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근대철학 강의를 보면서

아이루다 2015. 3. 16. 16:35

 
최근 EBS에서 근대철학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이석재 교수라는 분이 강의를 맡아서 진행하고 있는데, 나름 괜찮은 강의이다. 일단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는, 강의 자체가 어떤 판단이나 의견이 아닌, 그냥 철학자들의 생각 그 자체를 전달하려고 하는 점이다. 즉, 철학자들의 생각을 통해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철학의 중요 인물로 여겨지는 세 명의 철학자를 차례로 소개하면서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만을 차분히 설명해주고 있다.
 
강의를 진행하시는 교수님의 약간은 어눌한 말투도 좋다. 요즘 너무 장사꾼 같은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차별화된 매력이 있다. 그리고 확실히 공부한 사람은 다르다는 느낌도 든다. 내가 그리 이해하기 어려웠던 개념들을 나름대로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직접 쓴 책을 읽어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나의 이해력 부족 때문에 개인적으로 이런 강연이 참 좋다. 특히 칸트에 대한 부분은 정말로 마음에 든다. 순수 이성 비판이란 책을 사 놓고도 겨우 10장 남짓 읽다가 포기한 나는, 정말로 칸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도 포기 못하고 칸트 책을 별로도 해석한 책을 샀음에도, 그 책조차도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었다.
 
뭐, 이 글을 그 교수님을 보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개인적으로 감사하다.
 
이 강의는 일단 지금까지는 총 세 명의 철학자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각각 데카르트, 흄, 칸트인데 이들을 근대 철학자들이라고 일컬어지게 하는 시대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당시 영국에서는 뉴턴 이라는 걸출한 자연과학자가 출현했다. 그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서 지구 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중력 현상과 더욱 더 확장해서 지구와 달, 지구와 태양 사이가 유지되는 이유가 바로 중력의 힘이라는 것을 단지 수학적 기호만으로 입증해 내었다. 그런데 실제로 이것은 단순한 중력 법칙의 발견이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능력만 된다면 자연의 미래를 예측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우리는 정확히 그것의 원리만 안다면 이 지구상에 일어나는 모든 자연 과학적 현상을 예측 가능하다는 가능성 자체를 입증해 낸 것이다.
 
오늘날 내일의 날씨를 예보 받고 달과 화성으로 탐사선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것은 별 것 아닐지도 모르지만, 과거의 우리의 조상들에게는 - 이것이 가진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 한해서 - 커다란 사고적 혁명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당연히 당시 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가정 때문이었다.
 
사과를 높은 곳에서 놓으면, 이 사과는 절대적으로 밑으로 향해 떨어진다. 즉, 이 사과의 1초 후의 위치나 10초 후의 상황은 우리가 운동 법칙 공식을 이용해 계산 함으로서 예측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원리를 인간에게 적용시키면 어떨까? 우리 역시도 1초 후나, 10초 후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을 좀 더 확대하면 1년 후나 10년 후에 어떤 일을 할지 예측할 수는 없을까?
 
만약 이것을 예측 할 수 없는 것이 단지, 우리가 인간이 작동하는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라면, 과연 이렇게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존재로써의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실제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인 것인가에 대해서 당시의 철학자들은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인간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도덕과도 크게 맞물려 있다. 이 부분은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도 강조하는 부분인데, 만약 우리에게 어떤 자유의지도 없다면, 과연 도덕적 판단 기준을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던져진 것이다. 개나 고양이가 아무데나 똥을 싼다고 해서 그들을 비 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 역시도 어떤 생각이나 행동이 이미 타고난 상태로 결정된 상태라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무엇을 근거로 비난할 수 있겠는가? 물론 잘못에 대한 처벌은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이 거대한 시대적 격변을 배경으로 해서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등장했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정신과 육체, 두 가지로 분리함으로써 결정론적 세상에 대한 다른 해석을 시도했다. 즉, 물리적인 영향을 받는 육체는 비록 결정론적인 세상에 속해 있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정신은, 특히 이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요소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우리 인간이 과학을 연구하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힘으로써 이성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사실 이런 이성의 힘은 대단해서,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인간이 이룬 것들은 그 당시 사람들로써는 상상도 못할 수준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성은 실체적으로 하나의 요소로써 가치를 가질 수도 있다.
 
물론 이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그가 자연과학과 종교의 접점에서 타협 책을 찾은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몸과 영혼이라는 분리될 수 있는 개념을 설명함으로써 당시 기독교적 사고방식을 더욱 지지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후로 오랫동안 정신과 육체를 나눠 보는 것 사고방식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그 후 모든 철학자들이 이 이원론적 입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요즘에는 일원론, 즉 정신만이 실체라고 주장하는 유심론 혹은 관념론이나 반대로 물질만이 실체라고 주장하는 유물론이 더욱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무튼 데카르트는 이성의 존재에 대해 나름대로의 정의를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등장하는 철학자는 바로 흄이다. 그리고 그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이성의 존재를 매우 격하시켰다. 왜냐하면 사실 이성은 우리가 품는 욕망의 노예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일 일어나는 인간의 행동을 통해 증명이 가능한데, 예를 들어서 배가 고파서 빵을 먹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고 치자.
 
우리의 욕구는 딱 여기까지만 진행한다. 무엇인가에 대한 의도만을 설정한 후 끝난다. 그러면 우리의 이성은 매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성은 이제 어떻게 하면 빵을 얻을 수 있을지를 계산해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돈을 주고 사든, 밀가루로 만들든, 훔치든 간에 방법을 찾을 것이다. 정 방법이 없다면 포기할 수도 있다.
 
이것은 욕구가 이성에게 실행 명령을 내린 것과 같다. 욕구는 이성에게 빵을 구해오라고 명령을 내리지만, 어떻게 구해오라는 구체적인 지시는 하지 않는다. 그냥 빵이 먹고 싶다고만 말한다. 그러면 이성은 최대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빵을 구하는 것이다. 물론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면 욕구는 충족되지 않아서 기분이 나빠진다.
 
그래서 이성은 욕망의 노예로 묘사된다. 그래서 이성의 위치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심각하게 격하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점은, 데카르트가 말한 이성과 흄이 말한 이성은 사실 다른 개념으로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데카르트는 학문을 공부하고 이해하고 창조적 사고를 해내는 힘으로써 이성을 설명했다면, 흄은 욕구를 제어하려고 애쓰고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애쓰는 인간의 계산 능력을 이성으로 설명했다. 사실 이것을 명백히 말하면,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가 힘들다. 또한 데카르트는 이성이 욕구를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던 반면, 흄은 사실 여기에서 이성의 힘은 매우 미약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데카르트의 이성에서도 공부를 해서 자연의 이치를 밝히고 싶다는 욕구 그 자체는, 흄이 말한 이성과 같은 개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통해 이룩하는 것들은 단지 욕구를 만족시키는 결과만은 아닌 것이란 점이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이성의 능력이다. 우리는 이성의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자연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이때의 이성은 사실상 지성적 능력을 말하고 있다.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흄이 설명한 이성이 나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이성의 개념과 맞는다. 흔히 분노에 사로잡혀서 정신을 잃고 날뛰는 사람에게 이성을 찾으라고 주문할 때의 이성은, 지성적 가치로써의 이성이 아닌, 흄이 말한 제어력을 가진 이성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정의한 이성처럼 과연 학문을 연구하고 역사를 배우며 철학을 하는 인간의 능력은 무엇으로부터 구현이 되고 있을까? 이것을 전체적으로 재해석해서 이성의 개념을 크게 확대한 것이 바로 칸트이다. 칸트는 넓은 의미의 이성이란 것을 정의함으로써 이성이란 단어의 정의를 확대시키고 또한 데카르트와 흄의 이성과는 또 다른 해석을 해내었다.
 
칸트는 이성을 감성, 지성, 협의의 이성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각각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 그리고 그것을 판단해내는 인식 능력 마지막으로 관계 사이를 추론해내는 능력을 설명했다. 즉, 우리 인간의 활동에 있어서 모든 과정이 이성의 힘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표현한 것이다.
 
사실 우리의 욕구의 많은 것들은 감성능력으로부터 발생한다. 우리는 스스로 배고픔을 느끼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음으로써 배고픔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감성이다. 그리고 지성은 그것을 이미 저장된 정보를 통해서 해석해낸다. 즉, 인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지된 결과들은 다른 정보들과의 관계성을 추론해냄으로써 최종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결과가 된다. 즉, 밥을 먹고 싶다는 욕구를 통해 어떤 것을 먹을지를 결정하고 최종적으로 가진 돈과 갈 수 있는 식당의 거리를 통해 어딘가에 가서 밥을 먹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성에 대한 세 철학자들의 입장과는 별개로 그들은 각각 매우 중요한 생각들 하나씩을 주장하고 있는데, 사실 이것이 이성에 대한 해석보다 훨씬 더 흥미롭다. 또한 그것은 각각 또 다른 문제점을 낳게 된다.
 
일단 데카르트는 인간에게 있어서 정신이란 개념이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영혼이란 말로 해석될 수도 있는데, 사실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적 존재일 수 있는, 육체적 영역에 종속되지 않는 그 어떤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개념은 이성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동물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과 명확히 구분되어야 할 존재가 되어 버린다.
 
사실 데카르트의 시대만 해도 이것은 특별히 문제가 없는 사고 방식이었을 것이다. 원래 인간은 동물과는 분리된 존재라고 믿어졌으며, 이 지구상의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개념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환경론자도 없었고 동물 애호가들도 없었다. 인간 역시도 생존하기 위해 노력하던 존재 중 하나였으며, 우리는 자연을 통해 생존하는 것을 아주 당연한 권리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인간이 동물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만 있다고 주장되는 모든 것은 당연히 의심을 받게 된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이론 역시도 그런 의심을 받고 있다. 따라서 현대는 그의 이론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흄은 경험자로써 인간의 한계를 지적했는데, 사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통찰력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에도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해서 꽤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경험적 세계를 기반으로 한 판단은 사실 왜곡될 수 밖에 없으며, 또한 늘 진실일 수는 없다.
 
어제 해가 떴다고 해서 내일 해가 뜨지 않을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내일 해가 사라지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누구도 내일 해가 뜨지 않을 것이란 의심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해가 뜰 가능성이 절대적 사실로써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이 하는 모든 경험적 판단은 사실상 불명확하다. 이것이 흄이 말해주는 우리의 문제점이다. 개인적으로는 흄이란 철학자에 대해서 이름만 들어봤고, 그 생각을 처음 들어봤는데, 정말로 중요한 통찰력이다. 이성의 개념을 욕망의 노예로 이해한 것도 그렇고, 그는 사실 꽤나 중요한 몇 가지 것들을 지적해준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도 철학자였다. 즉, 사고하는 존재로써의 인간에 대한 부정은 끝까지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공감능력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한계점을 극복하려고 시도했다. 즉, 우리가 단지 욕망의 노예만은 아님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사실 이것 역시도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판단이다. 하지만 우리의 공감능력은 우리가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얻게 된 능력이다. 우리가 만약 공감능력을 얻지 못했다면, 우리는 이렇게 사회를 구성할 수도 없었고 이런 문명을 만들 수도 없었다. 즉, 공감능력은 우리가 이룬 문명의 필수요소이지,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는 능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흄은 인간을 기본적으로는 동물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가정을 함으로써 사실상 어떤 한계점을 넘어선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생각을 하면서 사는 존재인 인간이, 스스로를 동물과 같은 격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며,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칸트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매우 사고적 전환을 보였다.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전환이라고 말할 만큼 큰 것인데, 그것은 바로 세상이 존재하고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가 이해하는 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입장 역시도 오늘 날 시선에서 보면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인식론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한 시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사물을 돌이라고 여길 때, 그 돌은 원래 돌이기 때문에 돌이라고 느끼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돌이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돌이라고 느낀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명 사회에 속해서 살아가면서 어려서부터 아주 다양한 인식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인간 범용적인 범주가 존재하는데, 그것을 카테고리화 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즉,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분류하는 방법론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기억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새로운 외부의 사물을 인식할 때는, 과거에 이미 저장된 정보들이 활용이 된다. 즉, 우리는 이미 저장된 기억을 통해서 지금 막 도착한 새로운 사물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이 기억이 다르다. 즉, 우리는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돌을 단단한 것으로, 어떤 사람은 돌을 무기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음식에서 매우 잘 나타난다. 그래서 김치는 한국인들에게는 맛난 먹거리인지만, 외국의 어느 나라에서는 코를 움켜쥐고 피하고 싶은 음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의 기반은 바로 기억이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통해 기록된 자신만의 인식 틀을 통해서 그것을 해석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돌을 보고 돌이라고 칭하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그 돌이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이것을 극복하는 힘으로써 공통 상식을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긴다. 그 공통 상식이란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무조건 주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사실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우리가 교육이란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명으로부터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그것이 없다. 하지만 그도 인간이다.
 
그런데 이 칸트의 사고는 사실 동양에서는 아주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즉,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가진 뜻과 거의 같다. 불교 경전인 화엄경의 핵심 사상으로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다는, 어둠 속에서 해골 속 물을 마셨던 원효 대사의 깨달음 속에서 바로 인간의 인식 방법에 대한 작동 원리의 본질이 드러나고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사실 이 인간 주체적 인식 방법의 문제점은 아주 다양한 경전들을 통해 설명되었었다. 인도 경전에서는 세상을 마야라고 부르는 환상이라고 보기도 했었다. 즉, 우리가 느끼는 실체는 사실 정말로 실체가 아닌, 머리 속에서 만들어지는 환상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칸트는 매우 논리적인 언어로 기술한 것이다.
 
칸트는 이것 말고도 또 하나의 중요한 의견을 하나 주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 도덕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다시 재정의 한 것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도덕을 다시 설명했다. 만약 인간의 어떤 행동이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라면, 그 어떤 종류의 선한 행동이라고 해도 그것을 도덕적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도덕적 이려면, 그것은 반드시 100% 의무감으로만 수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남을 돕는 것이 행복한 사람의 행동은 칭찬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도덕적인 것은 아니란 뜻이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든지 자신의 상황이 어려워지면 남을 돕기를 그만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행동 그 자체만 보면, 직업으로써 남을 돕는 사람이 더 도덕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도 보수를 바라고 하는 행동이기에 도덕적일 수는 없다.
 
이런 칸트의 생각은 정말로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이다. 우리는 흔히 다른 이들의 선행을 보고 그를 선한 존재라고 도덕적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는 그것이 좋기 때문에 하고 있는 것뿐이다. 단지 그 좋아하는 것이 남들에게 칭송 받을 만한 것을 좋아하는 뿐인데, 우리는 그것을 칭송한다. 반대로 그것이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비난한다. 이 둘의 차이는 단지 선호도일 뿐인데 말이다. 이것은 마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술을 먹는 사람을 비난하고, 반대로 술을 먹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완벽한 도덕이라면 완전한 의무감에서 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옳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의무감으로 할 때 그것은 도덕적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점이다. 우리는 자신이 그 자리를 떠나면 전 인류가 멸망할지라도 묶여 있지 않는 이상 도망가지 않을 수 없다. 단지 도망 가지 않으려면 지켜야 할 것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묶여 있지 않다면, 자신의 희생에 대한 아주 작은 보상이라도 챙길 수 있을 때만 거기에 남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순간에 비도덕적으로 변한다.
 
강의 중에 교수님은 이렇게 정리를 한다. 이성의 능력을 통해 세상을 인지하는 상황에 대해서 각각의 철학자들 주장하는 것을 정리하면, 데카르트는 이성으로 이해하는 세상과 실제 세상이 동일하다고 믿었고, 흄은 우리의 경험으로써의 한계점으로 인해 실제와 이성으로 이해된 세상이 분리되었다고 믿었으며, 칸트는 이성 그 자체가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 강연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래서 또한 어떤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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