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온전한 행복

아이루다 2015. 4. 3. 10:05

 
인간이 느끼는 행복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본능을 충족시키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먹고, 자고, 싸고, 성욕을 푸는 것으로부터 발생된다. 이 행복들은 매우 직접적이며 그 행동을 하면 대부분 만족이 된다.
 
두 번째는 감성으로부터 오는 행복이다. 우리는 사람들과 모인 자리, 환상적인 영화 속 세계를 바라볼 때, 따뜻한 난로가, 소리 없이 눈이 내리는 창 밖, 익숙한 곳을 떠나 멀리 낯선 곳을 여행할 때, 추운 날 손에 쥔 따뜻한 커피 한잔, 다같이 모여서 즐겁게 노는 놀이공원이나 물놀이 장 등에서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나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유사한 경험을 통해서 그런 장소나 분위기에 대한 기억이 없거나 아예 나쁜 쪽으로 생긴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지 못하거나 혹은 아예 거부감도 느낀다.
 
우리는 사람들과 모인 자리에서 왕따를 당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거나, 뜨거운 난로에 심하게 덴 경험을 했거나, 끝도 없이 내리는 눈을 치웠었거나, 낯선 곳에서 당했던 강도 사건이나, 도대체 왜 먹는지 이해가 안가는 커피나, 어린 시절 단 한번도 놀이 공원에 가 본 기억이 없을 때 행복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같은 영화를 봐도 모두 다르게 반응한다. 그것은 모두 다른 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수 많은 똑 같은 행동과 경험을 해도 모두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같은 영화도 누군가는 감동받은 작품으로, 누군가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가 된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 시간까지 쌓인 기억과 그것으로 이해 만들어진 감성의 차이일 뿐이다.
 
물론 이것들은 반드시 어린 시절에 경험했어야만 누릴 수 있는 행복만은 아니다. 우리는 어른이 된 후, 어떤 계기로 인해서 이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억이 생겨나면 언제든 이런 것들에 대한 추억이 생기고 더해서 감성이 만들어 진다.
 
단지 어른이 된 후엔 자신도 모르게 삶에 대한 시점이 고정되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는데도 성격이나 혹은 어떤 자신만의 고집으로 인해서 아예 기회 자체를 거부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어린 시절에 경험을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오래 간다.
 
사실 놀이 공원은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 좋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곳을 한번도 가본 적도 없고, 그래서 즐거움도 몰라서, 나중엔 그런 곳에 가는 것은 모두 돈 낭비라고 믿는 어른은, 어른이 되어 그곳에 갈 수 있는 돈과 시간과 기회가 있어도 가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다 아이들 때문에 가게 되더라도 좀처럼 그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하는 일이 생기거나 혹은 괜한 심술을 부리게 된다.
 
이런 경험 미숙을 인해 차단되는 것들은 사실 꽤나 많다. 그리고 그 차단의 이유는 각자 나름대로 설득력도 있다. 아마도 놀이공원이라면 돈이 비싸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돈이 비싸서 그럴까? 물론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을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것 하나는 알아두어야 한다. 혹시나 무엇인가를 할 때 돈이 비싸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돈이 비싼 것이 아니라, 그 돈을 들였어도 그 만큼 만족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즉, 돈을 썼는데 행복하지 못했으니까 그것이 아까운 것이다. 하지만 놀이공원에 가서 그 돈 이상으로 충분히 행복한 사람에게도 그 돈이 아까울까?
 
이것에 대해서 당위성이 있게 설득하고 싶다면 그런 곳에 쓰는 돈 말고,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곳에 쓰는 돈은 어떻게 아깝지 않을까를 설명해야 한다. 그래서 술이나 담배, 낚시 도구나, 골프 채, 카메라, 오디오, 차, 명품, 여행 경비 등등.. 이런 것들 중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에 쓰는 돈은 왜 아깝지 않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종류의 행복, 즉 본능과 감성의 행복 중에서 본능적 행복은 인간 보편적인 행복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할 것도 없다. 하지만 감성에 의한 행복은 사실 그 종류도 엄청나게 다양하고, 더해서 우리는 사실 이것에 대해 많은 착각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앞에서 감성은 기억을 기반으로 한다고 설명을 했다. 우리는 과거에 직접 경험했던 기억이나, 소설/영화 등을 통해서 접한 기억을 통해서 감성을 만든다. 물론 만든다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감성은 우리의 의지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감성은 어떤 시간, 어떤 장소, 어떤 분위기, 그때 행복감에 의해 자연스럽게 결정이 된다.
 
같은 겨울바다를 갔어도, 누군가는 감성이 충만해져서 오지만, 누군가는 추운 기억만 남아서 온다. 갓 시작한 연인이 찾은 바다는 감성과 행복이 넘치지만, 남자들끼리 아무 생각 없이 왔다가 모두 쌍쌍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풍경을 보고는, 쓰린 마음에 깡 소주만 만시고 간 바다는 기억하기 싫은 시간으로만 남을 뿐이다.
 
그래서 감성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우리는 자주, 찍은 사진을 공유하지만, 사실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 중 하나일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감성을 다른 이들에게 공감해주길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각자 꽃을 보면서, 비 내리는 풍경을 보면서, 아이의 뛰는 모습을 보면서, 잘 차려진 음식을 보면서, 낯선 도시의 풍경을 보면서 자신만의 감성을 느끼는데, 이것을 자신이 느꼈다고 해서 상대에게도 느낄 것이라고 짐작해서 사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본능적 행복은 쉽게 충족이 되는 요즘엔 어떤 때보다도 감성을 통해 얻는 행복이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말 그대로 살기 위해 먹기보다는, 먹기 위해서 산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왜 맛난 먹을 것을 먹는 것이, 본능적 행복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감성에 의한 행복이냐고 되물을 수 있다. 사실 맛난 것을 먹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우며, 과거에 맛난 것을 먹었다고 해서 지금 맛난 먹을 것을 먹고 싶어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질문은 타당하다. 현 시대에 우리는 먹기 위해서 사는 것도 일종의 본능이라고 믿을 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이 분명히 맛난 먹을 것을 먹는 것을 통해 많은 행복을 얻는다. 하지만 사실 먹는 것의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즉, 이들은 맛난 먹을 것에 대한 거의 어떤 감성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먹을 것은 단지 에너지를 생성하기 위해서 해야 할 행동이다. 물론 그들도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좋긴 하지만, 그것을 위해 산다는 표현을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된 배경엔, 어릴 때 어렵게 살아서 주는 대로 먹어야 했던 기억이 한몫을 하고 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아예 미각 자체가 거의 없어서, 음식의 맛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 오직 씹는 느낌, 즉 식감만을 즐기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어릴 때 주는 대로 먹는 삶과 온전하지 않는 미각이 만나게 되면, 말 그대로 먹는 행복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먹고 자고 싸는, 본능적 행복엔 이런 예외가 없다. 사실 예외가 존재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은 이미 죽었다. 인간은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싸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데 맛난 먹을 것을 먹지 못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그리고 맛난 먹거리라고 해도 그것은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르다. 즉, 우리는 시대적 환경과 지역적 환경에 따라 맛난 먹을 것에 대한 기억을 했고 그것을 즐기면서 산다. 아무리 맛난 김치찌개도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들에게만 맛있을 뿐이다.
 
그래도 음식은 보편적으로 행복을 얻는 수단이긴 하다. 왜냐하면 맛난 먹을 것에 대한 좋은 추억은 누구나 갖기 쉬우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것이 마치 본능적 행복인 냥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감성은 기억을 기반으로 하기에, 감성을 통해 느끼는 행복은 엄청나게 다양하다. 왜냐하면 당연히 우리 인간들 모두 각자만의 삶을 살며, 각자만의 경험을 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모두 다른 기억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가족인 경우엔 조금 다르다. 가족들은 어려서부터 보통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가족은 사실 남들보다는 훨씬 감성 공감이 잘 되는 편이다. 그래서 이것이 잘 이루어지면 가족 모임만큼 좋은 것도 없다.
 
문제는 그 가족에 남이 들어왔을 때가 된다. 즉, 사위나 며느리가 들어왔을 때, 잘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 가족은 여름마다 가족이 모두 모여서 여름 휴가를 가는 것이 행복인데, 그것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서 어떤 감성적 공유가 안 되는 외부사람이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물론 새로 온 사람이 사람을 매우 좋아하고 부담 없이 즐기는 사람일 경우엔, 쉽게 적응해서 없어진 감성을 금새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런 모임이 심하게 부담스럽고 귀찮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감성에 너무도 익숙한 그 가족들은 사위나 며느리가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를 이해를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이미 익숙해진 기억을 통한 감성으로 인해서 그런 여름 휴가는 늘 행복한 기억이니까 말이다.
 
아무튼 경험과 기억의 다양성은 감성의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결국 행복의 다양성이 만들어 진다. 그래서 이 세상의 행복함의 종류가 이렇게나 다양하게 되는 것이다.
 
더해서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고 싶어한다.
 
우리 인간은 현재가 행복하지 않으면 누구나 행복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사실 아무것도 안하고 집에서만 뒹구는 사람들도 그것이 현재로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기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매 순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때가 없다. 단지 다른 이들의 행동이 마치 아무것도 안하고, 한 없이 한심해 보이는 이유는, 자신은 그것보다는 좀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감성으로부터 오고, 누구나 행복하길 원하는데, 여기에서 발생하는 아주 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딱히 가진 자신만의 감성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설령 있었더라도 너무 오랫동안 그것을 꺼내 볼 기회가 없어서 잊어버리고 만 경우도 많다. 우리의 경험과 기억은 서서히 사라지기 때문에, 아무리 어렸을 때 행복했던 기억이라고 해도 너무 오랫동안 방치하면, 사라져버리고 만다.
 
물론 본능적 행복은 늘 채우고 산다. 우리는 매일 먹고, 자고, 싼다. 그런데 도대체 감성 행복이 채워지질 않는다. 즉, 무엇을 해야 행복한지를 잘 모르겠거나 혹은 하긴 하는데, 그것이 정말로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지 알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심심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늘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이런 순간은 사실 꽤나 많은 사람들에게 온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이런 해결책을 찾는다. 그것은 바로 다른 이들의 감성을 복사해내는 것이다. 즉, 다른 이들의 기억과 경험을 통해 얻은 행복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도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똑 같이 하고 사는 것으로 이어진다. 즉, 남들이 여행을 가서 행복했다고 하면 여행을 가고, 남들이 그것을 먹어서 행복했다고 하면, 그것을 먹으로 간다. 남들이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으러 다니면, 자신도 카메라를 하고, 남들이 콘서트를 가면 자신도 간다.
 
물론 이미 말했듯, 비록 이렇게 복사된 감성이라고 해도, 자신과 잘 맞아서 언제든 자신만의 감성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래서 30살이 넘어서 처음 간 놀이공원이 너무 즐거워서 매년 가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는 행복하기 싶다는 과도한 욕구로 인해서, 본인이 정말로 그것을 통해 정말로 행복한지에 대한 여부를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일 때 생긴다. 즉, 그것을 했을 때, 자신만의 감성이 정말로 생겼는지를 알 길이 없을 때 생기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했을 때, 사실상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착각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생각지도 못했던 '자기 존재성' 에 대한 확인으로부터 오는 행복을 복사한 감성이 주는 행복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된다.
 
우리 인간은 그것을 인식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사는 동안 평생 자기 존재성 확인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거의 본능적인 것인데 - 사실 본능은 아니다 - 그것이 생기는 이유는 바로 다른 인간들이 존재들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교체될 수 있다는 공포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이 세상에 필요한 이유를 가지고 싶어하며, 그것이 충족될 때 큰 행복을 얻는다. 우리는 직장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때, 물론 연봉이 높아질 수 있는 기대도 있지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 받음으로써 도 큰 행복을 얻는다. 그래서 돈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크게 만족한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행복 역시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끝없이 엄마를 찾고, 엄마는 아이를 통해서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할 가장 중요한 이유를 찾는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그 어떤 관계보다 친밀하고 끈끈하다. 그리고 그렇기에 매우 큰 행복을 얻는다.
 
하지만 이런 존재감으로부터 오는 행복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즉, 여행을 하는 것을 행복하게 느끼는 사람은 과연 그 여행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지, 아니면 그런 여행을 할 수 있는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작은 증명 때문에 행복한지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키워서 행복한지, 아니면 남들보다 더 잘난 아이를 키우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성을 증명할 수 있어서 행복한지 혼란스러워진다.
 
그나마 이것을 구분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서, 여행 자체를 행복하게 느끼는 사람은 사실 어디를 가든 상관이 없다. 즉, 그것이 여행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에 남길 필요도 없다. 이미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에 머리 속에서 그 행복만을 즐기면 된다. 반대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 받기 위해서 여행을 가는 사람은, 어디를 가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또한 기록을 충실히 남겨야 한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일인데, 누구나 가는 뒷산에 올라서는 존재감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하지 못하는 일을 할 때 조금 더 존재 가치에 대한 만족을 한다. 그래서 이미 한 번 간 곳은 다시 가질 않는다. 또한 누구나 가는 곳은 가지 않는다. 그리고 존재감 증명은 절대로 혼자 할 수 없다. 즉, 우리는 다른 이들의 판단을 들어야 한다. 그것이 단 한 명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의 신뢰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 좋다.
 
사실 이 구분법은 단순하지만 범용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것을 '해서 행복한가'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가' 를 구분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또한 이 두 가지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입장이 가진 삶의 태도에 대한 본질적 의미와 차이점을 알 수 있게도 해준다.
 
이것의 차이는, 쉽게 예를 들어서 여행을 가니 행복한 사람과 행복하기 위해서 여행을 하는 사람의 차이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여행을 하면 행복한 사람은 어디를 가는지, 가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또 무엇을 남겼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냥 그 여행 자체가 좋은 것이다. 반면에 행복하기 위해서 여행을 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는지가 가장 중요하고, 무엇을 봤는지, 무엇을 남겼는지도 많이 중요한 목표가 된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면 행복한 사람은 어떤 영화를 보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시간과 돈만 있으면 늘 영화를 본다. 반대로 행복하기 위해서 영화를 보는 사람은 영화를 고른다. 그래서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영화만을 골라서 본다.
 
하지만 이 둘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해서 행복한 사람이나 행복하기 위해서 한 사람 모두 결론은 모두 동일하게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둘 모두 자신은 영화를 보는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판단한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행복하기 위해서 한 사람들 역시도 자신 역시도 그것을 해서 행복했다고 믿는다. 즉, 그 행복이, 그 감성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구분하는 추가적인 방법을 이야기 하면, 일단 먼저 대상에 대한 반복을 하는 것에 문제가 없느냐를 따져야 한다. 먹어서 행복한 사람은 늘 같은 것만 아니라면, 몇 가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끝없이 반복해서 먹어도 충분히 행복하다. 하지만 행복하기 위해서 먹는 사람은 끝없이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다.
 
여행이 행복한 사람은 같은 곳을 끝없이 갈 수 있다. 반대로 행복하기 위해서 여행을 하는 사람은 계속 여행지를 바꿔야 하면, 바꿀 때는 과거에 갔던 곳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멋지고 조금이라도 더 긴 여행 계획을 짜야 한다. 즉, 이 행복은 과거의 기억을 뛰어 넘어야만 온전히 충족이 된다.
 
이때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사람들에게는, 동일하게 그것을 하는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느낌으로써 얻는 행복이라는 공통 요소가 깔려 있다. 그래서 결국 그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구분 법은 그것을 혼자도 하느냐를 따져야 한다. 물론 여행과 같은 것은 혼자 다니는 것 자체가 위험하긴 해서 원래 쉽지는 않지만, 먹을 것을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심지어는 놀이공원이라도 해도 혼자 갈 수 있다면 정말로 그것을 행복하게 즐기는 것이다. 물론 혼자서 하려니 애매해서 안 하는 것은 상관없다. 그것은 단지 숫기가 없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 민감한 것뿐이다.
 
하고는 싶은데 다른 사람들이 시선이나 상황으로 인해서 못하는 것과 혼자 하는 것은 아예 엄두도 나질 않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것조차도 혼란스러워한다.
 
물론 정말로 하고 싶다면,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위도 가볍게 뛰어 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상 그것을 즐기는 최고의 행복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이럴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면 행복한 것과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 사이에 걸쳐있다.
 
정리하면, 해서 행복한 것은 그냥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이들의 행복과 같다. 그냥 좋은 것이다. 그래서 따로 설명할 이유가 없다. 반대로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존재 가치의 증명으로써 느끼는 행복이다. 그래서 자신도 남도 납득이 되는 이유가 필요하다. 따라서 남들의 인정도 필요하다. 또한 그것을 했다는 증거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자신의 존재 가치가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 두 입장 모두 행복하다는 것은 동일한데 딱히 이것을 구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차이는 분명히 있다.
 
일단 가장 큰 차이는 그 행복에 들어가는 비용이다. 그것은 돈과 시간 노력 등등을 모두 포함한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할 때 브레이크가 없다. 즉, 무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행복하지 않아서 행복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구는 사실 엄청나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지 않으면 행복하기 위해서 정말로 많은 것을 희생한다.
 
그리고 한 번 만족된 행복은 다음에 또 다시 그런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은 이미 말했듯, 과거의 경험보다 더 나아져야만 존재 가치성에 대한 만족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보다 못했거나 혹은 비슷한 수준이라면, 자신은 현재 퇴보되거나 정체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낫다.
 
두 번째 차이는 행복의 불안정성이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과거에 비해서 나아져야 한다는 압박감으로부터 오는데, 언젠가는 분명히 시간적, 경제적 한계가 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한한 시간이나 돈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또한 우리의 육체는 매일 노쇠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행복을 즐기기 위해서는 점점 더 많은 돈과 시간 그리고 체력이 필요해진다.
 
결국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불행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잠재적 불안 요소가 되고 만다.
 
세 번째는 그것을 사실상 하지 못했을 때 나타날 문제점이다. 해서 행복한 사람은 그것을 못해도 큰 상관이 없다. 그냥 다른 행복한 것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사람은 하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행복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멋진 유럽 여행을 가고자 했던 사람이 사정이 생겼다고 해서 제주도를 가자고 하면 거부하게 되어 있다.
 
해서 행복한 사람은 그것의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유럽을 못 가면 제주를 가면 된다. 그들은 그냥 해서 행복하면 된다. 그것이 꼭 무엇일 필요가 없다. 아이들의 행복이 그렇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도 비싼 로봇이나 인형이 필요해지면 달라진다. 아이가 만약 로봇이 있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서 로봇을 필요로 하게 되면, 이 아이는 행복에 대한 욕구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로봇이 아니라 특정한 로봇이어야 한다. 다른 종류의 싼 로봇은 필요가 없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서 그것을 하는 사람은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치를 제대로 느끼는 것은 사실 그리 많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들이 인정하는 것만을 가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남들이 인정하는 보편적 가치는 그리 많지도 않고 더해서 자신과 잘 맞지도 않는다.
 
세상은 남을 돕는 삶을 가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자신이 가치로 느끼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세상은 사랑, 믿음, 정직, 정의 등의 가치를 말하지만, 사실 그것의 가치를 완전히 공감하는 사람도 무척 드물다. 우리는 겨우 가족의 가치, 여행의 가치, 음식의 가치, 친구의 가치, 돈의 가치 등이나 공감한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대안이 없다.
 
사실 행복에 대한 이런 잘못된 접근은 행복하기 위해서 시도한 많은 일들로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행복하지 못할 때, 자신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책을 찾기 찾아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책에서는 당신만의 행복을 찾아라, 취미 생활을 해라, 사람들을 만나라, 여행을 떠나라 라고 조언을 해 주고 있다. 물론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점은 그건 것을 통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감성을 가진 사람이 생각보다 드물다는 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책에 쓰인 대로 댄스도 배우고, 수영도 배우고, 커피도 갈아서 마셔보고, 여행도 가고, 책도 읽고, 동호회 활동도 하고, 등산도 하고, 화단을 가꾸기도 하고, 피아노나 기타를 배워보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전시회도 가는 등등 수 많은 다양한 시도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들 모두 자신이 단지 시간을 보내는데 유용했다는 것을 자신이 느끼지도 못하고, 인정하기도 힘든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나타난다. 그래서 젊은 시절엔 수 많은 시도를 했다가 아이를 키우면서 모든 대외적 활동을 중단해버리는 엄마들의 삶을 보면, 사실 정말로 그런 일들을 할 때가 행복해서 그랬는지조차 의문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를 낳지 못한 어떤 노처녀는 그것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평생 믿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시점엔 자신의 삶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삶은 현실적으로 비용도 많이 들고, 불안하며, 하지 못하면 살기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다면 해서 행복한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행복은 싸고, 안전하며, 하지 못해도 상관이 없고, 더해서 그 행복감은 훨씬 더 크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자신만의 감성을 만드는 것이다. 남들이 말한 경험과 기억을 참고로 만들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감성이다. 그리고 감성은 기억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직접 경험을 해서 만들어야 한다.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무엇인가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말로 작은 것들까지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단 한 장소에서 며칠을 보내더라도 그 세세하고 미묘한 차이를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은 멀리 유럽이나 뉴질랜드에 가지 않아도 된다. 그냥 뒷산이나 공원에 가서 땅바닥을 보면서도 체험할 수 있다.
 
작은 화분을 키워도 된다. 만약 자신의 화분에서 그것을 볼 줄 모르면, 수만 평에 펼쳐진 꽃밭도 하루도 안되어서 금새 지겨워지고 만다. 그곳에 핀 수십 만개의 꽃 송이를 각자 모두 볼 수 있어야 한다. 다 보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들 하나하나 마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인간 모두 하나하나가 각자만의 것을 가지고 있듯, 그들 역시도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것을 볼 줄 모른다면 그 꽃밭이 지구 전체로 넓어져도 단 하루면 지겨워 질 것이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는지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필요가 없다. 이때는 오직 자신의 경험만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래도 갖고 싶다면,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과 그것을 하면 된다. 물론 둘 모두 행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쌓이면, 결국 감성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어떤 행복 대상을 자신의 가치 증명으로 쓰지 않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를 인식을 해야 한다. 어떤 행동에 이유가 있어서는 안되며, 가치도 없어야 한다. 설령 자신의 가치에 대한 욕구를 느꼈다면, 그것을 줄이려고 노력해야지, 채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좀 더 겸손해져야 한다.
 
예전에 타짜에서 나온 김혜수씨가 했던 '나 이대 나온 여자야' 라는 말은 '나는 이 정도는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믿음이 결국 우리들 자신을 갈아먹고 있다. 우리는 누구도 그럴 자격이 없다.
 
우리는 누구도 허락해주지 않는 이 땅에 금을 긋고는 자신의 땅이라고 우기고 있으며, 우리는 외부로부터 음식물을 얻지 못하면 금새 죽고 마는 기생적 존재이다. 우리 인간은 사실 어떤 가치도 없어야 정상이다.
 
물론 이것을 인정하기란 무척 힘들다. 그래도 과도한 자기 욕심만은 내지 말아야 한다. 설령 스스로는 과도한 것이 아니라고 믿겠지만, 사실 누구나 과도하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내려 놓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하다. 그래서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욕구를 내려놓을수록 불필요하게 가치 증명을 하기 위해서 하는, 행복하기 위해 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자신 이외의 존재를 좀 더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자신을 조금 더 낮춤으로써 진정으로 원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에는 돈도 안 든다. 큰 노력도 필요 없다. 어릴 땐 분명히 없었는데, 어른이 된 후 왜 생겼는지 모르는 욕심과 욕구만 좀 털어내면 된다.
 
우리는 자연 앞에서 조금만 겸손해져도 그토록 원하던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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