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모두 자신의 행복을 위해 돈을 쓰지만..

아이루다 2015. 3. 23. 11:40

 
앞의 한정된 자원, 돈과 시간에 관한 글에서 우리가 돈으로 사는 것은 그 제품이 아닌, 가치이면서 만족감이며 행복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개인적인 영역에서 판단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무엇에 얼마를 쓰는지를 판단하여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행위 모두가, 기본적으로 당위성을 가질 수 없다는 식의 설명을 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누군가 무엇에 얼마를 쓰는지에 대해서 사실상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맞는 것인가 에 대한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사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반론이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는 다른 이의 잘못된 행위라고 판단되는 것이라고 해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잃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어떤 비판들은 실제적으로 필요하다. 만약 인간의 어떤 행동들이 제어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가지 않는 이상, 우리는 다른 이들과 끝없이 교류를 해야 하며, 어떤 영향을 주고 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모두 자신의 판단 기준만으로 모든 행동을 결정한다면 과연 인간 사회 자체가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해서 특별히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그 어떤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인가?
 
물론 원칙적으로 이 질문의 답은 '그렇다' 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그리고 인간은 이렇게 단순한 관점에서만 바라볼 수는 없다. 우리는 생각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이미 설명했듯, 우리가 돈으로 행복을 사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정의하고 끝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좀 더 원론적으로 들어가서, 그 행복이 과연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행복인지에 대한 것을 생각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나 우리들 각자가 만약 잘못된 행복을 믿고 있다면, 우리는 사실상 돈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는 셈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돈의 쓰임새가 결국 개인이 속한 전체에게도 결국 좋지 않는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잘못된 행복을 추구할 가능성을 얼마나 될까? 사실 이 행복이란 감정은 매우 본능적인 것이라서 이것을 다른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 잘 상상되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사실상 정말로 행복하기 때문에 그것을 한다. 그러니 잘못된 행복을 추구한다는 말 그 자체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현상 하나가 있다. 그것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는 '너 자신만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라' 라는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너무도 유명해서 이젠 들어도 별 감흥도 없다. 그런데 이 말이 정말로 그렇게 익숙해져서 듣고는 금새 머리 속에서 사라져갈 만큼 가치 없는 말일까? 그리고 정말로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왜 이런 말을 끝없이 메아리 치고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현재 자신이 느끼고 있는 행복을 부정하고 진정한 행복을 찾으라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할까?
 
사실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정말로 제대로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그런 깊은 생각을 하고 나면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느끼는 행복에 대해서 꽤나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그리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느끼는 행복을 신뢰할 수 없는 예로 세뇌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들 수 있다. 보통 세뇌되지 않는 사람들이 세뇌된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그들이 매우 어리석거나 답답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 세뇌를 당한 당사자는 스스로 그것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하는 이상, 다른 사람들의 그런 시선을 모두 거부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보다는 그런 판단을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믿는다.
 
세뇌된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뇌된 내용은 착각이 아니다. 사실이고 진실이며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실제로 느끼는 것이지 그냥 단순히 믿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세뇌를 통해 충분한 행복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이 행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또한 과연 우리 자신은 세뇌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원래 세뇌된 사람은 세뇌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생각은 오직 자신이 판단한 것이라고 그래서 확신이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모습이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모습도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는 넓고 편한 집에 사는 것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해외 여행을 가는 것이, 비싼 음식을 먹는 것을 행복하게 느낀다. 그런데 이것은 과연 정말로 세뇌되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스스로 세뇌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모순은 세뇌 당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신념이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시끄러운 이유는 바로 자신이 신뢰하는 신념이나 믿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여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충돌 주체들은 각자가 서로 믿는 맹목적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맹목적 믿음을 다른 말 하면 세뇌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 당사자들은 그것이 절대로 세뇌가 아니라고 부정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이런 불완전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돌아 봐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 자신이 믿고 있는 행복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행복하다고 느낄 때, 정말로 그것이 행복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오늘 정말로 가지고 싶었던 가방이나 차를 샀을 때, 정말로 그 자체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지, 아니면 얼마 전 비슷한 제품을 사서 자신을 무시하던 친구를 만나 자랑하고 싶은 것이 행복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돈은 분명히 그 제품을 샀고, 공식적인 가치는 그 비싼 가방이나 차가 가진 기능성이나 혹은 안정성으로부터 나타날 것이다. 그 누구도 그 제품을 자랑하기 위해서 샀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기엔 들어간 돈에 비해서 얻는 가치가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숨긴 채, 자신이 산 제품이 얼마나 좋은지를 홍보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고객이 제품을 홍보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제 기업은 명품이라는 이미지만 만들어 주면 된다. 그렇게 되면 고객들은 비싼 돈을 들여서 제품을 구입한 후, 그것의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스스로 그 제품들의 홍보 담당자의 역할을 한다.
 
제품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다른 여러 가지 가치들도 마찬가지 현상을 일으킨다. 여자를 처음 사귀는 남자들, 특히 첫사랑을 평생 잊지 못하는 남자들은 보통 그 첫사랑이 매우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남자들의 첫사랑에는 이루지 못한 섹스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다. 즉, 보통 첫 사랑읕 어리고 서툴기 때문에 제대로 사귀지도 못하고 손이나 겨우 잡다가 끝난다. 뭔가 하다가 만듯한 것이다. 그리고 이 느낌은 평생 아쉬움을 만들어 낸다.
 
물론 모든 사람의 첫사랑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실 남자가 느끼는 사랑의 많은 부분은 사실상 육체적 관계의 끌림으로 나타난다. 즉, 단지 상대가 같은 인간이지만, 자신에게 낯선 여자라는 존재이기에 끌리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이것을 사랑한다고 착각한다. 물론 사랑은 그것까지도 포함한다. 하지만 우리들의 머리 속에는 아주 오랫동안 교육된,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나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등등의 수 많은 아름다운 사랑 얘기로 이미 세뇌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에는 섹스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온통 정신적인 것이라고 이미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사실상 많은 부분의 성적 끌림이라는 것도 망각한 채, 자신이 마치 그런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즉, 실제와 머리 속 상상이 완전히 다르게 노는 것이다.
 
자연계에서 수컷들은 암컷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목숨을 건다. 그것은 초식동물이든, 육식동물이든, 양서류나 곤충 모두 마찬가지다. 자연은 강한 자가 후손을 남기는 방식을 원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수컷들은 강한 것은 증명해야만 후손을 남길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그리고 비록 문명에 의해 교육을 받고 이성을 가진 인간의 남성일지라도, 본질적으로 이것 자체는 동일하다. 단지 인간의 남자는 힘으로만 승부를 내지 않는다. 물론 육체적인 부분도 크게 작용하지만, 보통의 경우엔 경제력이 좀 더 중요한 경쟁력이 되곤 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감정이 하는 착각 중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는 분명히 어떤 감정을 느낀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 감정은 매우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추운 겨울날 눈이 내리는 해변에서 서 있는 상상을 하면서 감성으로 한껏 충만한 사람조차도 당장 그곳에서 한 시간만 있다가 보면 덜덜 떨면서 따뜻한 곳으로 가려고 한다.
 
사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우리에게 착각이 아닌 것은 거의 없다. 우리에게 유일한 진실 하나는,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 아니 생존을 위해 살아간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은 모두 자신을 좀 더 이득을 얻기 위해 좋게 작용하는 것들이다. 그것은 사랑이 되기도 하고 믿음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이득을 얻는 과정이 바로 행복을 얻는 과정이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득이 될 때 행복을 느낀다. 그것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에 대한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죽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자식을 잃었을 때 자신이 느낄 고통을 감당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결국 가장 숭고한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희생조차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선택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가치마저도 착각으로 인해 잘못된 생각을 하는 상황인데, 과연 우리 개개인이 느끼는 행복에 대한 착각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우리는 소중한 친구를 가졌을 때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친구가 소중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 좀 더 나은 조건이 되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친구 자체가 소중한 것이 아니다. 그 친구가 나를 위해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착각은 친구가 소중하다고 믿는다.
 
이것들을 정리하면, 우리가 돈을 쓸 때 그 돈은 가치와 만족감 그리고 행복으로 환산된다. 그리고 그 행복과 가치는 모두 자신을 얼마나 이롭게 해주느냐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 그런데 이 이로움을 착각해서 결국 엉뚱한 곳에 돈을 쓰게 되면 결국엔 다른 누군가의 이득, 즉 행복을 충분히 보장해주는 결과만 초래한다. 즉, 제품이 주는 고급 이미지에 혹해서 제품의 적정가 대비 훨씬 비싼 가격을 주고 샀다면, 본인은 어떤 만족감을 얻었을지 모르지만, 결국엔 그 제품을 만드는 회사의 이득에 크게 일조한 셈이 되고 만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도 돈의 흐름이기 때문에 그 돈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일방적인 돈의 흐름은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빈부격차가 심해진 사회는 전체적으로 불행해질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상대적 행복감으로 행복을 얻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소위 절약가들에게 낭비가들의 소비 형태를 비난할 수 있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에 돈을 쓰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뿐이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럴듯하게 이런 사회 문제가 발생되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상대적으로 낭비를 하고 사는 사람들을 마음껏 당당하게 비판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논리적으로만 보면 이들의 타당한 설명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사실상 그렇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의견 이면에는 단지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가치에 대한 거부감이 숨겨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정말로 사회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비난이나 비판이 아닌, 방향을 보는 것이 맞다. 즉, 화가 난 얼굴로 꾸짖기 보다는 부드럽고 웃는 얼굴로 저것이 좀 더 낫지 않겠냐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도 좋지만, 저기 더 나은 행복도 있으니 저쪽으로 가보는 것은 어떠냐고 조언해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누가 이렇게 조언을 하겠는가? 물론 형식은 이럴 수 있지만, 진정 마음 속에서 상대에 대한 아무런 비난의 감정이 없이 정말로 상대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그것을 조언해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진정한 의미의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래도 세상을 걱정한다고 믿는 절약가들의 비판은 유효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라도 어떤 식으로든 제어되지 않으면 행복하다는 착각에 빠진 많은 이들이 쓰는 돈은 정말로 금새 사라져버리고 말 테니까 말이다.
 
사실 심각한 문제는 돈의 쓰임에 대한 절약가의 입장에서 비판을 하는 사람들과 그 비판의 대상이 되는, 행복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냐고 되묻는 사람들이 사이의 갈등에서 발생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단 다툼이 일어나면 무조건 이기려고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지 육체적인 다툼이 아니라 단지 언쟁에 불과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이기려고 서로 그럴듯한 논리를 가지고 공격과 방어를 한다. 이때 절약가들은 사회 문제를 끌어 들이고, 비판을 받는 입장에 선 사람들은 자신의 느끼는 행복의 절대성에 대한 주장을 한다. 예를 들어 수천 만원 하는 오디오를 구입한 사람들은 그런 곳에 돈을 쓴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즐길 수 있고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충분히 경제적 능력이 되어 돈을 쓴다는데 왜 그렇게 비판을 하냐고 되 묻는다. 하지만 이들 역시도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 어떤 것에 돈을 쓰는 사람들에게 비판자의 입장에 서는 것은 다름이 없다.
 
보석을 좋아하는 여자를 비판하는 남자는 시골에 전원주택을 지은 후 거기를 주말 주택으로 쓴다. 그런데 왔다 갔다 할 때 쓰는 차의 기름값과 집 자체의 1년 유지 비용이 그리 만만하지도 않다. 아니 처음 지을 때부터 많은 돈이 들었다. 어쩌면 보석을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든 것이다. 그렇지만 보석과 주말주택은 다르다고 강변한다. 그리고는 보석 따위에 돈을 쓰기 보다는 이렇게 흙과 같이 사는 삶을 사는 것이 제대로 된 삶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둘이 만나면 서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고 상대의 입장을 비판하기에 바쁘다. 보석을 산 여자는 언제라도 보석을 팔아서 현금화 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전원주택을 가진 사람은 인간이라면 이렇게 자연과 벗해서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갈등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서로 방어논리만 개발되어서 결국엔 그것을 스스로도 믿기도 한다. 그래서 추운 날 미니 스커트에 스타킹 하나 신고 나가는 여자들은 그것이 자기 만족이라고 설명한다. 누가 봐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 입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것을 자신도 믿는다. 이 착각은 여자들만이 있는 공간으로 가보면 금새 드러난다. 그래서 남자들은 가끔 여중, 여고, 여자 화장실과 같은 여자들만이 있는 공간의 지저분함으로 인해 충격을 받기도 한다.
 
자기 나름대로라는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전자기기를 사는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도대체 그런 제품이 나오기 전에는 어떻게 세상을 살았을지 궁금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산 제품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한다. 제품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한다. 필요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쓰기 위해서 그 필요성을 만든다.
 
하지만 문제는 조금이라도 힘들게 써야 할 상황이 오게 되면 금새 포기한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필요한 것이 아니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카메라를 산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과정이다. 찍고 싶은 것이 있어서 카메라를 사야 하는데, 카메라를 샀으니 찍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 한 1년 버티다가 포기한다. 사진 찍으러 나가는 것이 귀찮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도 처음에 그냥 스마트 폰을 쓰면 되지 왜 카메라를 사냐고 물으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이유를 댄다. 왜 비싸고 좋은 카메라를 사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인터넷에 얼마든지 많이 설명되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선호도에 따라서 때로는 절약가의 입장에 서고, 때로는 낭비가의 입장에 선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 만약 늘 절약가 입장에 선다면 구두쇠나 자린고비가 될 것이고, 늘 낭비가의 입장에 선다면 금새 거지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돈은 늘 한정적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최대한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소비를 해야 한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 돈과 시간 노력 열정을 쏟을 수 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고, 후회하거나 되돌아갈 생각 자체를 안 하게 된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늘 방어 논리를 개발할 수 없다. 정말로 원한다면 왜 하냐고 누가 물으면 그냥 좋아서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를 물었을 때,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대답했던 어린 장금이의 대답처럼 말이다.
 
우린 좀 더 우리의 문제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절약가 입장에 섰을 때 가질 수 있는 착각과 낭비가 입장에 섰을 때 스스로 옹호하는 논리에 대한 한계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때, 불필요한 비난과 불필요한 옹호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인의 삶에 대해 좀 더 관대해질 수 있으며, 좀 더 진지한 접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함으로써 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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