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진실의 이면

아이루다 2015. 3. 15. 09:16

 
새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비록 그리 좋지는 않는 카메라지만, 제법 망원 기능이 되는 카메라 하나를 들고 다니면서 눈에 띄는 새들을 찍었다. 물론 카메라의 한계와 사진을 찍는 장소의 한계로 인해서 희귀한 새들은 거의 찍지 못하고 보통 흔히 보이는 새들만 찍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하늘 높이 날아가는 큰 새를 한마리 보았다. 그리고 그는 비록 초점도 잘 맞지 않고 흐릿하지만, 그 새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그 새가 독수리 같았다. 물론 그는 독수리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 몰랐지만, 그냥 독수리 같았다. 아니, 독수리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매우 행복했다. 자신이 독수리같이 희귀한 새를 찍었다는 사실 때문에.
 
기쁜 그는 그 사진을 자신의 사진을 올리는 게시판에 올렸다. 독수리일지도 모르는 새라고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 그 사진 글에 댓글을 달았다. 그 새는 독수리가 아니라고. 사진이 흐릿해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독수리는 아니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독수리라고 믿었던 이 사람은 슬퍼졌다. 그 새가 독수리였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에, 괜히 그 새가 독수리가 아님을 알려준 사람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자신이 이 새가 무슨 새인지 궁금해한 것도 아니고, 꼭 독수리라도 주장한 것도 아닌데, 왜 그 새가 독수리가 아님을 명확하게 잘라서 말하냐고 말이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다. 그 새가 독수리가 아님이 너무도 명확한데, 그 새를 독수리로 믿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안타까워 보여서 그랬다고 했다. 자신은 진실을 밝혀야 할 의무감에서 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은 원래 가능하면 진실한 것을 추구한다고 덧붙였다.
 
이 말을 들은 독수리가 아닌 사진을 찍은 사람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독수리가 아닌 것을 밝히는 것이 진실을 알리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이 진실이 밝혀졌을 때, 무엇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 생각해봤는가? 사실 당신이 이 흐릿하게 나온 새가 독수리가 아님을 밝혔을 때, 두 가지가 바뀐다. 하나는 바로 사진을 찍고는 이 새가 독수리라고 믿고 행복해하던 내가 불행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새 감별력을 보여줌으로써, 당신의 똑똑함이 증명되어서 스스로 어떤 작은 만족감에 따른 행복함을 얻은 것이다. 즉, 이 진실은 나의 큰 행복을 당신의 작은 행복으로 바꾼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대꾸했다.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고. 자신은 단지 진실을 밝히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당신이 그 새를 독수리로 믿고 살아가는 착각에서 빼내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자 새 사진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말로 그렇다면, 당신이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방금 사랑하는 아이를 잃고서 너무 슬퍼서 아이가 천국에 갔을 것이란 다른 이의 말에 위로를 받고 있는 아이의 엄마에게 다가가, 아이가 죽어서 갈 수 있는 천국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 거짓말이 있다. 하나는 나쁜 의도를 가진 거짓말이 있고, 하나는 좋은 의도를 가진 거짓말이 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거짓말은 나쁜 것이란 의미가 강하다. 왜냐하면 비율상 거짓말은 나쁜 의도를 가진 것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또한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해도, 그 거짓말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는 것도 아니기에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거짓말보다는 진실을 선호한다. 더해서 그것이 자신의 일이 아닌 경우엔 훨씬 더 심하다. 보통 우리는 자신과 관련된 문제는 거짓말과 진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헤매지만,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에서는 단호하게 진실을 요구한다.
 
아무튼 이런 우리의 특징으로 인해서 우리는 곧잘 진실을 말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진실을 밝히려고 할까? 물론 기본적으로 진실을 밝히는 것은 중요하긴 하다. 누군가 거짓된 말로 다른 이를 현혹하고 있다면, 진실을 밝혀야 한다. 자신이 속한 단체나 조직이 어떤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밝혀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단지 이런 것뿐만이 아닌, 자신이 믿는 것과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진실을 밝히려고 애쓴다.
 
앞에서 예를 든, 새에 대한 진실 이야기에서 그 새가 독수리가 아니라고 설명한 사람은 과연, 무엇을 위해서 그것을 말해줬을 지를 잘 생각해봐야 한다. 사실 그 사진이 어디엔가 출품될 것도 아니고, 그 새가 독수리이거나 비둘기이거나 참새라고 해도, 사진을 찍은 당사자가 그 새를 독수리로 믿고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
 
그나마 그 사진이 매우 명확히 잘 나온 것이라면, 정확히 지적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 그 사진으로부터 독수리의 실제 모습을 착각하여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흐릿한 사진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새가 독수리가 아닌 것을 밝히려고 한 것일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했다. 새의 지식에 대한 자랑으로 얻는 만족감으로 발생되는 작은 행복감, 이것이 바로 그것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런 행복을 얻기 위해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 그 자체를 추구하는 인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을 제외하면 단 하나의 행동도 가능하지 못하다. 즉, 우리는 모든 결정 과정에서 행복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둔다. 단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어리석은 짓을 해서 스스로 불행함을 만드는 이들은 단지 무리한 욕심을 냈거나, 이득 계산을 잘못해서 그런 것뿐이다.
 
그래서 진실을 추구한다고 믿는 사람조차도 그 진실을 추구하는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다가 보니, 다른 이의 행복을 침범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물론 그 행복이 매우 부조리하고 나쁜 것이라면 사회의 건강함을 위해서는 좋다. 하지만 전혀 그런 것이 아닌, 그냥 거의 영향도 없는 것이라면, 왜 그것을 말하려고 할까?
 
친구가 어떤 새로운 제품을 사고 좋아하고 있을 때, 비록 그 제품에 대한 좋지 않는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다고 해도, 이미 결정된 상황에서 그 소문을 알려주는 것이 과연 정말로 친구를 위하는 것이며, 진실을 추구하려고 하는 목적인 것일까? 당연히 전혀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목적으로 끝없이 다른 이들의 삶을 재단하고 판단한다. 또한 그것에 대해서 사실상 진실인 것도 아닌, 그냥 소문으로 아름아름 알게 된 것들을 마치 진실처럼 떠들어댄다. 그리고 끝없이 참견하고 끝없이 간섭한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말들 뒤에는 오직 말하는 당사자의 작은 행복함만이 숨겨져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는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런 말은 딱히 해달라고도 안 했고, 알고 싶지도 않은데 왜 말해줬냐고 따지기도 힘들다. 설령 그런 지적이라도 하면, 자신은 상대를 위해 일부로 알려준 것인데 그것을 그렇게 해석한다고 하면서 섭섭해하기 마련이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또한 그런 반응을 보일 뿐이다. 여기에서 스스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되겠다고 반성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의 삶이 다른 이들의 의견에 의해서 끝없이 영향을 받는 이유가 바로 이 진실 추구에 대한 정당성 덕분이다. 우리는 진실을 추구한다는 명분과 그 진실을 상대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욕구로 인해서 끝없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더해서 그것이 진실일 필요도 없다. 결국 자신이 얻고자 한 행복을 얻었으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좀 더 좋지 않는 형태로 바뀐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더해서, 상대가 가진 행복을 의도적으로 뺏으려는 짓이다. 이 역시도 진실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인해 벌어진다. 그리고 상대방의 행복에 대한 질투심으로 인해서 그것을 망가뜨리고, 그것을 통해 상대가 불행해지면 행복감을 얻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행동들조차도 진실함을 밝히려 했다는 스스로의 합리화에 의해서, 자신이 질투심에서 그런 일을 저지른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는 당당해지게 된다. 그리고 다음에도 이것을 반복한다. 진실을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진실을 밝히는 것은 오직 남들의 입장에만 한한다. 만약 자신이 행복하다면, 그것의 숨겨진 진실을 밝혀서 불행해짐을 경험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해도, 스스로 착각이라고 해도, 딱히 몰라도 상관없는 거짓이라면 그것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만약 그것을 두고 진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끝없이 원망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서로 진실해질수록 우리가 속한 사회가 좀 더 나아진다. 전체적으로 비용도 감소한다. 좀 더 진실해지면, 서로 좀 더 믿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고, 좀 더 단순하게 살아갈 수 있다.
 
진실은 사실 그래서 좋은 것 뿐이다. 그렇지만 또한 우리는 평생을 인간 사회에 속해서 살아간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속한 사회의 건강함이 매우 중요하게 여길 요소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하면 진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처음 모피어스를 만난 자리에서 한 가지 제안을 받게 된다. 그것은 바로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을 선택하는 것인데, 파란 알약을 먹게 되면 원래 자신이 속한 안전한 가상 세계 안으로 들어가고, 빨간 알약을 먹으면 진실하지만 참혹한 현실의 세계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많은 관객들은 당연히 진실을 요구한다. 그래서 네오가 빨간 알약을 먹길 바란다. 하지만 그 선택의 당사자가 자신이며, 그 후 삶을 알고 있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그때도 빨간 알약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그때에도 당연히 네오에게는 빨간 알약을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자신의 네오의 입장일 때, 최종적으로 빨간 알약을 먹을 결정을 할지는 꽤나 의문이다. 이것이 바로 남들에게는 불행하더라도 진실함을, 자신에게는 진실 여부에 상관없이 행복함을 목적으로 하는 우리들의 고유 특징으로부터 나타날 수 있는 현상 중 하나이다.
 
또한 이런 생각도 든다. 그것은 바로 비록 거짓이라고 해도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꼭 진실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어린 시절에 잃어버린 자식이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평생 살아가는 한 맺힌 부모의 마음에 꼭 그 자식의 사망 진단서를 가져다 보여줄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타인의 진실에 대해서 전혀 관용이 없다. 우리는 자신에게 하듯 타인에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도 스스로 그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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