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문제 풀기

아이루다 2015. 2. 18. 07:25

 
어떤 문제를 풀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그 문제에 대해 분석을 해서, 과연 이것이 어떤 답을 요구하는 질문인지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국어 시험문제라면, 지문을 먼저 읽어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주 듣는 말 중에서, 지문보다 문제를 먼저 읽으라는 말도 있다. 무엇을 물을지 알고 읽는 지문과,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읽은 지문은, 일단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문을 먼저 읽든, 문제를 먼저 읽든 상관없이 우리는 결국 질문의 의도를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자신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시간과 공간과 정보를 취득할 수 이는 도구가 차단된 일반 시험장에서는 불가능 하겠지만, 만약 오픈 북과 같은 형태의 시험이라면, 도서관에 가서 그 질문의 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식들을 찾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뭐, 이미 그런 것 없이 바로 답을 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세 번째 절차는 답을 적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 답이 맞는지 확인하는 일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이것이 문제를 푸는 가장 일반적인 절차이다. 그런데 한가지 빠진 것이 있다. 물론 이것이 단순한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이라면 그렇지 않을 수 있지만, 만약 이것이 인생이란 과정에서 치르는 다양한 형태의 문제라면 말이다. 즉, 종이에 인쇄되어 나오는 시험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각자 삶이란 큰 시험을 보면서 살아갈 때, 개별적으로 만나게 되는 예측 불가능하고, 다양한 형태의 문제들이라면 무엇이 빠졌을까?
 

그것은 바로, 그 어떤 것이 문제라는 것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0순위가 될 것이다.
 
말 장난 같지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면, 문제를 풀 방법이 없다. 즉, 우리는 종이에 인쇄된 방법으로 선생님이 내놓는 명확히 주어진 문제는 열심히 풀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는 자신의 삶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해서 결국 그 문제를 풀어내는 것은 고사하고, 문제 자체도 평생 보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된다.
 
사실 모든 형태의 문제는, 그 문제가 안보이면 풀 이유가 없다. 학교 시험도 마찬가지다. 만약 학교에서 시험을 보지 않는다면, 문제를 풀 이유가 없다. 우리가 문제를 푸는 이유는 단지 문제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 문제가 필요한 이들은 우리들 자신은 아니었다. 그것은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에서 필요로 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만 뽑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에게 그저, 자신의 현재 상태를 체크하기 위한 정도만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들 삶 속에 숨겨진 문제들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에, 훨씬 중요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간과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뽑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에게 고정되었고 확정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삶을 살든지 모두 우리들 자신이 책임져야 하며 감당해야 할 몫이다.
 
아마도 SF 영화처럼 서로 몸이 바꿨다면, 내 몸에 들어간 상대가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에 화가 날지 모르겠지만,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는 것에 매우 익숙하고, 이것을 의심하지도 않는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과연 어떤 문제가 있어서, 우리가 이런 형태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 어느 정도 만족하고 산다면 큰 문제가 없는 것이겠지만, 삶에 어떤 불안함을 느끼거나, 불만족스럽거나, 덜 행복하거나, 뭔가 늘 불만족하거나, 다른 이가 질투 나거나, 삶을 그리 살고 싶지 않거나,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거나, 남이 끝없이 밉건, 화나 분노를 참을 수가 없거나 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냥 그렇게 사는 나는 나 자신이니까 이런 모습들의 자신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 문제는 없는 것일까? 아니면 문제를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학교에서 시험지를 받았는데, 잘못 인쇄되어서 자신의 시험지만 백지로 있다면, 문제가 없다고 봐야 하는 것은 아니듯, 자신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때는 단지, 우리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르고 있을 뿐인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에 대해 욕망을 가지게 된다. 그나마 자신이 조금만 노력하면 실현 가능한 욕망 수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이 이루기 너무 힘든 욕망에 사로 잡혀서 평생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욕망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과 비교가 되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적당히 실현하면서 사는 사람은 거의 문제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로 문제가 없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어느 정도껏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차라리 현재가 불만족스럽고, 끝없이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명백히 문제가 되고 있음을 넘치게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불행함이다. 원래 불행함을 느낀 사람은 생각이 많아진다. 왜냐하면 그래야 행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열리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은 문제를 알아내는 과정이다. 그래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가진 문제들이 속속들이 드러난다. 그래서 평소엔 모르고 살았던 문제들까지 하나만 끄집어 내어도 넝쿨이 끌려오듯 계속 튀어 나온다. 그래서 감당이 안 된다. 불행함을 느끼는 이들은, 그것 때문에 생각하고 싶지 않는 자신의 문제를 생각해야 하고, 그것으로 인해 다시 또 모르고 지냈던 문제까지 마주하게 된다. 불행에 또 다른 불행이 겹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을 최대한 멀리하려고 애쓴다.
 
또한 행복한 이들은 지금 행복하기 때문에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해봐야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 그 자체를, 그것도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닌 것을 왜 한단 말인가. 그래서 결국 문제가 있든 없든 의식하지 못하든 간에 결론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정된다.
 
그런데 그렇다면 문제가 있는지 알 방법이 없는 것을 과연 정말로 문제가 없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최종 판단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가 받아 든 시험지가 백지라고 해서 정말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이미 인상을 쓰면서 시험 문제를 풀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평가된다고 해도 말이다. 더욱이 최고로 행복한 사람 역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다. 설령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한 사람이라고 해도 마지막 문제는 남는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생명체에게 있어서 죽음은 최고의 난이도를 가진 문제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문제를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사는 이유는, 이 문제는 평생 동안 풀어가야 하며, 그 답을 내는 순간 죽기 때문이다. 즉,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문제이기에 그것을 풀려고 하질 않는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것을 학문적 관점이나 종교적,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 어떤 노력을 하든, 죽음에 관한 문제는 우리 자신이 죽어야 풀린다.
 
그리고 이 죽음 말고도, 사람들이 가진 본질적 문제는 너무도 많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문제라고 느끼지 못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며, 또한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가족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바로 가족의 이득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가족간의 경쟁이 될 땐 문제가 된다. 결국 가족 이기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이런 좋은 것들조차도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기에, 그냥 그것을 좋은 것,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어떤 시험을 봐서 합격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합격을 했다면, 누군가는 탈락을 했을 것이다. 물론 우리 자신도 그럴 수 있는 입장이었으니, 이것은 공정한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확실하게 탈락했다. 이것도 문제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문제로 느끼지는 않는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그것을 문제로 느낀다. 그래서 경쟁 사회가 가진 잠재적 문제를 제기한다.
 
사실, 이런 문제들은 그냥 모르고 살아도 된다. 문제가 된다면 문제이겠지만, 그냥 모른 척 하고 살아도 큰 지장 없고, 또한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살았다. 더 큰 문제는 개인적 영역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고 싶어하는데, 그것으로 인해 일어난다. 우리는 도대체 자신의 행복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남들이 이구동성으로 행복하다고 하는 것들을 다하고 산다. 여행을 가면 행복하고, 나들이를 떠나면 좋다. 맛난 것을 먹을 때도 좋고, 쇼핑을 할 때도 좋다. 온천에 가서 몸을 담굴 때도 좋고, 멋진 펜션에 놀러 가 고기를 구워먹을 때도 좋다. 등산을 하거나 사진을 찍을 때도 행복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들을 때도 좋다.
 
그래서 자신은 행복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믿는 것과 진짜로 행복한 것은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그래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왜 여행을 떠나고 싶어할까? 그것이 행복하기 위해서 떠나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해야 행복하다고 믿으니까 그럴까?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지만, 사실 정말로 오랫동안 자신을 바라보고 생각을 해봐야 하는 문제이다.
 
과연 우리는 언제부터 여행을 떠나는 것을 행복의 상징으로 여겼을까? 물론 못 살던 시절엔, 해외 여행은 부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은 인생에서 한 번쯤은 해외 여행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행복인가? 아니면 행복 하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하나의 증거인가? 어디까지 여행을 해봤는지 서로 물을 때, 남들 앞에서 어디까지 가봤다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가는 것일까? 아니면 그 여행지에 가서 자신만의 감성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일까?
 
사실,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감성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은, 동네 뒷산에서도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해도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당사자가 그렇게 믿는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쇼핑을 할 때는 우리는 흔히 필요한 것을 사는 행복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새로운 것을 사는 행복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할 때, 다른 이들의 반응을 기대한다. 그래서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어도 된다. 단지 필요한 이유만 만들 수 있으면 된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믿지만, 사실 디자인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반응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 무엇이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지 계속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산다.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닌, 필요를 만들어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정작 필요한 참기름을 사야 하는 사람은 쇼핑이 즐겁지 않다. 왜냐하면 참기름을 샀다고 해서 새로운 것도 아니고, 그것을 들고 직장에 가서 자랑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네 슈퍼에 가서 참기름을 사오는 것은 단지 귀찮은 일일 뿐이다. 더해서 참기름 병은 디자인이 중요하지는 않다. 얼마나 편리하게 만들어졌느냐가 중요하다.
 
온천에 몸을 담글 땐, 그냥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것이 꼭 온천이 아니어도 된다.  등산을 할 땐, 등산을 하는 것도 좋지만, 다른 이들과 어울림이 있어서 좋다. 자신의 삶이 방안에 쳐 박혀서 지내는 그런 우울함이 아니고, 뭔가 활동적이고 다른 이들과 교류를 맺는다는 느낌이 좋아서 좋은 것이다. 거기에 등산을 끝내고 마시는 한 잔의 술은 기분도 몹시 좋게 해준다. 등산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술 한잔을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꼭 온천이 아니어도, 등산이 아니어도 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우리가 그것을 해서 행복하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다를까?
 
그래서 이것들은 모두 문제가 될 수 있는 잠재적인 요소들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누리고 느끼는 행복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가져봐야 한다. 그래서 정말로 무엇이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를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고 살아야 한다. 사실 이것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삶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정말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느끼는 행복의 많은 부분이 다른 이들의 평가에서 온다는 점이다. 우리가 맛난 요리를 할 때도, 새로운 제품을 사서 쓸 때도, 멋진 여행지를 갔다 올 때도, 아주 예쁘게 화장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한, 우리의 행복은 늘 다른 이들의 만족에 맞출 수 밖에 없다. 즉, 우리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닌, 남들이 그러면 행복할 것이라고 하고, 하고 나면 박수를 쳐줄 것들만을 하고 살게 된다.
 
사람은 자신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할 때, 완전히 집중할 수 있다. 온전히 모두 투자할 수도 있다.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갈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 행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행복하다고 믿기 때문에 더 이상 행복이 가진 잠재적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 문제를 생각해서 알아내 봐야 좋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즉, 이미 어느 정도 행복한 것까지 망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끝없이 욕망으로 치밀어 오른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끝없이 그것을 하면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다. 제품을 팔기 위한 기업이, 행복을 파는 장사꾼들이, 다른 이와 비교해서 행복을 느끼는 주변 사람들이 계속 이야기 해준다. 그래서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불행해진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불안해진다. 마치 그것을 안 하면, 삶이 불완전해질 것 같다. 남들이 계속 말하니, 행복하기 위해서는 해야 할 것들이 된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한 항목을 정해두고 숙제를 치르듯 처리 한다. 왜 그것을 하고 싶은지, 그것이 정말로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지 상관없이, 하고 나면 뿌듯하다. 어딘가를 다녀오고 거기에서 찍은 사진을 정리해두면, 뭔가 힘든 일을 하나 해낸 듯 하다. 원래 사진은 과거의 추억을 돌아가는 타임머신이어야 하지만, 우리들에게 사진은, 훈장이 된다.
 
사실 이 정도라도 행복하게 사는 것도 대단한 운일 수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욕심을 안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괜히 문제가 있는지 알아내고, 해결도 못하면서 그것에 대해 매달리는 것은 그리 좋은 태도는 아닌 듯 하다. 이것도 하나의 삶을 살아가는 길이니까 말이다. 단지, 너무도 많은 이들이 이 길로만 가려고 하니 문제가 될 뿐이다. 즉, 사회적으로 극단적 쏠림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있지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인 상태에서는 더 이상 뭔가 진행할 수 없다. 단 한번이라도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첫 번째 시도조차 못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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