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논리 왕, 인간

아이루다 2015. 3. 13. 10:01

 
신을 믿는 사람과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신의 존재 유무를 두고 서로가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기 시작했다.
 
먼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물었다. 도대체 신은 어디에 있냐고, 있다면 왜 볼 수 없으냐고 했다. 그러자 신을 믿는 사람이 대답했다. 비록 우리가 신을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서,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신이 존재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라고 단정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되물었다.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사랑과 믿음 같은 것을 당신이 눈으로 볼 수 있냐고 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하거나 오직 물리적으로 명백히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이번엔 신을 믿는 사람이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믿는 진화론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자신은 도대체 원숭이가 진화를 해서 인간이 되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 오랜 시간 동안의 진화의 과정에 어떤 실제적인 증거가 있냐고 물었다. 그 모든 것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일이며, 확신할 수 없는 추정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대답했다. 단지 과거의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일어난 진화의 과정을 직접 눈으로 관찰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일어나지 않는 사건으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과학은 화석이나 유전자와 같은 직접적 혹은 간접적 증거를 통해서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충분히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신을 믿는 사람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이 두 사람이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지적하는 상대의 의견을 반박하기 위해서 쓴 논리가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눈으로 보지 못했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은 그리 달라 보이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을 믿는 사람과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모두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논리를 이용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왜 동일한 하나의 논리가 양쪽 모두에게 사용되어도 그리 무리가 없어 보일까?
 
인간은 살아가면서 꽤나 자주 의견 충돌을 경험한다. 단지 차이라면, 그 의견 충돌을 다루는 성격이다. 어떤 사람은 상대의 의견에 대해 보통은 그냥 인정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어떤 것이라도 자신과 충돌이 일어나면, 무조건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의견을 인정하도록 설득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의견 충돌은 일반적으로 약간의 언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으나, 어떤 경우엔 사회적으로나 한 분야에서 큰 이슈화가 되거나, 개인간의 감정이 크게 상하고 결국 육체적 충돌까지 야기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런 언쟁을 공식화 시키면, 바로 토론회가 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토론회는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대해서 서로 반대로 해석하는 두 그룹을 참여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 자라에서 참석한 이들은 각자의 주장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의견을 옹호하고 상대의 입장을 공격한다.
 
그런데 이런 토론회를 듣다가 보면, 둘 모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둘 모두 틀리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토론회에서 직접 화자가 된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고수한다. 그리고 보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입장을 정한 사람들 역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유지한다. 즉, 이미 입장이 정해진 사람들은 이런 토론회로는 거의 변화되지 않는다.
 
이런 토론회가 사실상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은 바로 어떤 입장인지 명확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보통 토론회 참석자들 중에 누가 좀 더 논리적이며 설득력 있게 말을 하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통 이런 사람들은 그런 대화 주제 자체에 관심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들은 토론회 자체를 잘 보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토론회는 이미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정한 사람들이 본다. 사실상 볼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이들은 단지 자신의 의견이 맞는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증명 받기 위해서 토론회를 보는데, 사실 보는 시점이 이미 그렇게 틀어져 있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어떤 대화가 오고 가도 결국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하고 만다.
 
그런데 이런 토론회를 보다가 보면, 앞에서 이야기한 신에 대한 토론처럼 같은 원리가 서로 다른 입장을 입증하는데 사용되곤 한다. 그리고 이것이 통하는 이유가 바로, 어떤 예시를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에서 보고 싶은 데로만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언쟁을 하다가 보면 제일 자주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아라 라는 것이다. 이 말은 참 좋은 말이다. 자신이 의견이 옳다고 믿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을 가질 자유가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처음부터 말이 안되는 것이다. 만약 이 말이 제대로 된 말이 되려면, 우리는 그 어떤 말도 이야기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표현하는 그 모든 말은 모두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단지 그 말이 그 상대에게 그리 문제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라면 넘어가지만, 상대의 생각과 충돌이 날 경우엔 강요가 되는 것 뿐이다.

 

어떤 사람이 똥이 더럽다 라고 말했을 때, 똥을 먹는 것이 건강해지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의견을 강요하는 셈이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강요라는 것이 상대방이 의견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그 의견에 동의 하지 못해서 하는 말이란 것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 사실 모든 대화는 강요이다. 문제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의견과 충돌이 나는지 여부일 뿐이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어떤 사람이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하나 썼다. 그런데 그 글을 본 다른 사람은 왜 이런 글을 여기에 썼냐고 댓글을 달아서 비난했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은 그 비난 댓글을 본 후, 글을 읽고 의견이 맞지 않아서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보고 넘기면 되지 왜 그런 비난의 댓글을 다냐고 비난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사람은 최종 댓글에 이렇게 답을 달았다. 비난 댓글을 왜 다냐고 지적한 당신 역시도 그 비난 댓글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면 되지 왜 그 댓글을 단 것을 비판 하냐고 했다.
 
이 예에서는 총 4명의 등장 인물이 나온다. 최초 글을 쓴 자, 그 글에 비판적 댓글을 단 자, 그 비판적 댓글을 다시 비판한 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등장인물의 논리가 스스로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자이다.
 
이 이야기는 듣고 이해하면, 세 번째로 지적한 사람의 논리가 꽤나 웃기는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종류의 논리적 문제점은 매우 흔하게 일어난다.
 
어떤 행복 전도사가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좀 더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 가능하면 말을 적게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주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사람들을 설득한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말을 하는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다. 즉, 수천 명의 청중 앞에서 섰든지, 아니면 그것을 책으로 써서 냈든지 간에 상관없이 아무튼 그는 말을 하고 있는 당사자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듣기보다는 말을 많이 하고 다닐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불행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인가?
 
예전에 부자가 되는 법에 대한 책이 한참 나오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공통적으로 바라보는 한 가지 시점이 있다. 부자가 되는 법을 아는 사람은 왜 그런 책 같은 것을 쓰고 있을까? 그 책 내용에 따르면 충분히 다른 방법으로 훨씬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는데 말이다.
 
사기꾼들도 모두 같은 논리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라면, 왜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겠는가? 혹시 무인도에서 보물을 발견하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지, 아니면 혼자서 그것을 모두 차지하려고 노력할지 생각해보면, 사기꾼들의 논리가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사기꾼들에게 돈을 건네고 있다.
 
이런 스스로를 부정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이런 것을 명확히 보질 못할까?
 
우리는 흔히 모였을 때, 문제가 많은 세상에 대해 한탄을 하기도 하고, 비판을 하기도 하고, 부끄럽다고 하기도 하고, 불안해 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재단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너무 쉽게 다른 사람들이 삶을 평가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좀 더 다른 사람들이 아닌,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아니라 남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평가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남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그들이 듣지도 못하는 조언하고 있다. 과연 우리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것은 그냥 스스로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 다른 이들과 자신을 차별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즉, 그들을 염려하는 것이 아닌,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전체적인 논리적 문제점들은 모두 단 한가지로 인해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믿고, 논리적인 설명이라고 믿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한 주관적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다.
 
컵의 물이 반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입장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다. 컵의 물이 반이나 있든지, 컵의 물이 반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은, 그 대상인 컵에 담긴 물 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는 사실상 모든 것을 자신의 머리 속에서 해석한 후, 그 결과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을 바로 인식이라고 부른다.
 
우리 인간의 인식은 모두 머리를 거쳐서 해석된 후 표현되는데, 어떻게 그 어떤 의견이 객관적일 수 있을 것인가? 정말로 객관적인 판단을 하려면, 기록된 정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논리적 판단만을 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주 특별한 사람들 중에서 이것에 근접한 사람들이 있긴 하다. 과거의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 중에서 정말로 논리적으로 거의 완벽한 수준을 보여준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들은 천재였으며, 그것도 정말로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생각한 결과물이었다. 이것은 그래서 우리가 평상시 나누는 대화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문제는 주관적 입장이란 것 자체가 바로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이라는 것을 포함하고 있기에 더욱 문제가 심각해진다. 설령 어떤 의견이 주관적 입장이라고 해도, 그것의 결과에 따라 자신이 어떤 유불리가 없다면 그나마 우리는 합리적인 의견을 말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제 삼자의 입장이 될 때, 좀 더 객관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자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경우, 우리는 좀 더 심각하게 왜곡되고 만다.
 
즉, 주관적인 입장에다가 자신에게 좀 더 유리한 쪽으로 의견을 내놓으면서 그것을 객관적 사실이 냥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신을 믿는 사람이나 신을 믿지 않는 사람 모두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 위해서 경험적 기준을 제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마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경험은 오직 감각으로부터 발생하는데, 이 감각 자체를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은 이미 많은 사례를 통해 증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관철하기 위해서 그것을 무시한 채 응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봤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감각기관으로부터 오는 경험의 한계성과 문제점이 명시적으로 지적한 된 것이 이미 수백 년 전에 일어난 철학적 사고였는데 말이다.
 
사실 우리는 오감 중에서 시각의 신호를 가장 신뢰한다. 왜냐하면 가장 정보량이 많고 또한 가장 명확하게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빛만 충분하다면 우리의 눈으로 들어오는 신호들 속에 섞인 다양한 정보를 모두 분리해서 각자 다른 사물로 구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은 그렇게 명확하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봤는지 못 봤는지를 매우 중요한 증거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봤는지 못 봤는지 여부는 사실 그 어떤 증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보지 못했을 경우에, 그것은 있을지 없을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지 못했다는 것은 판단 불가능한 상태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다. 보지 못했으니 없다. 있는데 보지 못했을 뿐이다 라고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봤다고 해도 문제이다. 왜냐하면 오늘 경험했다고 해서 내일 반드시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오늘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했으니, 내일도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다. 당장 오늘 밤에 지진이 나면, 그것은 모두 헛된 믿음이 될 뿐이다.
 
경험의 세계는 절대로 완벽해질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수 많은 논리적 다툼에 있어서 경험의 기록을 이용한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 우리가 의견을 듣고 반박하고 주장하는 그 모든 과정이 바로 지속적인 인식 과정인데, 그 인식 자체가 바로 머리 속에 이미 기록된 기억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이 기록된 기억은 바로 모두 경험으로부터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 책에서 본 것이니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 것도 경험이다. 그리고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습득하는 것도 일종의 간접 경험이 된다. 우리는 결코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생각을 통해 무엇인가를 이해하거나 혹은 창조해 낼 수 있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도 이미 누적된 경험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경험이라는 기반 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는 없다.
 
그래서 만약 태어남과 동시에 오감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그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게 된다.
 
그런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에도 우리는 결코 다른 이들과의 싸움 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싸움의 순간들만큼은 그냥 자신이 옳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래된 자신의 신념에 기반한 것일 수도 있고, 단지 지고 싶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혹은 역사적 사명감이나 인류를 위한 대의적 행동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대충 그럴듯한 이유를 가졌다고 해서 우리가 주장하는 것들이 스스로 믿는 것처럼 완벽할 수는 없다. 그것의 가장 큰 이유는 우리들 대부분의 입장은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사회 그리고 기껏해야 인류 전체의 범위까지만 확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까지 포함한 주관적 입장은 대충 객관적인 입장처럼 보이긴 한다. 단지 문제는 그것은 오직 인간의 입장에서만 그럴 뿐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 의견을 반대하고 찬성하는 표현을 하는 존재들이 모두 인간이니,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동물들에게 같은 의사 표현의 능력이 있다면, 과연 그들 역시도 찬성을 할지는 의문이다.
 
개들이 개고기 유통에 대한 합리적인 의견을 내놓거나, 고양이가 유기 동물 처리 방안에 대해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면 과연 그들은 어떤 표현을 하겠는가? 또한 어떤 논리나 상황을 통해서 우리를 설득하려고 하겠는가?
 
우리의 한계는 명확하다. 하지만 우리의 신뢰는 한이 없다.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록, 더 오랜 시간을 경험할수록 마치 시간이 지나면 점점 단단해지는 콘크리트처럼 변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단단해 보이는 콘크리트 조차도 시간의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을 인정하기엔,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잘남을 너무 확신을 가지고 산다.
 
왜냐하면 잘남이 바로 행복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복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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