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아이루다 2015. 3. 18. 10:48

 
인간은 아주 특별한 환경이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흔히 이런 인간의 사회성을 선택 가능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사회에 속해서 사는 삶은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혼자 살아가야 한다면, 그 결과는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즉, 그냥 외모만 인간일 뿐, 우리가 정의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회에서 분리되어 혼자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사회 속에서 자라 이미 성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배울 만큼 배우고, 혼자 살아갈 능력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그때부터는 어느 정도까지는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기는 힘들다.
 
사실 그래서 인간이 우리가 스스로 정의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사회에 속해서 받는 교육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은 단지 학교 교육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집에서 부모로부터 받는 교육, 친구나 기타 다른 관계들로부터 끝없이 자극 받고, 상처받고, 경계 짓는 훈련을 하는 것들의 총체적 합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교육 과정 속에서 대화 능력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물론 듣지 못하거나 말을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대화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주로 목소리를 써서 대화를 하는 것이 다른 대화 방법보다 조금 더 편한 것뿐이다. 우리는 손, 몸동작, 눈빛, 글 등을 통해서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현대는 점점 음성 대화보다 문자 기반 대화의 시대로 변하고 있다.
 
인간 사회는 매일 정말로 측정 불가능한 수준의 대화를 주고 받는다. 그런데 이렇게 주고 받는 대화 내용들은 주로 무엇으로 채워질까? 이것은 하나씩 설명하기도 힘들만큼 아주 다양하겠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떤 사회가 가진 성격이나 혹은 잠재적 문제점들을 파악할 수는 있다.. 즉, 그 사회에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가 조금이라도 더 언급이 될 것이고, 전체적으로 어떤 것에 더 관심이 있다면 그것이 주로 대화의 내용이 될 것이다.
 
우리는 대화가 가진 역할에 대해서 인식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대화를 통해서 참 많은 것을 한다. 일단 가장 첫 번째는 무엇인가를 배우는 기능이 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정보를 얻는다. 이것은 누군가 최근 이사를 갔다는 그리 중요하지 않는 정보일 수도 있고, 근처에 맛 집이 새로 오픈했다는 꽤나 중요한 정보일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정보들은 언제 어디에서 듣게 될지 거의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정보가 얻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보들은 개인의 삶을 좀 더 낫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것이 아마도 인간이 대화를 통해서 얻는 가장 실제적으로 이득을 얻는 요소가 될 것이다.
 
두 번째는 즐거움이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특히 재미난 대화를 나눌 때 많이 즐겁다. 그래서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밝고 경쾌하길 바란다. 우리는 상대의 엉뚱한 소리에 폭소를 터뜨리고 자지러지기도 한다. 이렇게 한참을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행복해서 좋다.
 
세 번째는 자신의 상황을 다른 이들에게 알릴 수 있다. 이것도 첫 번째와 비슷한, 일종의 정보 전달 과정이긴 한데, 아무튼 이것을 통해 자신의 현재 처한 상황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서 잠재적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최근에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졌다든가, 주변에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났다든가 하는 등의 이야기를 하면, 어떤 식으로든 조언을 얻을 수 있다. 어떤 병에 쓰이는 민간요법이라든가, 어떤 나쁜 일을 대처하는 현명한 방안들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이야기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너무 자주 이용할 경우, 사람들은 부담감을 느낀다. 그래서 적절하게 조절을 해야 하며, 또한 명시적으로 도움을 바래서는 안 된다. 우리들 대다수는 은근슬쩍 자신의 문제점을 이야기해서 도움을 받는 행동에 꽤나 익숙하다. 단지 그것을 스스로 잘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의 방법 중 정말로 좋은 행동은 바로 통성기도와 같은, 소리 내어서 자신의 요구를 말하는 행위이다. 이때 우리는 다른 이들이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바라는지 듣게 된다.
 
네 번째는 자기 자랑을 할 수 있다. 이것 역시도 너무 대 놓고 하면 사람들이 싫어하지만, 자연스럽게 일반 대화와 잘 섞으면 꽤나 본인의 기분이 좋아진다. 예를 들어서 최근 새로 산 반지를 자랑하고 싶다면, 그 반지가 손가락에 꽉 끼어서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면 된다. 그리고 손가락이 아프다면서 반지를 보여주면, 사람들은 그 반지가 어디에서 났는지를 자연스럽게 묻게 되어 있다. 그러면 최근에 남편이 사줬다든가 남자 친구가 사줬다는 말을 살짝 흘리는 것이다. 그리고 자랑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꼭 비싸긴 한데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은 꼭 덧붙여줘야 한다. 이것을 제대로 못하면 재수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다섯 번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합리화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정확히 판단하기 힘든 도덕적 문제나 혹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안을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의 암묵적 동의를 얻는다. 물론 그것을 위해서는 그 잘못됨에 대해서 완전히 객관적으로 이야기 하면 안 된다. 이때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약간의 과장을 섞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해야 한다고 조언할 필요도 없다. 이미 다들 워낙 잘해서 하지 말라고 말려야 할 형편이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요즘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술에 취해서 늦게 들어와 부부싸움을 크게 했다면, 이 문제를 친구에게 이야기 할 때는 남편이 일주일에 서너 번 늦게 들어온다고 해야 한다. 사실 그랬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고작 일년에 한 번 정도나 그랬을 것이지만, 대화를 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마치 매주 그런 것처럼 말해야 한다. 그래야 친구가 같이 남편 욕을 해주면서 부부 싸움에서 문제의 당사자가 남편이라는 의견에 동조해준다.
 
여섯 번째는 대화를 통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 우리는 딱히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해결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대화 자체를 하고 상대가 그것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풀린다. 이것은 다섯 번째 효과에서 연장되는 것인데, 자기 합리화가 주는 혜택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길 원해서 그 문제를 끄집어 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 번째인 자기 상황을 남들에게 알려서 예측 불가능한 도움을 얻거나 혹은 조언을 얻는 효과를 불러 일으키는 것과도 연결이 된다.
 
대화는 이렇듯 많은 목적과 효과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이것 말고도 더 한참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주로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만 대화를 바라본 것이다. 그렇다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 대화를 바라보면 어떨까? 우리는 말도 하지만 들을 일도 꽤나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즐겁기만 하고 끝나면 되는 대화가 아닌, 뭔가 진지한 대화를 듣는 입장에 대해서 바라보자.
 
우리는 보통 상대가 어떤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을 듣는 입장에만 서도 심각해진다. 사실 표정으로만 보면 말하는 사람만큼이나 심각해 보인다. 그리고 이 효과가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 상대가 자신이 가진 문제를 자기 일처럼 생각해준다는 인상을 받게 해준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치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어떤 위험에 노출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 상처 받는 이유가 된다.
 
흔히 우리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상처를 받는 것이 상대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이야기 하거나, 배려심이 없거나, 예의가 없이 말할 때라고 알고 있다. 실제로 이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어서 성인이 된 후에도 변함없이 상처를 주는 것은 맞다. 그래서 우리가 주로 다른 이들에게 받는 상처라고 하면 이것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상처를 받긴 하지만, 나름대로의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즉, 어떤 식으로든 이런 상처는 어느 정도까지는 견뎌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견뎌낼 수 있는 만큼만 관계를 유지하는 선택을 하곤 한다.
 
그런데 이런 직접적인 상처를 주는 말들이 아닌, 서로 진지한 대화를 주고 받는 사람간에서도 상처는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이 상처는 직접적인 상처보다 훨씬 더 깊고 오래갈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진지함으로부터 받는 상처이기 때문이다.
 
일단 좀 더 흔한 말하는 자, 즉 화자 입장에서 받는 상처를 생각해보자. 친구를 만나 자신의 심각한 고민을 털어놓고, 아무튼 딱히 해결책을 원하지는 않았어도 들어주길 바래고, 자신의 입장에서 같이 바라봐 주길 바래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했을 때, 일단 첫 번째로 건성으로 듣는 상대의 태도에서 상처가 난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린다든가, 자꾸 주변에 시선을 돌린다든가 하면 그렇게 된다. 그리고 보통 이럴 때는 그것에 대한 대화를 더 이상 하려고 하지 않게 된다.
 
두 번째는 그 자리에서는 충분히 진지하게 들었던 것 같은데,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는 마치 그때 기억이 모두 사라진 듯 들었던 기억 그 자체를 거의 못하고 있을 때이다. 이때도 역시 큰 상처는 아니지만, 실망을 느끼고는 다시는 그 친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세 번째는 자신이 털어놓은 그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그 친구의 입을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알려졌을 때이다. 이것은 사실 관계를 끊겠다는 소리와 같지만, 우리는 관계를 그리 또 쉽게 끊지 못한다. 이것과 비슷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여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재미의 요소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도 마음에 큰 상처를 받지만, 다들 웃는 자리에서 갑자기 얼굴을 붉힐 수 없어서 속으로만 삭히는 경우도 흔하다.
 
이젠 반대로 듣는 사람 입장에서 받는 상처를 생각해보자. 사실 대화 중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종류의 상처 중에서 가장 파악하기 힘든 것이 듣는 사람 입장에서의 상처이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 상처를 받으려면,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말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만, 듣는 능력은 부족하다. 사실 말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쉽고, 듣는 것은 바로 공감능력을 기반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하고 싶어도 못한다.
 
우리는 잘 들어야 한다는 말을 조언으로 듣곤 하지만, 사실 잘 듣는 것은 고도의 능력이다. 왜냐하면 공감능력 그 자체가 그리 쉽지 않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좋은 음악을 구분해 내는 능력과 같다. 그래서 그것의 구분 자체를 못하는 사람은 음악에 대한 깊은 대화를 하는 사람을 아예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모든 대화 주제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원래 상대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으려면, 그것을 이해할 수준의 경험이나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상대방의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잘 듣는 사람들은 매우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들인 것이다. 단지 성격이 잘 듣는 편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잘 듣기만 하는 것이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잘 듣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오판을 하곤 한다.
 
그래서 듣는 입장에서 상처를 받는 경험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일단 숫자가 압도적으로 적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공감이 잘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많은 듣는 행위에서 그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꽤나 이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언제든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리 심각하게 여기질 않는다. 즉, 말하는 것을 멈추는 것은 매우 힘들지만, 듣는 것을 멈추는 것은 꽤나 쉽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로 말하는 입장에 있길 바라지 듣는 입장에 서길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듣는 사람은 늘 소수이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입장이 된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굿 리스너, 즉 좋은 듣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도 상당한 능력이라서, 기회만 잘 잡으면 방송에 출연해서 큰 돈을 벌 수도 있다. 단순히 인간에 대한 이해만 어느 정도 되고, 잘 듣는 능력을 가졌으며, 개인적으로 기회가 주어졌다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듣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어떤 진지한 대화 속에서 나온 내용들이 주로 자기 합리화를 위한 것들일 때이다. 아마도 그냥 말하는 사람이 대화 자체를 통해서 신세 한탄하는 정도의 입장이라면 들어주는 것이 힘들긴 해도 그리 문제가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자기 합리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될 때, 말 그대로 듣는 사람은 이용 당하게 된다.
 
즉, 이때 듣는 사람의 입장은 어떤 배설소의 입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은 가진 감정적 찌꺼기를 말을 통해 배설함으로써 편해질지 모르지만, 듣는 사람은 그 배설된 말을 간직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게 된다. 그리고 말한 사람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배설 욕구를 느끼고는 들어줄 사람을 찾는다. 물론 듣는 사람 역시도 그것을 바로 버릴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원래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도 않는다. 잘 들어준다는 말에는 듣는 척을 잘한다는 의미가 아닌, 정말로 제대로 들어준다는 조건이 이미 적용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반복되면, 듣는 사람은 지쳐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상대는 고민을 말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어떤 변화도 없이,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고민을 털어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해결책도 생각해주고 조언도 해주지만 들을 때 뿐이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 똑같은 표정과 말투로 자신의 삶에 대한 문제를 털어 놓는다.
 
사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화자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의지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들은 스스로 해결하기 보다는 어떤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그것이 금방 해결되길 바란다. 돈이 없어서 고민인 사람이 돈이 없어서 고민을 늘어놓는 것과 같다. 돈이 없다면 일을 하면 된다. 그러면 그런 고민을 털어놓을 시간도 없이 바쁘다. 그리고 돈도 생기니 고민 자체가 안 생긴다. 그런데 여기에서 돈을 벌 생각은 안하고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돈 많은 남자를 만나거나, 로또에 당첨되거나, 일면식도 없는 돈 많은 친척이 많은 유산만을 남기고 혈혈단신으로 죽길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심각한 상황은, 현재의 자신의 상황이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문제를 끝없이 다른 이들에게 전가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부모나 친구나 사회나 기타 등등의 많은 것이 대상이 된다. 사실 그 말들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이것은 사실 확대된 것이다. 부모나 사회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것이 망쳐졌다고 믿는 태도가 문제가 된다.
 
이것은 일종의 우울함과 분노의 오로라가 퍼지는 것처럼 듣는 사람에게도 전염이 된다. 즉, 이런 종류의 화자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힘이 빠지고 같이 우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도 일종의 상처가 된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만남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친구가 자신이 아니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다. 물론 또한 마음 속에서 그 친구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얻는 비교행복에 대한 욕구도 있지만 말이다.
 
사실 이런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상처의 원인은 단 한가지로 압축이 된다. 그것은 진지하지 못한 것 때문이다. 우리는 다들 진지하지 않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이제는 진지한 것 자체를 견뎌내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것은 희화화 하려고 한다. 그러니 자신의 고민도, 상대방의 고민도 그냥 주고 받으면서 심적 위로나 받는 목적으로 서로에게 전달된다.
 
어떤 진지함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배설소로서 역할을 원하고, 또한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고는 마음 편해지면 된다고 생각하는 용도로써 대화를 주고 받는다. 물론 이것도 꽤나 좋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진지한 사람들에게는 끝없는 상처를 주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서 대화 내내 남편 욕하고 육아의 힘듦을 이야기 하다가 헤어질 때쯤 넌 왜 결혼하지 않냐고, 빨리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떠나는 친구의 모습을 바라보는 혼기가 꽉 찬 어떤 여인의 진지함 속에 담긴 씁쓸한 시선은 과연 무엇을 위해 상대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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