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아이루다 2015. 3. 4. 03:54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종류냐 만 다를 뿐, 크고 작은 고민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의 시점으로만 보면, 거의 어떤 고민도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하나나 둘뿐만이 아니고 수 많은 고민들이 한꺼번에 밀려와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허우적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현재 상태가 어떻듯 간에 상관없이, 우리는 전 생애에 걸쳐서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 고민은 삶의 일부라고 할만큼 흔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는 보통 어떤 고민거리가 생기면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서 없애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이 고민들을 해결하지 않은 이상, 우리는 마음 속 한 구석에 뭔가 하나 묵직한 돌이 올려져 있는 듯 느끼기에, 시시때때로 이것이 생각날 때마다 행복한 삶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고민이 왜 처음부터 고민으로 되었겠는가? 그것이 원래 쉽게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고민이 된 것이다. 그래서 쉽게 해결이 가능한, 배가 고픈 것과 같은 것들은 고민이 될 수 없다. 그냥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사 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을 먹을지는 고민이 되기도 한다. 특히 도대체 먹을 싶은 것이 딱히 없을 때는 한끼 식사를 결정하는 것도 고민이 된다. 물론 이것을 고민이라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여자가 뚱뚱함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다이어트를 원하는 여자에게는 밥 먹는 것 그 자체도 고민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고민을 해결하고 싶지만 쉽게 해결하지 못하자, 우리는 조금 다른 방법을 쓴다. 그것은 바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고민상담이다. 그리고 이 고민 상담은 반드시 어떤 전문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주로 친한 친구를 만나서 이뤄지기도 하고, 익명의 게시판을 통해 사연을 적기도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사실 이 시도는 해결을 찾기 위한 방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듯, 고민이 고민인 이유는 바로 그것을 해결할만한 쉬운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조언을 듣는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 방안이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이런 상담은 답답한 속을 털어놓고 조금 마음이 편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고민을 털어놓는 당사자가 인식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대부분의 고민 상담의 원래 목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만 어느 정도 되어도 우리는 좀 덜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고민이 담긴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한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거의 많은 고민들이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갈등이라는 점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조합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이 조합은 총 세 가지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중에서 첫 번째 조합은 바로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고민이다. 이것은 주로 행복한 고민으로 알려져 있는데, 예를 들어서 휴가를 보낼 때, 바다로 갈지, 계곡으로 갈지를 결정하지 못해서 하는 고민이다. 좀 더 극적이라면, 남들은 하나만 합격해도 경사가 날만한 회사에 중복으로 합격되어서, 그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사실 이것도 고민은 고민이지만, 남들에게 잘못 말했다간 재수없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두 번째 조합은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의 고민이다. 그리고 이것은 첫 번째와는 달리, 그리 행복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주로 의무와 의무 사이의 고민이며, 둘 모두 별로 하고 싶지는 않지만, 반드시 둘 중 하나를 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생긴다. 이것은 결혼 후, 감당하기 힘든 남편의 폭력이나 바람과 경제적 능력이 없는 자신 사이에서 결혼 지속과 이혼 중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여자의 고민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인 셈이다. 이럴 때 여자는 어떤 것을 해야 하지만, 어떤 것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의 갈등이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많은 고민들의 근본적 형태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럴 때 보통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지만, 어떤 사정으로 인해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고 느낄 때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예를 들어서, 결혼을 결정해야 할 여자가 지난 몇 년간 사귄 남자의 경제적 능력 부족으로 인해 결혼을 망설일 때를 생각해보자. 이때 여자는 결혼을 전제로 수년간 사귄 시간을 배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이 남자와 결혼했을 때 자신에게 닥칠 경제적 문제점을 피하고 싶다는 욕구가 충돌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은 당사자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된다.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은 남자와의 신뢰를 지키는 것이고, 하고 싶은 일은 이 남자에게 벗어나 좀 더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남자를 만나는 것이 된다. 그나마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없다면, 여자는 좀 더 해야 할 일을 하려고 하겠지만, 당장 훨씬 나은 조건의 남자가 접근해 온다면, 사실 흔들리지 않을 여자가 없을 정도로 마음에 큰 고민이 생겨버린다.
 
그리고 이 세 번째 고민의 유형에서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소위 '양심' 이라고 부르는 개념이다. 즉, 우리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고 싶은 일은 주로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것이며, 해야 할 일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한 일이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이기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이기적인 행동을 할 때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우리는 흔히 양심을 꽤나 좋은 개념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양심적인 인간이란 말은 좋은 의미로 쓴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양심의 뜻과는 달리 양심에 숨겨진 의미는 생각보다 매우 계산적이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양심은 더욱 잘못될 수 있는 것을 막아주는 일종의 심리적 브레이크이다. 즉, 우리는 양심을 통해서 자신이 더 망가질 수 있는 것을 막는다.
 
사실 양심의 근본적인 정체는 바로 두려움이다. 자신이 비 도덕적이거나 범죄적 행위를 저지른 후 숨겼을 때, 그것을 다른 이들이 알게 되었었다면 당할 수 있는 더 큰 고통을 막아주는 장치인 것이다. 차로 사람을 치었을 때, 환자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한 사람은, 그 사람을 다치게 한 죄만을 처벌 받게 된다. 하지만 뺑소니라도 쳤다가 발각되게 되면, 이때는 이 사람은 거의 사회에서 매장되고 만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런 비 양심적 행위를 하게 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이 양심의 가책은 받는 것은 사실 두려움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이 두려움을 다르게 다룬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양심의 가책을 매우 쉽게 극복한다. 그것은 주로 어릴 때부터 자란 환경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데, 비 양심적으로 살아도 큰 문제 없이 살아가는, 아니 사실은 손해보다는 이득을 보고 살아가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사람은 비 양심적으로 살아가기가 쉽다. 왜냐하면 이미 부모의 삶으로부터 비 양심적인 삶는 것이 차라리 자신에게 더욱 더 이득이 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은 바로 양심의 작동으로 인해서 고민이 시작된다. 만약에 이때 하고 싶은 일을 해서 100% 좋아질 것이란 확신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무릅쓰고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다. 즉, 몇 년간 사귄 능력없는 남자를 버리고 능력 있는 남자를 선택할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가 없다.
 
즉, 이렇게 해서 지금 남자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는데, 만약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은 미래의 잠재적 두려움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양심이 제동을 거는 것이다. 거기에 한 10년 후, 자신이 버린 남자가 뒤 늦게 성공을 해서 번듯한 모습을 가정을 꾸리고 있는 모습이라도 보게 되면 도대체 자신의 10년 전 선택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또한 주변 사람들의 비난이 두렵기도 하다. 이러 상황에서 남자를 버리고 경제력이 더 나은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가 들을 수 있는 다른 이들의 도덕적 기준에 따른 비난을 견뎌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인다. 하지만, 사실은 지금 당장은 하고 싶은 일을 원한다. 단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혹시나 후회가 되거나 혹은 다른 이들의 비난을 받아서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나빠질까봐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다시 설명하면, 우리가 이 세 번째 형태의 고민을 하고 있다면, 우린 이미 그 해답을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당연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한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선택 할 때, 해야 할 일을 안 해도 되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을 해도 좋다는 다른 이들의 동의가 필요할 뿐이다.
 
사실 이것은 동의라는 표현을 썼지만,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한다면, 양심 세탁이나 혹은 자기 합리화를 위한 조언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이것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는다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표현을 하고, 반대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표현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고민을 듣는 사람들 역시도 이 미묘한 뉘앙스를 본능적으로 간파한다. 그래서 고민을 털어 놓는 사람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게 된다. 사실 이것은 듣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은 아니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뤄지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능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친구들의 경우에만 해당되고, 익명의 게시판과 같은 경우엔 아무래도 막말이 주로 나오는데, 서로 누구인지도 모르고, 얼굴을 맞댈 필요도 없으며, 아무런 이득을 주고 받지도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이들의 조언이 좀 더 사실적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세가지 고민 중을 다시 정리하면,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싶은 일은 행복과 행복 사이에서 더 행복함에 대한 선택,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일의 고민은 불행과 불행 사이에서 덜 불행함에 대한 선택,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의 사이의 고민은 행복과 불행 사이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형태의 고민이든지, 우리가 그 고민을 말할 때는 스스로 답을 알고 있다. 첫 번째는 어차피 행복과 행복이니 어떤 답을 고르든 상관이 없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답을 알고 있다는 점은 같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일단 두 번째 고민을 다시 생각해보자. 사실 우리가 진짜로 고민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바로 이 두 번째인 불행과 불행 사이의 선택이다. 우리가 이런 고민들을 다른 이들에게 털어 놓는 것은, 그것을 해결하기가 그리 쉬운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단지 말하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으로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힘든 고민이라고 해도, 사실 우리는 대부분이 그 답을 알고 있다는 점은 같다. 단지 그것이 행복한 것이 아닌 불행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기에 도대체 할 엄두가 안 나기에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래서 이 고민의 답을 알아도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즉, 답을 알아도 그 답을 실행할 엄두가 나질 않는 것이다. 수영을 배우려면 일단 물에 빠져야 하는데, 물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상황인 셈이다. 그리고는 자꾸 뒤를 돌아다본다. 혹시라도 물에 들어가지 않고도 수영을 배울 수 있는 대안이 있을까봐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머뭇거림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에게 자꾸 반복적으로 이야기 한다. 그런데 이것을 자주 반복적으로 하다가 보면, 이 고민을 해결하는 것 자체가 인생에 있어서 너무 큰 힘든 결정이라고 스스로에게 주입시키게 된다. 즉, 자신이 겪는 이 고민이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극복하지 못할 것이란 근거 없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래서 또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고민을 털어 놓는데, 이때마다 고민의 크기가 더욱 더 커진다. 즉, 자신의 불행함을 더욱 더 심화 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그것들 중 선택을 하지 못함을 정당화 시키려고 한다. 이 두 번째인 불행과 불행함의 선택은 어떻게든 선택을 하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셈이다. 그리고는 뭔가 혹시라도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서 불행과 불행 사이의 선택이 아닌, 불행과 행복 사이의 선택이 되길 바란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자신의 고민을 증폭시켜서 삶을 우울하게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끝없이 넋두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수 많은 고민 상담을 통해서 그 스스로도 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누가 조언이라도 해주면, 모든 경우에 대한 방어 논리를 편다. 즉, 하고 싶지 않으니까 안할 이유를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고민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늘 반복되는 똑같은 고민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고역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아무리 조언을 해줘도,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점점 방어 논리만 강해지고, 잘못하다가는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욕만 먹는다.

 

마지막 세 번째인 행복과 불행한 것의 선택에 대한 답은 당연히 행복한 것을 선택하면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자꾸 고민을 하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고민을 털어 놓을 때 일어나는 일종의 자기 세뇌 효과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고민을 다른 이들에게 자꾸 이야기 하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상황을 왜곡시키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설명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자신 스스로도 그것이 왜곡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고 믿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결국엔 그것이 착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며,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역시도 충분한 이유를 갖게 된다. 즉,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양심의 가책만을 없애는 수준을 넘어서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누군가 와서 비 양심적인 행동을 비난이라도 하면, 참지 못하고 크게 화를 내면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린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에 동조해주는 사람들만을 만나면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인정받으려고 한다. 사실 그래서 이런 형태의 고민은 고민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그냥 합리화나 양심 세탁을 위한 절차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고민은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 할 과정이다. 우리는 고민 없이 살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고민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고민을 도대체 어떻게 다루느냐에 대한 것이다. 사실 행복한 고민은 그냥 쉽게 결정이 된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 사이의 고민도 양심의 가책을 줄이는 과정만 제외하면 나름대로 쉽게 해결이 된다.
 
가장 큰 문제는 두 번쨰인, 불행과 불행 사이의 고민인데, 이때는 단 한가지만 생각하고 살면 된다. 그것은 바로 그 어떤 선택이든 그것이 자신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주체적인가에 대한 것이다. 남편의 폭력과 자신의 경제력 사이의 고민을 하는 여자는 남편을 떠나야 한다. 그것이 좀 더 주체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다른 이에게 종속적인 위치에 놓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고민을 만들 수 있는 위치로 자신을 끌어다 놓은 것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고민이 생겼다면, 다른 이들에게 말할 필요가 없이 결정해야 한다. 물론 잠시 힘들어서 넋두리는 할 수 있지만, 가능하면 짧게 끝내야 한다. 말만 하는 것은 사실 정신적 마약을 맞는 것이어서 잠시간 편해질 수 있지만,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지고 그래서 자신의 삶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망가져가게 된다.
 
적어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미 모두 답을 알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행동을 위한 용기뿐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걱정과 고민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야기인데, 흔히 걱정을 고민으로 많이 착각한다. 그리고 사실 걱정도 고민의 일종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다. 단지 걱정은 보통 새로운 요소인,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선택이 하나 더 추가 된다.

 

아주 쉬운 예로, 먹고 사는 것이 걱정이 되는 젊은 사람이, 이 걱정을 해결하는 가장 괜찮은 방법으로, 현재로써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해결책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실제로 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일반적인 해결책이 모든 이들에게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걱정은 사실 두 번째인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의 고민 중에서, 그 해야 할 일을 실제로는 할 수 없을 때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고민이 걱정으로 느껴지면, 사실 그냥 포기하는 것이 좋다. 할 수 없는 일을 잡고  고민해봐야 답도 없다. 그냥 그런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다른 것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는 곧잘 그렇게 산다.

 

우리는 평생동안 결국엔 죽는다는 걱정을 안고 살지만, 살아가는 동안은 최대한 그것을 잊고 산다. 이것이 사실 걱정을 대하는 가장 현명한 마음이다. 대신 자신의 현재 상태를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거나 혹은 자존감이 떨어지는 상황이라고 해도, 스스로가 그 정도 밖에 되지 못함을 인정하고 다른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폭력을 휘둘러도 이혼할 엄두가 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냥 그런 남편과 살면서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 살면 된다. 적은 돈을 벌든, 뭔가를 배우든 하면서 살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존감이 높아져서 결국 그곳에서 탈출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친구를 만나서 매일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 눈물을 쏟고, 자신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산다고 해서 그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실의 이면  (0) 2015.03.15
논리 왕, 인간  (0) 2015.03.13
행복 선호도  (0) 2015.02.27
문제 풀기  (0) 2015.02.18
재미와 행복  (0) 2015.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