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인간 불일치

아이루다 2015. 6. 13. 07:27

 
오래된 영화라서 가물가물 하긴 한데, 꽤나 예전에 '너에게 나를 보낸다' 라는 영화가 개봉된 적이 있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장선우란 분이었고, 당시 영화 덕분에 엉덩이가 예쁜 여자로 꽤나 유명해졌던 신인 여배우의 이름은 정선경이란 분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포르노그라피라는 명목으로 꽤나 우리 사회에 큰 이슈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이 영화에는 남자 배우로써 문성근씨가 나왔었다. 당시 나는 사실 영화계 쪽엔 거의 문외한 이어서, 그가 누군지도 몰랐고, 단지 남자의 본능으로써 이 영화가 야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화관에 가서 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 영화 속에서 나의 기억에 남는 장면은 딱 하나뿐이다. 사실 그 기억이 정확히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바로 어떤 이유로 숨어 살던 문성근씨가 정선경씨와 만나서 섹스를 하게 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문성근씨는 섹스를 하는 도중에 ‘독재타도’를 외친다.
 
이때 이 두 사람이 취한 자세는 바로 후배위였다. 즉, 여자는 앞에서 엎드리고, 남자는 뒤에서 하는 자세였는데, 그 자세로 섹스를 하면서 남자가 독재타도를 외치는 장면은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도대체 감독은 왜 이 장면을 영화에 넣었을까? 아니, 왜 그 장면에 왜 남자에게 독재타도를 외치게 했을까?
 
사실 이런 느낌을 주는 영화 속 장면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홍상수 감독이 만든, 생활의 발견이란 영화이다. 이 영화 속에서 홍감독의 영화가 늘 그렇듯, 찌질한 주인공을 맡았던 김상경씨는 우연히 만난 추상미씨와 여관에서 섹스를 하다가 이렇게 저렇게 자세를 바꾸면서 그녀에게 어떤 자세가 더 좋으냐고 묻는다.
 
사실 이 두 영화는 전혀 연관성이 없지만, 이상하게도 내 입장에서 이 두 장면은 묘하게 겹쳐진다. 그것은 딱히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설명을 해야 한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많은 남자들은 입만 열면 정치, 철학, 사회정의를 떠들지만, 사실 자신이 꾸린 가족과 자신의 아내에 대한 의리조차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들은 가끔 술집에 가서 여자를 만나기도 하고, 노래방에 가서 도우미를 불러 놀다가 2차를 나가기도 한다. 또한 대놓고 돈을 주고 성 매매를 하곤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접하면, 남자의 허리 아래 일은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마치 과거에 선비들이 본처를 두고 첩을 들이던 합리화와 완전히 유사하다. 그 선비들은 입으로는 공자왈 맹자왈을 말하며 도덕적 삶에 대한 가치를 외치면서도, 언제라도 예쁜 노비를 보게 되면 치마를 벗기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분노하는 여자들에게 질투심이란 누명을 씌우고는 칠거지악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여자 밝힘증을 합리화 했다.
 
물론 모든 남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대다수도 아니다. 하지만 꽤나 많은 남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본 누군가는 어이없어 하면서 이렇게 말을 한다. 입으로는 형이상학적인 말만 내 뱉지만, 사실 행동으로는 허리하학적 행동만 한다고 말이다.
 
우연하게도 너에게 나를 보낸다 에서 문성근씨가 맡은 배역이나 생활의 발견에서 김상경씨가 맡은 배역은 모두 직업이 작가였다. 사실 그들이 이름난 작가이든, 아니면 뜨내기 작가이든 상관없이 보통 작가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지식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은 사실 그들이 배우고 말하는 것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즉, 말은 청산유수지만, 행동은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한 명은 섹스 중 뜬금없이 독재 타도를 외치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이 여자를 만족시키지 못할까 봐 끝없이 자세를 바꾸면서 만족 여부를 묻는다.
 
아마도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난 이 두 가지 장면의 연상 작용은 그렇게 시작된 듯 하다. 사실 나도 정확히 나의 연상 작용 원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참 많은 말을 한다. 그리고 그 많은 말들 중에서 또한 많은 내용이 다른 이들에 대한 비난으로 채워진다. 즉, 우리는 살면서 다른 이들의 행동과 말에 대해 꽤나 많은 비난과 비판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나 비판적 입장을 보일까?
 
사실 우리는 남보다 자신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결국 그들의 행동이나 말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추측을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는 진실을 보려는 의지와 용기만 있다면 추측이 아닌, 어느 정도 정확한 상황 까지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우리들 개개인은 모두는 특별한 존재들이 아니다. 그래서 남들이 가진 장점을 가지고도 있고, 남들이 가진 단점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가 비난하거나 흉보는 그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도 모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섹스를 하는 동안에도 독재타도를 외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아무리 단순한 본능적 욕구에 휩싸여 있어도, 머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것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믿는다.
 
사실 문성근씨의 모습은 과거와 현 시점에 정치를 하고 있는 그 수 많은 정치인들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들은 독재타도 대신, 나라, 국익, 민족 등을 대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냥 자신의 권력과 이득을 위해서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을 입에서는 늘 국민을 위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들뿐이겠는가? 일반 사람들인 우리 역시도 완전히 똑같다. 우리는 단지 그들보다 국민이나 나라를 좀 덜 들먹이는 것뿐이다. 우리는 그것 대신 남들이 인정할만한 것을 대입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를 자신의 대리 인생으로 키우려고 하면서 사랑이라고 말하고, 상대를 질투해서 하는 말을 조언이라고 표현할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정치인이나 친구의 조언을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합리화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는 생각 습관 때문이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음으로써,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본질적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기 때문에 상대의 의도 역시도 제대로 볼 줄 모른다.
 
이것은 자신이 늘 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인식을 하지 못하니, 상대가 하는 말 역시도 합리화의 일종임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대의를 표방하면서 그럴 듯 하게 포장해서 말하는 정치인이나, 조언이라고 포장된 친구의 말을 의심 없이 좋은 의도로 말하고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인간에 대해 알게 되면, 누구도 그런 말을 사심 없이 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실 정말로 드물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끝없이 자기 합리화에 따른 결론을 남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착각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꽤나 엄중히 바라보는 법을 익혀야 한다. 우리의 내부에 있는 자아는 매우 교묘하며 아주 쉽게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를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늘 진리나 사실을 근거로 삼아 자신을 합리화하고, 남을 비난한다. 하지만 의심 없이 믿는 그 진리와 사실들은 언제든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수 있다. 자기 합리화는 너무도 오래된 우리들 인간의 특징이며 또한 그 어떤 능력보다도 탁월한 능력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합리화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필요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 어떤 능력보다도 자기 합리화 능력을 개발해 왔다. 그러니 그 능력이 탁월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합리화 자체가 합리화 될 수는 없다. 그것은 필요하다고 해서 정당화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멀고 살기 위해서 다른 존재의 삶을 뺏는 것과 같다. 우리가 다른 동물과 식물을 먹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정당하다고 우길 수는 없다.
 
하지만 사실 자기 합리화가 가진 문제를 스스로 깨닫는 것은 무척 힘들다. 왜냐하면 합리화를 하는 것이, 하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 인간은 늘 행복 하려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의 동작 원리이다.
 
그래서 합리화를 인식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이것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깊은 사고일 수도 있고, 혼자만의 시간일 수도 있다. 아무튼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세상과 조금은 단절시킨 장소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장소는 꽤나 많다. 잠들기 전에 우리는 그런 상태가 된다. 화장실에 갔을 때도 그렇다. 물론 사람은 좀 있지만, 대중 교통을 이용할 때도 혼자 있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혼자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많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시간을 다른 용도로 쓴다.
 
물론 늘 그런 생각만 했다간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으니, 가끔은 기분 전환도 해야 할 듯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 대한 성찰을 아예 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실 무의식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합리화는 삶의 행복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행위이니, 딱히 이것을 하지 않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내린 대부분의 결론이 결국엔 자기 합리화에 의한 내려진 것들이란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만 되어도 우리는 꽤나 자신의 생각에 대해 겸손해질 수 있다.
 
겸손함은 남들의 칭찬에 '아니에요, 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다른 이들에게 잘난 척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일 뿐이다. 진정한 겸손함은 바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바라 볼 때 나타난다. 그리고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만 제대로 바라볼 줄 안다면, 그때 자신의 진짜 모습의 절반 이상은 보게 된다. 그래서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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