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감각의 한계

아이루다 2015. 2. 11. 16:27

 
안경을 맞추러 안경점에 가면, 우선 시력을 측정하고 난 후 대충 눈에 맞는 돗수를 정해서 몇 차례 반복적으로 테스트를 한다. 그리고 난 후 적당히 교정이 되었다 싶으면 안경테에 맞게 안경알을 잘라서 끼운 후 쓰고 나오게 된다. 그런데 보통 이 시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간 어지럼증을 느낀다.
 
아마도 이 어지러움의 원인은 새롭게 착용한 안경에 아직 적응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상의 일그러짐이나 혹은 더 높은 돗수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 어지럼증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이후 며칠만 지나면 우리는 어지럽다는 느낌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또다시 안경을 맞추러 가면 동일한 현상이 일어난다. 우리는 안경을 새로 맞출 때마다 어지럽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는 것이 반복한다.

미국에서 진행된 어떤 실험 중에서, 정상적인 눈을 가진 사람에게 몹시 왜곡된 안경을 쓰게 해서 생활하게 하는 내용을 가진 실험이 있었다. 이 심하게 왜곡된 안경을 쓴 피 시험자는, 처음엔 너무도 어지러워서 일반적인 생활을 하는 것도 몹시 힘들어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놀랍게도 그는 그 안경을 쓰고도 마치 멀쩡한 안경을 쓴 것처럼 세상 사물을 인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경의 왜곡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왜곡된 상을 가지고도 정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눈에서 도착하는 일그러진 상의 정보가 오랜 시간이 흐르자, 그 상황에 적응된 뇌가 그것을 멀쩡하게 인식되도록 고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써 독일의 한 과학자가 모든 상을 거꾸로 보여주는 안경을 쓴 후 일반적인 삶을 살았다. 사실 이것이 얼마나 혼란스럽겠는가? 모든 것이 뒤집혀 보이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놀랍게도 일정시간이 흐르자, 더 이상 세상이 거꾸로 보이지 않고 정상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젠 이 안경을 벗으면 원래는 멀쩡한 세상이 뒤집혀 보였다. 이 역시도 일정 시간 동안 시각 정보가 뒤집혀서 도착하니, 뇌는 그것에 적응해서 그것을 정상적으로 보도록 고친 것이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가 바로 우리가 느끼는 그 자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서 시각을 통해 어떤 정보를 받아들일 때, 우리의 뇌는 마치 카메라에 찍힌 사진처럼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위의 실험 결과들을 통해 예상해 봤을 때, 이것은 사실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원래 우리의 눈은 늘 상을 거꾸로 맺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뇌가 늘 보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눈은 원래 미세하게 떨린다. 그것은 안쪽에 있는 망막을 가로막는 신경망의 존재를 시간 정보에서 빼기 위한 방법으로, 사실 무척 무식한 방법이긴 하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단지 눈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우리가 귀를 통해 듣는 청각, 혀로 느끼는 미각, 코로 받아들이는 후각, 피부를 통해 얻는 촉각까지 모두 그렇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해본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모두 같은 원리로 동작되고 있다. 우리의 오감은 단지 정보를 감지할 뿐, 실제로 이것을 하나의 최종 정보로 해석하는 것은 오직 뇌에서 담당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뇌는 이미 기존에 입력되어 있는 정보를 기반으로 하여 그것을 해석한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정보가 전달되어도 이미 기록되어 있는 뇌의 정보에 따라 그것은 모두 다르게 해석되고 만다.
 
우리는 특정한 외모를 가진 존재를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 거의 절대적 신뢰를 가진다. 하지만 사실 이것도 그렇게 단순히 볼 것만은 아니다. 좋은 음악이나 특정 색에 대한 색감도 마찬가지다. 후각, 미각, 촉각까지 모두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침이 고일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 누군가에게 구역질이 나게 된다. 우리나라 음식 중에서도 홍어를 삭힌 홍탁이라는 음식이 그런 종류이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김치를, 외국인들은 잘 먹지 못한다.
 
이런 감각의 본질적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각자 가진 감각기관과 그것을 최종 인식해내는 뇌의 활동으로 결론 낸 모든 정보를 진짜로 믿는다. 그리고 직접 보고나 들었다는 것을 기반으로 하여 매우 강한 확신을 갖는다.
 
사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직접 경험한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신뢰가 높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믿을 때는 주로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경험은 사실 모두 자신의 머리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없는 것이 있다고 믿을 수도 있고, 있는 것이 없다고 믿을 수도 있다.
 
이것과 관련되어 오래 전 실제로 일어난 사건 중 하나가 있는데, 예전에 태평양의 어느 한 섬에 거대한 탐험선이 도착했는데, 거기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 누구도 그 배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배에서 내린 작은 보트들만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큰 배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 원주민들의 생각엔 그렇게 큰 배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쓰는 크기와 비슷한 작은 배만을 인식하고 바로 옆에 아주 거대한 범선이 분명히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배의 존재를 아예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과 비슷하게 우리가 평범한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것 중 하나가, 그리 찾아도 없는 것이 엄마가 쉽게 찾아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 찾는 물건이 그 자리에 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과 의심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의해서 갈리고 있다. 즉, 엄마는 그것을 직접 거기에 둔 사람이라서 확신이 있고, 본인은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그 물건이 있는 자리를 직접 뒤져 보고서도 찾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이것을 우연이나 그저 재미난 에피소드쯤으로 넘기지만, 사실 여기엔 이렇게 중요한 인식에 대한 기본적 작동 원리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명백히 착각이 일어날 수 있음에도, 우리는 귀신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믿거나 각종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까지도 스스로 경험했다는 말 한마디에 신뢰를 보내곤 한다. 물론 그 사람들이 무조건 거짓말을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전혀 엉뚱한 인식을 했을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우리의 감각적 인식 능력의 문제는 분명히 존재하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 자체도 한계가 명확하지만, 경험적 사고 방식에 익숙한 우리들은 이것을 보통 간과하고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이다. 그래서 똑같은 것을 봐도, 똑같은 것을 냄새 맡아도, 똑같은 것을 느껴도, 똑같은 소리를 들어도, 똑같은 음식을 맛봐도 모두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한 채, 자신이 느끼는 것을 상대가 느끼지 못한다고 의아해 한다. 또는 그 느낌이 서로 다를 때, 자신의 판단이 맞는다고 우기면서 싸우기도 한다.
 
이 문제는 단지 감각적 경험의 영역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감각적 경험의 총합이 바로 우리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지식이며 기억이며 판단 기준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 경험적으로 쌓인 지식에 대한 부분에서도 크게 문제를 일으킨다.

 

반복적으로 언급했듯, 우리의 모든 감각적 경험은 각자마다 다르게 쌓여서 결국 모든 사람들 마다 고유의 기억과 정보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판단해내는 그 모든 것들의 기준은 바로 각자의 머리 속에 있는 정보를 이용한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아예 서로 다른 잣대를 가지고 같은 대상의 길이를 잰 후에 각자가 잰 길이가 맞는다고 우기는 꼴이 된다. 이미 잣대의 수치가 다른데, 어떻게 같은 값이 나오겠는가? 누구는 센티로 누구는 인치로 누구는 피트로 재서 서로 수치가 맞다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의 기억에 그리 확신이 있지 못하다. 그래서 좀 더 확신 있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보면, 근거 없는 신뢰를 느낀다. 즉, 저렇게 확신 있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뭔가 정확하고 제대로 된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사기꾼들이 쓰는 방법인데,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절대 주저하지 않기 때문에, 듣는 사람은 긴가 민가 하다가 결국 사기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확신 있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모두 사기꾼이란 말은 아니다. 하지만 확신 있게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제대로 된 사실일 가능성은 높은 것은 아니다. 특히나 경험적으로 나오는 확신은 더욱 더 그렇다. 누구나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경험적 사실이 반드시 나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따뜻하고 느낌이 좋은 온천탕이 나에겐 뜨겁고 숨막히는 곳일 될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다른 이들의 의견을 꽤나 쉽게 따른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가능하면 많이 듣는 태도는 좋다. 그럴 수 있을 때 자신이 생각 치도 못한 좋은 정보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조언으로 멈춰야 한다. 그것을 추종을 하게 되는 순간, 상대가 준 정보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사실이 아닌 그 사람의 사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실은 각자마다 다르다. 또한 진리 역시도 다르다. 정의나 믿음조차도 모두 다르다. 그래서 누군가에 정의는 누군가에겐 악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해석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이 믿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싸움마저도 불사한다. 말 싸움은 그나마 낫다. 우리는 육체적 싸움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보면 전쟁까지도 치른다. 그리고 전쟁이 난 국가의 젊은이들은 자신이 속한 나라의 정의를 위해 싸운다. 서로가 정의인 것이다.
 
슈퍼맨이 정의로운 이유는 인간에게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그는 외계인임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위해 헌신한다. 만약 그가 인간을 지구에게 해로운 존재로 판단해서 인간을 박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는 정의로운 존재가 아닌, 절대 악의 존재가 됐을 것이다. 물론 모두 픽션이지만 말이다.
 
우리는 말을 하면서도 상대가 자신의 말대로 이해할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에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해서 언제든 기꺼히 밥을 사주는 것이라고 믿게 되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상대가 밥값을 반반 내자고 하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고 따진다.

 

우리는 모두 같은 단어를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단지 이것은 비슷할 뿐이다. 그런데 무조건 자신이 이해한 단어를 기준으로 상대에게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이 통하지 않으면 화를 낸다. 왜 자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냐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 역시도 상대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냥 각자 오직 자신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자신이 보는 세상을 상대가 어떻게 보는지 알 길이 없다. 태양을, 달을, 바다를, 하늘을, 얼굴을 볼 방법이 없다. 우리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그런 것을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지식만을 이용해서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상대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척하거나,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살아가면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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