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공포를 대하는 법

아이루다 2015. 6. 12. 06:49

 
타조라는 새가 있다. 아마도 새 중에서 펭귄을 제외하면 가장 덩치가 클 듯 하고, 상대적으로 느린 펭귄과 달리 시속 60km 정도로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빠른 새이다. 하지만 이 새는 펭귄처럼 날지 못한다는, 조류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을 포기한 새이기도 하다.
 
타조는 날지 못하기에, 다른 새처럼 적이 다가오면 (사실 다가올 적도 별로 없을 듯 하지만) 날아서 도망가지 못하고,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그래서 타조는 위협을 느끼면 머리를 지면 근처에 대고는 각종 정보를 알아보는 듯한 행동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모습을 오해한 사람들은, 타조는 적이 나타나면 모래 속에 머리를 파 묻고는 자신이 상대가 안보이니, 상대도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여겼나 보다. 그래서 이런 오해로 인해 타조라는 새는 멍청함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뿐만이 아니다. 이 타조의 오해로 인해서 조류 전체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동물로 취급되고 마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그래서 요즘도 닭 대가리라는 말은 멍청하다는 말과 동등한 의미를 갖고 있다. 자매 품으로 새대가리도 있다. 하지만 사실 새 중에서는 까마귀처럼 엄청 똑똑한 새도 있다.
 
까마귀나 타조에 대한 진실은 뭐 각자 또 알아보도록 하고, 여기에서 멍청함이 상징이 된, 내가 상대가 보이질 않으면, 상대도 내가 보이지 않을 것이란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인간의 입장에서 언뜻 생각하면 이 모습은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으로 보이지만, 놀랍게도 우리 인간들 역시도 평소에 스스럼 없이 이런 행동을 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아주 흔한 예가 요즘 자주 벌어지고 있다. 최근 메르스라는 전염병이 돌자, 사람들이 마스크를 끼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마스크를 끼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왜 불안하게 마스크를 끼냐고 비난을 하기 시작한다. 혹은 일하는 직원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마스크 착용을 금지 시키고 있다. 이런 행동을 타조의 모습에 적용시켜보자.
 
사실 메르스라는 질병은 아직 명확히 판별이 나지 않는 공포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단 두려우니, 마스크를 낀다. 이것은 사실 병을 막는다는 목적도 있지만, 그 마스크로 인해서 공포심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이들의 행동은 나름 현명하다.
 
문제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불안함을 느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을 해석하면, 자신의 눈에 마스크가 보이질 않으면, 메르스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의 눈에 마스크가 보이면, 메르스가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불안함을 느낀다.
 
이것은 우리가 메르스를 보지 않으면, 메르스가 우리를 보지 못하고 비켜 나갈 것이라고 믿는 모습이다. 이 얼마나 우리가 비웃던, 사실은 오해를 받은 타조의 행동과 똑같은 모습인가?
 
만약 우리도 모르게 메르스 바이러스가 전국 각지에 퍼져 있다고 했을 때, 아무도 마스크를 끼고 있지 않다면, 과연 그 바이러스는 없는 것이 되는가? 아마도 그럴 때는 옆에 있는 누군가가 고열로 죽어갈 때나 비로소 그 공포가 가진 실제적 모습을 직면하고는 끝도 없는 공포심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우리들의 모습은 메르스 앞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 매우 오래된 공포심 극복 방법 중 하나이다.
 
우리는 우리 인간의 가장 큰 공포인 죽음 앞에서도 똑같은 행동을 한다. 즉, 우리는 최대한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피가 난무하는 사고 현장이나, 자살자 목격, 살인 현장 그리고 죽어서 썩은 해골이나 무덤 앞에서 있게 될 때 느끼지는 공포감으로부터 알 수 있다.
 
즉, 죽음은 우리들에게 필연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을 최대한 보지 않음으로써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도 타조의 모습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죽음을 보지 않으면, 죽음이 우리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메르스나 죽음뿐만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종류의 공포를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래서 모르는 게 약이란 말도 있다.
 
우리 인간은 평소엔 매우 긍정적인 존재이다. 우리가 이룩한 문명은 우리를 무척 안전하게 해줬으며 그 덕분에, 우리는 대부분이 살만큼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죽음의 공포를 어느 정도 벗어난 지가 겨우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착각이다. 우리는 잊은 것이지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조처럼 그냥 죽음을 보지 않고도 살 수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은 늘 존재하는 공포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행복하고 즐겁다고 해서 마치 죽음이 정말로 없어진 듯 행동한다.
 
수십 만 명이 모여서 모두가 즐거운 흥겨운 파티장에서라도 단 한 발의 총성 소리는 그 수십 만 명을 모두 공포에 떨게 만든다. 아니 수백 만 명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집단적 공포에 의한 패닉 현상을 일으켜 수 많은 사람들이 서로 밀치다가 죽게 될 것이다.
 
만약 그 총의 총알이 총 6발이고, 사람의 숫자가 만 명이라면, 가만히 있어도 최대 6명이 죽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서 뛰기 시작하면 6명의 희생자는 아주 행운이 따른 결과가 될 것이다. 아마도 그때는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큰 상처를 입는 결과가 나올 것이 확실하다.
 
이렇게 우리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우리가 모래 속에 들어가 머리를 숨겨서 바라보지 않기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대상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도 타조의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사실 타조는 그런 이유도 아니고, 나름대로 현명한 이유가 있는데도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익스트림 스포츠라고 해서 정말로 위험해 보이는 운동을 즐긴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다를 바가 없다. 그들도 그것이 죽지 않기 때문에 할 뿐이다. 그 누구도 뻔히 죽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하지 않는다. 그나마 죽을 가능성은 높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극복할 가능성이 높거나, 혹은 그것을 해 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아주 클 때만 그런 도전을 한다.
 
그럼에도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공포를 대하는 법에 대한 작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리 두려워하는 공포를 정면으로 마주보려고 하는 노력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 대부분의 공포는 허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끝없이 느끼지만, 자다가 죽는 사람의 경우엔, 아예 아무런 공포심도 없이 죽을 수도 있다. 그 참혹한 교통사고라고 해도, 순식간에 죽게 되면 거의 아무런 고통도 느끼질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공포가 실제라고 해도 우리는 모래 속에 머리를 숨길 생각만 하지 말고, 그 공포를 마주볼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사실 그래야 그나마 실마리가 찾아진다.
 
안전하지 않는 곳에 갈 때는, 귀찮더라도 최대한 안전장비를 챙겨야 한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은 이런 면에서 매우 철두철미하다. 왜나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보통 사고를 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위험한 일을 할 수록 더욱 더 장비를 잘 갖추고 조심한다.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보통 방심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에 방심을 하고 행동을 한다. 그래서 사고가 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사고가 아닌, 인간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 즉 인재라고 칭한다.
 
사실 우리는 지금껏 수 많은 사고를 통해서 많은 안전장치와 안전장비를 갖춰왔다. 물론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사고는 일어나지만, 그래도 그 사고율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수 많은 사고가 나는 이유는 바로 대부분 그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죽음이 두렵다면, 늘 죽음에 대비해야 한다. 운전을 할 때는 더 조심해야 하고, 늘 안전할 것 같은 집도 어떤 문제가 없는지 자주 들여다 봐야 한다. 대비를 하면 할 수록 우리는 더욱 더 안전해질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이런 신경을 쓰는 일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또한 시간과 돈을 잡아 먹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는 것이 낫다고 믿는다. 그래서 집은 늘 안전한 곳이며, 운전을 해도 사고는 남의 일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을 긍정적인 태도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사실 이것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없는 행동이다. 인생이 늘 행운만이 있을 것이라는, 전혀 근거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행동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가, 갑자기 주변에 누군가 불운한 일이 생기라도 하면, 그때서야 불안감과 공포에 사로잡혀서 어쩔 줄을 몰라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기분이 나쁘니, 주변 사람들에게 불안하게 하지 말라고 비난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스크를 쓴 사람을 보면, 그 마스크를 벗으라고 말이다.
 
하지만 사실, 마스크는 원래 두 가지 목적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마스크를 착용하지만, 이것은 또한 자신의 병을 다른 이들에게 옮기지 않는 좋은 역할도 한다. 그래서 한 사람이 마스크를 쓰면, 다른 주변 사람들 모두 잠재적인 혜택을 얻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변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불안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벗길 바라는 심리가 생겨난다. 모래 속에 머리를 박는 짓이다.
 
공포심 앞에서 모래에 머리를 박는 행동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숱하게 이런 행동을 하고서는 그 자체를 인식조차 못한다.
 
우리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수 많은 죽음에 관련된 공포에 휩싸여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공포를 모두 한쪽에 몰아 놓고는 바라보지 않는 행동과 생각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정말로 그 공포가 두렵다면, 정면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그 공포가 최대한 현실화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된다. 사실 그런 노력을 하고 나서도 그 공포가 현실화 되었다면, 어떤 면에서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어렵지만 두 번째 해결책도 있긴 하다. 그것은 바로 그 공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패가 두렵다면 실패를, 죽음이 두렵다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공포를 벗어날 수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에 걸친 자기 훈련이 필요할 테지만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각종 공포를 가지고 살아간다. 오늘 아무리 행복한 일이 있어도 그것은 전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공포들을 좀 더 진지하게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그런 공포들이 일어날 가능성을 최소화 시키려는 노력을 한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현실화 되는 공포는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공포를 해결 할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모래 속에 머리를 숨긴 채, 공포의 존재를 부정하지 말고 말이다. 또한 그렇게 공포를 바라볼 수 있어야, 그 공포가 현실화 되었을 때, 만약 공포의 노예가 되지 않고 상황 파악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우리들 각자를 좀 더 오래 살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오늘 옆의 사람이 쓴 마스크로 인해 불안함을 느꼈다면, 그 사람의 마스크를 벗기려 하지 말고, 자신도 마스크를 하나 사서 쓰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좀 불편하고 돈도 들지만, 그나마 그것이 지적 존재라고 알려진 인간다운 행동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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