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질문을 의심하다

아이루다 2015. 4. 14. 09:48

 
밥을 먹고 난 후, 설거지를 할 때 가끔 고민할 경우가 생긴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고민인데, 도대체 어떤 것을 먼저 씻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고민은 식사 중에 사용된 접시나 그릇이, 어떤 것은 기름기가 없어서 거의 세제가 필요하지 않고, 어떤 것은 기름기가 많아서 세제를 꼭 써야 하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버릇처럼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고 나서는, 기름기가 많은 것을 먼지 씻을지, 아니면 기름기가 없는 그릇을 먼저 씻을지 고민한다. 우선 기름기가 많은 것을 먼저 씻는 방법의 장점은 그때의 수세미 상태가 기름 제거에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방식은 단점이 있다. 그것은 그렇게 기름기가 많은 그릇을 씻고 나면, 수세미에도 기름기가 묻어서, 결국 다른 그릇을 씻을 때 문제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일반 그릇을 먼저 씻으면 그런 상황이 일어날 염려는 없지만, 일반 그릇을 씻다가 보면, 세제가 많이 사라진다. 그래서 정작 기름기가 많은 그릇을 씻을 땐 기름기 제거가 쉽지 않다.
 
이 둘 중에서 과연 어떤 방법이 더 좋을까?
 
아마도 이 문제는 사람마다 다른 해결책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흔한 해결책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무엇을 먼저 씻든지 상관없이 세제를 한번 더 쓰면 해결이 되긴 한다. 물론 사람마다 각자 의견이 다를 것이다. 그리고 사실 설거지를 별로 안 해 본 사람은 아예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방법도 생각난다. 일단 세제를 묻히지 않은 수세미로 일반 그릇을 최대한 씻고 난 후, 세제를 묻혀서 기름기 많은 그릇을 씻는 방법이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세제를 적게 쓸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 답은 우리가 선택 가능한 두 가지 중 하나에 속해 있지 않는 제 삼의 방법이다. 즉, 이 답은 질문자의 의도를 벗어났다. 질문은 분명히 세제를 묻힌 후, 어떤 그릇을 먼저 닦아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답을 하게 되면, 질문을 한 사람들은 그것은 예외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좀 더 생각을 해보자. 도대체 왜 이 질문을 한 것일까? 정말로 그 두 가지 방법 중 어떤 것이 더 나은지를 알고 싶어서였는가? 아니면 세제를 최소한으로 사용해서 경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좀 더 나은 방법을 찾고자 질문한 것인가?
 
사실 대부분의 경우엔 후자의 의도가 맞다. 우리는 단지 설거지를 할 때 세제에 관한 좀 더 현명한 방법을 찾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런데 당장은 그 두 가지 방법만이 답의 후보로 올라온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어떤 질문에 답을 할 때, 비록 그것이 주관식이라고 해도, 일정 부분 제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질문은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실상 답의 한계를 지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친구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몇 번 버스를 타고 가냐고 물었을 때, 친구가 한 번에 간다고 하면 질문자는 잠시 당황하거나 웃을 수 있다. 사실 질문의 요지는 버스의 노선 번호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질문은 어떤 상황, 시간, 대상, 공통된 관념 등에 따라서 많은 것이 생략되었지만, 사실상 답의 제약을 명백하게 가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질문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바로 사진선다형 답안이다. 이런 질문은 아예 답 자체를 고정시켜버렸다.
 
아무튼 질문의 이런 특성으로 인해, 우리는 질문을 받을 때, 어떤 식으로든 자연스럽게 답의 한계 내에서만 답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누군가 면접 장에서 아버지는 무엇을 하시는지 물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이 나올 때 지금 목욕탕 가는 중이셨는데, 지금은 정확히 뭐하시고 계시는지 모른다고 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질문의 특성은 본질적인 문제를 만들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질문이 가진 잠재적 한계가 바로 답을 하는 사람의 사고 범위 자체를 좁혀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몇 번 버스를 타고 가느냐, 아버지가 뭐를 하시는 지에 대한 답으로써 앞에서 얘기한 것들은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니다. 단지, 그것이 질문자의 의도와 맞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더욱 좋지 않는 것은, 우리는 질문 자체가 가진 문제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는 훈련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앞에서 말한 설거지의 예에서,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제시된 두 가지 중 하나만을 답을 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제를 최대한 적게 쓰고도 설거지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답을 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또한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지를 묻는 면접관에게도, 사실 면접자에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묻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음을 생각해야 했다. 물론 답은 할 수 있다. 하지만 면접자는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이지, 그 사람의 아버지나 어머니, 누나, 형, 동생의 직업이 무엇인지 그리고 결혼할 사람이 있는지 등의 이 사람의 애정 문제를 물어볼 권리가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질문에 맞는 답을 하는 훈련을 받아왔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으면 그 질문자가 원하는 정확한 답을 하고는, 그것을 할 때마다 칭찬을 받거나 혹은 그런 과정을 목격해왔다. 우리는 질문자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하는 것을 꽤나 중요한 능력으로 삼았지만, 사실 질문 그 자체가 가진 의도는 파악하는 것을 게을리 한다.

 
물론 그 질문자가 자신의 당락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험문제이거나 혹은 면접관이라면 이 말은 나름대로 유효하다. 하지만 그 질문자가 자신이 삶을 살아가면서 가지게 되는 수 많은 상황에 대한 판단이라면, 과연 이것을 어떤 식으로 답을 해야 할 것인가?
 
크게 보면, 젊은이들이 때가 되어서 결혼을 하는 것도, 자신의 인생이 던진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이다. 그것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그들 자신만의 답인 것이다. 그러니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것도 답이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도 둘만 사는 것도 답이고, 아이를 다섯 명이나 나아서 키우는 것도 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의 요지는 무엇일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질문은 과연 무엇을 목적으로 할까? 그것은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이 당연히 자신의 행복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혼을 결정할 때,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만을 생각한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너는 행복하기 위해서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를 물은 것이 아니고, 너는 결혼을 할 것인지를 그리고 하겠다면 누구와 할 것인지를 질문 받았기 때문이다.
 
질문 자체가 결혼을 누구와 할 것인지를 묻게 되면, 사실 답은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는 것으로 난다. 그것이 단지 예쁜 여자, 생활력이 강한 여자, 잘 생긴 남자, 경제력이 좋은 남자, 편한 사이 등으로 나뉠 뿐이다. 하지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게 되면, 결혼은 그 중 선택 가능한 하나가 될 뿐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질문은 자신의 오래된 사고를 이미 주입시켜 놓았기 때문에, 사실상 매우 한정적인 답만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 훈련된 우리들은 좀처럼 그 질문이 가진 문제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혼식을 준비 할 때, 축가는 누가 하지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왜 축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보다는, 누가 축가를 해줄 것인지 만을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결혼식 자체도 마찬가지다. 왜 결혼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디에서 하는지를 생각할 뿐이다.
 
미국의 어느 비누 공장에서 포장기계의 오작동으로 인해, 비누가 들어가지 않는 빈 케이스가 가끔 발생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 공장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X-레이 투과기 및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컨설팅까지 받았다. 그런데 X-레이 장비를 설치하기도 전에 불량률이 뚝 떨어져서 거의 0에 가깝게 되었다. 그리고 이유를 알아보니, 공장 직원 중 하나가 집에서 선풍기를 가져다가 틀어 놓고 빈 케이스를 날려버리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단순한 생각 하나로 인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물론 이 사례는 발상의 전환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보통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매우 복잡적이고 다각도의 판단을 내린다. 아마도 이 공장의 윗사람들은 빈 케이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답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아주 단순한 원리 하나를 무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비누의 무게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이 불량률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 라고 묻지 않고, 도대체 어떤 장치를 구매해서 설치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라고 묻게 되면, 위의 상황이 나오게 된다. 또한 누구에게 물어봐야 이 문제를 해결할까 라고 물으면, 당연히 그 답으로 컨설턴트가 끼어들게 된다.
 
또 다른 예로 요즘 나오는 레고 블록이 있다. 워낙 유명한 아동용 장난감인데, 원래 이 블록은 몇 가지 전형적인 모양이 수 없이 많은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요즘 이 레고를 보면, 그 제품의 표면에 그려진 모양을 만들 수 있도록 특별하게 구성되어 있다.
 
즉, 답이 정해진 레고 블록이다. 사실 이런 레고는 만들고 나면 멋지긴 하다. 그래서 사람들도 혹한다. 하지만 정작 왜 처음에 레고를 아이에게 사주는지를 잊어먹고 만다. 원래 레고는 답이 정해져 있지 않는 문제였다. 그래서 아이는 각자만의 답을 찾는다. 그래서 답은 수천 가지, 수만 가지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이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레고가 가진 가장 긍정적인 교육효과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젠 답이 하나로 정해졌다. 아이는 이제 자신이 참고하는 매뉴얼을 가지고 그대로 맞추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맞추고 나면 아이는 잠시 성취감을 맛볼 것이다. 하지만 금새 지겨워질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것을 사달라고 할 것이다. 사실 아이는 레고도 아니고, 멋진 로봇도 필요가 없긴 하다. 흙과 같이 놀 친구만 있으면 일년 동안 매일 매일 행복하게 놀 수도 있는 것이 아이의 참 모습이다.
 
하지만 성인들은 정해진 답을 좋아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불확실성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서 늘 예약을 한다. 원하는 대로, 정해진 대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왜 그것을 묻는지를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많은 제품들을 만드는 회사에서, 어떤 회사가 AS가 가장 좋은지를 묻고 답하고 따진다. 그런데 거기에서 가장 AS를 잘하는 것으로 알려진 회사가, 그렇게 되기 까지 얼마나 많은 AS 기사들의 감정 노동이 들어갔을 지를 생각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AS를 잘하는 회사가 최고라고 여기지만, AS를 친절하게 잘하는 회사일수록, AS 기사들이나 상담원들을 철저하게 고객 중심의 사고 방식으로 강요해서, 결국 개인을 마치 로봇처럼 고객을 대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마치 절대 화를 낼 것 같지 않는 표정으로 고객을 대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이렇듯 우리는 살아가면서 받는 수 많은 질문들에서 무엇이 생략되고 있으며, 무엇이 제한되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우리는 당장 눈 앞에 놓여진 질문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치고 힘들어한다. 그래서 머리 속에는 질문의 본질에 대한 그 어떤 생각도 들지 않는다.

 

결혼 반지를 골라야 할 경우엔, 금인지 다이아몬드 인지만을 따진다. 왜 결혼 반지를 해야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 못한다. 사실 성인들이 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다 이런식으로 흘러간다. 우리가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질문 받은 그것들에 대한 정형화된 답들 뿐이다.
 
이것이 우리를 고정화되고, 답이 정해진 질문을 하도록 만들고, 또한 누구나 예상된 답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혹시나 예상치 못한 답이 나오게 되면, 웃거나 화를 낸다.
 
하지만 이런 고정화된 삶은 마치 만들 수 있는 것이 정해진 레고 블록과 같다. 그것은 답이 정해져 있기에 처음에 한 번은 쉽고 빠르게 만들 수 있어서 좋지만, 할수록 지겨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또 다른 레고 블록을 사야 한다. 그것은 또 다른 비용을 유발시킨다. 결국 우리는 이미 보편적으로 정해진 답인, 돈을 벌기 위해서 힘들게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질문에 담긴 문제를 인식하지 않음으로써 좀 더 편하게 세상을 살 수는 있다. 왜 그 질문을 하는지, 그 질문이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머리가 좀 더 덜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결국 그것은 처음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 쳐 놓은 그물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물고기와 같을 수 있다.
 
우리는 보통 그 그물을 자체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 그물 안에서 어떤 장소가 가장 안전할지를 질문 받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고민한다. 우리는 누구나 돈을 어떻게 하면 많이 벌 수 있을지를 질문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들 머리 속에는 돈은 행복이란 단어의 다른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돈 자체도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하지만 돈은 결코 행복과 같은 뜻을 가질 수는 없다. 돈은 행복을 실현하는 도구이다. 그것은 사랑, 우정, 믿음, 신뢰, 정의와 같이 행복을 향해 갈 수 있는 수단이다. 하지만 우리는 돈과 사랑을 선택하고, 심지어는 돈과 행복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를 질문하기도 하고, 질문 받기도 한다. 그리고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것의 답을 낸다. 돈이 중요하다 라거나 행복이 중요하다고 대답한다.
 
사실 삶이란 것은 아주 큰 질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태어난 우리들 모두는 살아가는 동안 평생에 걸쳐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일단 가장 중요한, 왜 이 질문이 주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산다. 사실 이 의문은 그다지 효용성도 없다. 왜 사는지 알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가 지속적으로 질문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고 살아가면, 우리는 결국 모두 똑같은 답을 가진 존재가 되어갈 뿐이다. 물론 이것이 편하긴 하다. 하지만 삶이 지겨워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는, 집안에서 혼자 있을 수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즉, 그는 우리 인간이 가진 지겨움과 권태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수 많은 판단과 행동들은 어떤 질문을 받고, 어떤 답을 낸 결과들일까? 그리고 우리는 또한 다른 이들에게 자신도 모르게 어떤 이미 고정된 답을 질문하고 있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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