 느낄 수 있는 행복마저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번 머리 속에 침투한, 이 생각들을 떨치지 못한다. 그래서 앞의 대사에는 이것을 망상에 휘둘리고 있다고 표현했다. 또한 이것을 자연으로부터 고립된 본성이라고도 했다.
 
또한 우리가 가진 자아에 대한 동작 원리와 그것의 한계점도 무척 명확하게 표현했는데, 그것이 누구나 자신이 최고 이길 바라고, 영향력 있길 바라고, 가치 있길 바래서, 결국엔 중요한 존재임이 증명되길 바란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한계는 너무도 명백하게도, 우리는 철저하게 무의미한 존재라는 것 역시도 많은 공감이 된다.
 
이 내용들은 모두 객관적으로 타당한 주장이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무의미한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주관적인 입장으로 돌아서면, 사실 이런 객관적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는 내일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잠을 잘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내일 또 출근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 퇴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기 때문에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살 필요가 없지는 않다. 우리는 죽든, 의미가 없든, 살 수 있다. 그것도 아주 행복하게 말이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외부에서 그 의미를 인정 받기도 한다. 종교가 가진 가장 큰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적어도 어떤 종교를 선택해서 그것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그것이 착각이든 아니든, 의미를 부여 받은 셈이 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는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없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가 철저하게 무의미하다고 해서, 우리가 달라질 것은 없다. 또한 우리는 그 의미를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내면 된다. 우리는 그래서 가정을 꾸리고, 친구와 사귀고, 사랑을 하고 우정을 나눈다. 자신이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고, 의미 있다고 믿는 일을 하며, 그 무엇보다도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평생에 걸쳐 해 나간다.
 
물론 안 되는 경우도 많다. 하고 싶으나 이루지 못해서 결국 욕망으로만 남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이렇게 실현되지 못한 욕망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향해 달려 나간다. 사실 이것이 인생이다.
 
단지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이 찾은 주관적인 의미를 다른 이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를, 가치를, 의미를, 신념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객관적 사실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모든 의미는 오직 개인의 입장에서만 가치가 있다. 삶은 소중하지만, 내 삶이 소중할 뿐이다. 내 삶이 소중하기에 내 삶과 연관된 사람들의 삶도 소중해진다. 우리는 자신에게 적이 되어 자신의 삶을 망치려는 사람의 삶은 전혀 소중하지 않다. 우리는 심지어 그들을 죽인다.
 
가족은 소중하지만, 그 가족은 내 가족일 때만 소중하다. 친구와 나누는 우정도 마찬가지다. 신념이나 믿음, 종교 역시도 마찬가지다. 모든 가치는 개인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외부로 나타나는 순간, 그것은 잘못된 적용이 된다.
 
물론 그런 가치들이 공유될 수는 있다. 즉, 내가 느끼는 가치를 같이 느끼는 사람은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생명이 소중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공감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명이 소중해도 결국 내 생명이 소중하다는 점은 달라질 것이 없다.
 
사실, 저 미드에서 주인공인 러스트 콜이 저런 대사를 한 이유는 아마도 그가 교통사고로 잃은 어린 딸과 헤어진 아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삶을 철저하게 무관심하게 보려고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경험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는 객관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역시 주관적 가치를 갖고 싶어 할 것이다. 단지 그 대상이 이미 멀리 떠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 것이다.
 
어떤 누군가에게 삶은 아주 비정한 것일 수 있다. 도대체 왜 살아야 할지조차 모를 만큼 비정하다. 그래서 그럴 때는 인간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다. 우리는 원래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행복해질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자기 위로일 뿐이다. 원래 의미가 없었는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해봐야 소용도 없고, 의미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봐야 욕만 들을 뿐이다.
 
실제로 저 장면에서 러스트 콜의 이야기를 들은 그의 동료 경찰은, 당장 입을 다물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차를 침묵의 공간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처음부터 의미 없는 것은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서 객관적으로 의미 있을 수는 없다. 모든 의미는 주관적으로만 부여될 뿐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그렇게 해서 의미를 가질 수만 있다면, 괜히 우리가 의미 없다고 주장하면서 심통이나 부리다가 다른 이들에게 욕이나 먹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이 세상을 살아갔던 그 수 많은 철학자들의 쓸쓸한 뒷모습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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