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우리는 가치 있는가?

아이루다 2015. 6. 22. 10:00

 
얼마 전, 우연히 다큐멘터리 한편을 보게 되었다. 그 다큐의 제목은 '바람의 혼, 참 매' 였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무튼 이 다큐는 제목처럼 우리나라에 서식 중인 매의 한 종인, 참 매의 삶을 다룬 다큐였는데, 보는 내내 그 강하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매의 매력에 흠뻑 빠져 들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다큐는 주로 둥지를 만들고 알을 품으며 새끼를 키우는 과정 중에서 찍힌 다양한 장면 위주로 구성이 되어 있었는데, 그 기간만 세 달을 훌쩍 넘는 듯 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알을 품고, 새끼를 먹이기 위해 노력하는 부모 매의 헌신적인 노력은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거의 한 달 이상을 알을 품기 위해서 먹이를 먹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둥지 위에서 알을 보호하고, 알을 따뜻하게 해주는 매의 변함없는 행동과 새끼들이 부화를 하고 난 후, 쉼 없이 먹이를 잡아서 둥지에서 찢어 먹이는 모습이 마음 속 깊이 와 닫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계에서 이런 부모의 헌신적인 모습은 참 많은 동물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고등 생명체로 분류되는 포유류의 자식에 대한 헌신적이고 무모한 듯 하기까지 여겨지는 행동들은 같은 공간과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참 매와 같은 새이지만, 또 다른 새가 있다. 그런데 그 새는 지구 상에서 가장 혹독한 환경을 가진 남극에 산다. 사실 남극은 지구 상에서 어떤 면에서는 완전히 단절된 세계이다. 그리고 눈으로 덮힌 그 춥고 황량한 세계엔 단지 몇 종류의 생명체만이 적응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 중에서 펭귄은 날지 못하는 새로써, 그 귀여운 외모와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동물이기도 하다.
 
특히 가장 큰 몸을 자랑하는 황제 펭귄은 특유의 노란색 띠와 큰 몸짓, 그리고 아주 특이한 자식을 키우는 방법으로 인해서 큰 관심을 받고 있는 동물이다. 그들은 몇달 간 밤만 지속되는 남극의 엄청난 추위 속에서 서로 옹기종기 모여 다리 사이로 알을 품고, 부화를 시키며, 새끼가 태어나면 자신이 먹었던 먹이를 게워내어 새끼들을 먹인다.
 
영하 50도를 넘어가는 강 추위와 칠흑 같은 어둠만이 지속되는 남극의 겨울을 그렇게 나는 것이다. 그리고 봄이 되면, 어미가 배속에 물고기를 잔뜩 머금고는 와서 임무 교대를 한다. 그리고 그때 긴 겨울의 임무를 완수한 아비는 새끼를 조심스럽게 어미에게 인도하고는 바다를 향한 먼 길을 떠난다.
 
사실 이 내용 역시도 다큐를 통해 본 내용이긴 한데, 화면이란 것이 어떤 의도로 찍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될 수 밖에 없기에, 이 다큐들로 인해 얻는 감동은 어떤 면에서는 촬영자의 의도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직접 그 장면을 눈 앞에 볼 때도 비슷한 감동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 역시도 우리 각자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과 그것을 통한 판단이 가져오는 개별적인 감정이입일 뿐일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인간의 입장을 매나 펭귄의 모습에 투영한 후, 과연 우리도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그것이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도 모르게 부모의 본능적 사랑에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보면, 불현듯 이런 생각도 든다. 특히 황제 펭귄의 경우가 더욱 더 그런 느낌을 주는데, 그 존재들이 그 험난한 남극 대륙에서 키우고 살면서 새끼를 키우는 과정은 감동스럽지만, 과연 그래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펭귄 한 세대만 보면, 정말로 힘들게 자식을 키워낸다. 그것도 매년 그것을 반복해서 끝없이 자신의 후손을 키운다. 그리고 또한 힘들게 자라난 다음 세대는 또다시 자신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반복적으로 새끼를 키울 것이다. 사실 이것은 과거로부터 몇 천 세대, 몇 만 세대를 거쳐서 반복되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반복되었는지조차 모르겠다. 또한 미래를 향해 얼마나 반복될 지도 모르겠다.
 
만약 인간이 남극 대륙을 탐험하지 못해서, 우리가 그들 존재를 몰랐다면 - 사실 대부분의 시간일 것이다 - 그들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반복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예를 들자면, 지금도 지구 상 어딘가 인간이 전혀 가보지 못한 깊은 동굴 속에서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들게 생긴 존재들이 황제 펭귄이 끝없이 세대를 교체하듯,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이런 삶의 반복성을 우리 인간의 행동으로 표현하자면, 해변에서 모래를 이용해 멋진 성을 만들었는데, 바닷물이 들어와서 없애고, 다시 바닷물이 빠진 후 똑 같은 성을 짓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것을 매일 평생 동안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모래성을 짓는 수고와 그 결과물을 보는 순간엔 깊은 감동을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과연 이 모래성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것도 그 모래성을 만드는 당사자 이외에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말이다.
 
그나마 성장하면 떠나서 부모와 완전히 독립된 개체로 살아가게 되는 동물들과는 다르게 인간은 자식을 낳은 후 키워서 죽을 때까지 그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간다. 물론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일 경우, 인간처럼 그 관계가 유지되는 경우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동물들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인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사실 인간의 관계가 동물의 관계와 달리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까닭은 단지 본능적인 이유는 아니다. 우리는 좀 더 지적이고, 좀 더 계산적이라서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 관계를 이룸으로써 많은 좋은 이득을 얻는다. 우리는 좀 더 안전해지고, 신뢰할 수 있는 존재를 얻음으로써 많은 불행에 대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간은 동물의 생과 사의 흐름과는 다르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황제 펭귄은 알을 낳고, 부화를 시키고, 먹이고, 키우고 결국 독립을 시킨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매년 새끼를 키워내다가 시간이 되면 죽는다. 그리고 그렇게 매년 태어난 새끼들은 부모가 했던 것을 무한 반복한다. 이것은 사실 어떤 면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그냥 시간만 지속적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인간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우리는 그들과 달리 새끼를 그렇게 많이 낳지도 않으며, 소수의 자식을 키워내고 평생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사실 우리 인간은 단지 새끼를 키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천륜이라고 부르는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이런 이유가 우리는 참 매나 황제 펭귄과는 다른 존재라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슬프게도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좀 더 오랜 시간 동안 새끼를 키우는 과정이 유지되는 것뿐이란 뜻이다. 사실 우리 인간은 놀랍게도 평생에 걸쳐 자식과의 유지되고, 자식의 자식, 즉 손자나 그 손자의 자식인 증손자까지도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잘해봐야 4세대가 될 뿐이다. 뭐 특별한 노력을 하면 5세대까지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10세대라고 해도, 20세대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의 모든 관계는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잠시 동안은 우리를 기억하는 후손들이 있겠지만, 그들조차 죽고 나면 우리를 기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누구도 자신의 천 세대 전 조상이나 만 세대 전 조상을 기억하지도, 알지도 못한다.
 
그래 봐야 삼천 년, 삼만 년 전 시간을 뿐이데 말이다. 이 지구에 생명체가 탄생한 후 흐른 시간의 길이에 비교하면 이 시간은 정말로 너무도 적은 시간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반론으로 이런 주장도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나 부처, 예수와 같은 인물들은 몇 천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잘 알고 있지 않냐고 말이다. 즉, 인류사에 큰 흔적을 남긴 인물들이라면, 시간을 초월해서 기록을 통해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된다.
 
하지만 어느 날 커다란 운석이 지구와 충돌해서 우리 문명이 한 순간 무너지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살아남은 후 몇 백 년이 지나면, 과연 누가 그들을 기억하겠는가? 아니 어떻게라도 기억을 해서 기록에 남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그들조차도 결국엔 살아남지 못하고 멸종을 해버리게 된다면 우리의 존재에 대한 기억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물론 지구 표면엔 인간 문명의 흔적이 한 동안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예 지구가 파괴되어 산산조각이 나고 나서 이 우주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지고 만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들이 존재했다는 흔적이 될 수 있을까? 태양계를 벗어나 오랜 시간을 떠돌아 다닐, 보이저 호인가? 아니면 화성에 착륙해서 임무를 수행하다 멈춘 탐사 로봇들의 잔해인가?
 
그런데 만약 이런 전체적인 흐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가장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인지에 대한 해답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느끼는 의미와 가치가 과연 무엇으로부터 만들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제대로 되고 정확하며 고유한 해답을 낼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가 철석같이 믿는 것처럼 역사나 기억을 통해 생성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인간의 모든 믿음과 가치는 바로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믿음과 가치를 봐주는 다른 존재들이 있기에 그것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즉, 우리는 서로가 같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의미 있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 사는 존재는 그 어떤 가치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내 아이가 가치 있는 이유는, 내가 아이를 바라보고, 아내나 남편이 그것을 인정해주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친구가 인정해주고,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주기 때문에 가치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홀로 가치 있어질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단순한 진리를 까마득히 잊고 산다. 왜냐하면 그 믿음과 가치에 이미 너무 큰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할까?
 
답은 단순하다. 왜냐하면 믿음과 가치에 대한 신뢰가 크면 클수록 우리는 그것을 통해 얻는 의미와 행복이 커지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의 가치가 절대적이 되면 될수록 좀 더 확실하게 삶의 목적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참 다양한 사건을 겪으면서 끝없이 흔들릴 수 있는 우리 인간의 삶의 중요한 중심 축이 되어 준다. 즉, 우리는 확신이 있을수록 덜 흔들리면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종교적 믿음이나 혹은 신념 등을 가지고 살길 바란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진리가 있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것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고 결국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만약 사후 세계를 절대적으로 믿고,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인 사람에게 있어서 인간에 가장 큰 공포가 되는 죽음 그 자체는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질 않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의 공포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최고의 축복이며 행복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과 추구하는 가치가 의심 없이 절대화 되길 바란다. 그리고 인간에게 이로운 것들이라면, 그 자체가 매우 가치 있은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래서 끝없이 인류애를 추구하고, 인간에게 이로운 것들을 발명한 사람들을 칭송한다. 또한 그들이 알아낸 지식과 지혜를 진심으로 찬양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실은 이미 앞에서 말했듯, 서로 바라봐 주기 때문에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인류사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상대성 이론 조차도 그 이론을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다면, 그냥 단 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만 머물다 잊혀진 생각일 뿐이다.
 
종교 역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이 설교한 내용도 그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냥 깊은 동굴에서 머물다 사라질 언어가 될 뿐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의미와 가치는 바로 인간이 관계를 맺기 때문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참 매를 보고, 펭귄을 보면서 감동을 느낄지 모르지만, 사실 그들은 그냥 본능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생애 동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살아가다 죽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후손을 남기는 일이다.
 
우리 인간들 역시도 비슷한 일을 한다. 하지만 냉정한 눈으로 보면, 우리들 역시도 단지 인간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는 중간 전달자의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모든 생명체의 공통된 역할이다. 그래서 사실 이것은 그 어떤 의미 있는 목적이 있을 수 없다.
 
그런 행동의 단 하나의 목적은 바로 이 지구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존재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 내는 것뿐이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생명의 개수 이상의 숫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인간조차도 능력만 된다면 20명 이상의 자녀를 남길 수 있다. 우리는 단지 그렇게 살길 바라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동물과 다르다고 우겨도, 사실 우리는 매와 펭귄 기타 수 많은 생명체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그들과는 달리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싶어할 뿐이다. 그래야 우리가 좀 더 행복할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만약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유전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스쳐가는 경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자신의 삶이 하찮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겠는가?
 
만약 오늘 힘들게 공부를 하고, 일을 하고, 연구를 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이 사실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수백 만년 동안 수 천만 세대를 걸쳐서 새끼를 키우고 있는 황제 펭귄의 그 행동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말이다.
 
물론 우리는 살기 위해서 행복해야 하긴 하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그것이 설령 심각한 착각이라고 해도 금칠을 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고 사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단지 여기에서 문제는, 우리 인간은 그 커다란 착각을 너무 오랜 시간 동안 해와서, 이제는 그것을 스스로 너무 강하게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구상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사실상 모든 것을 인간 위주로만 바라보는 좁은 시야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태도는 인간의 탐욕과 서로 맞물리면서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 걱정하는 생태계 파괴, 멸종, 지구 온난화, 환경 오염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것을 걱정하는 이유조차도 우리 인간의 미래가 불투명해지기 때문일 뿐, 정말로 자연을 걱정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이 좀 더 번성하길 바라기 때문에 지구의 환경을 걱정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진정으로 이 지구를 걱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정말로 지구를 위한다면, 인간만큼 먼저 제거되어야 할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퀴벌레나 쥐보다 훨씬 해로운 존재들이다. 사실 현재 인간의 생태 파괴로 인해서 매년 멸종하는 종들의 숫자가 거의 대 멸종의 시대와 맞먹는다는 연구결과가 나올 지경이다.
 
냉정히 말해서 지난 40억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간만큼 지구의 생태계를 파괴시킨 존재가 없었다. 있다고 해도 그것은 운 없이 떨어진 거대 운석이나, 거대한 화산 폭발, 빙하기 등의 자연 현상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주장하는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지구의 생태계를 위해서라면 즉시 박멸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런 생각을 옳은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나마 인간이 이 지구에 이로운 일을 할 때라면, 우리가 좀 더 기술 문명을 발달시켜서 우주로부터 오는 다양하고 심각한 위기로부터 지구를 보호하는 일 정도가 될 것이다. 그것도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구에 사는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결코 혼자서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은 단지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작은 바이러스부터 거대한 코끼리나 메타세콰이어 나무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사실상 자연에 기생하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행복을 위해서 인간 프라이드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우리는 사실 그들로부터 무한대의 이로움을 제공받고 있는 그런 존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겸손해져야 한다. 착각은 하되, 그것이 착각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단 한차례도 다른 존재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 볼 수 없다.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정말로 어이없는 착각일 뿐이다.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 분류  (0) 2015.07.03
가치 대안  (0) 2015.06.26
죽음의 두려움  (0) 2015.06.05
영원  (0) 2015.06.01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로써의 나  (0) 2015.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