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정된 자원, 돈과 시간

아이루다 2015. 3. 21. 06:48

 
아이폰으로 유명한 미국 애플사가 최근에 아이와치라는 손목 시계 형태의 기계를 내놓을 모양인 듯 하다. 이미 그들은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팔아서 많은 돈을 벌었으며, 또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아이와치를 통해서도 추가적으로 돈을 벌 것이다.
 
이 아이와치에 대해서 사람들의 의견은 아주 다양하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그 가격과 디자인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사람마다 호 불호가 있다. 가격에 비해서 제품의 디자인이 너무 좋지 않다든가, 기본적으로 가격이 너무 비싸다든가, 가격은 상관없지만 디자인은 도저히 감당하기가 힘들다든가 하는 의견 등이 있을 것이다. 물론 원하는 기능만 충분히 동작된다면 상관없다는 사람도 일부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아이와치는 기존 제품들과는 다르게, 동일 제품임에도 가격대가 기존 제품들처럼 일괄적이지 않고 매우 다양하다. 그것의 가격은, 기본가로 약 40만원 정도부터 시작해서 최고가로 억 단위를 넘는 제품까지 있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하지만 가격 차이가 난다고 해서 사실상 성능 차이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제품은 말 그대로 시계라는 제품으로 컨셉이 정해진 모양이다. 원래 시계는 만 원짜리이든, 1억짜리이든 시간의 정확도는 비슷하다. 여기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재질과 외관이다.
 
이미 시계나 가방과 같은 제품들은 동일한 기능을 하더라도 가격차이가 심하게 나는 것으로 세상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말 그대로 패션 아이템이며, 일종의 자신의 부유함을 상징하는 제품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기능상 거의 비슷한 수준의 이런 제품들을 살 때, 왜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까?
 
물론 일단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미 언급한 부의 자랑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물론 비싼 제품은 싼 제품에 비해서 조금이라도 더 좋다. 특히 실용성이 강한 전자제품들은 그 특징이 확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은 단지 표면적으로만 드러난 이유일 뿐이다. 우리가 어떤 제품을 어떤 가격으로 살 때는 좀 더 깊이 숨겨진 심리가 작동하고 있다.
 
사람들은 부를 자랑하기 위해서나 품질이나 기능이 뛰어난 제품을 사기 때문에 돈을 지불한다고 믿지만, 정말로 우리가 돈을 지불하는 가장 밑바닥 원리는 만족감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제품을 살 때, 그것을 얼마나 싸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정말로 많은 노력을 하지만, 사실 그런 우리의 노력과는 달리 가격은 어떤 제품을 구입하는데 있어서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격을 고민할 때는 단지 같은 제품을 얼마나 더 싸게 살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혹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제품들 중에서 자신의 경제 사정에 맞춰서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충분히 만족할 수만 있다면 큰 돈을 지불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 빚을 내서라도 산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우리는 어떤 제품을 살 때 얼마만큼의 돈을 지불하는 것이 적정할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낼 수 있다. 우리는 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치를 산다. 그래서 제품을 산다는 관점에서만 보면, 당연히 공장에서 만든 제품은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에 무조건 싼 가격으로 사는 것이 맞다. 하지만 우리는 가치를 사고 있다. 그리고 그 가치를 느끼는 기준은 사람마다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어떤 제품에 대한 적정가는 온전히 자신의 가치 기준에 달렸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남들이 지불하는 가격을 기준으로 한다. 이 현상을 가격의 심리적 저항선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한번 자리가 잡힌 심리적 저항선은 쉽게 뚫리지 않는다. 아주 특별한 제품들이 나올때야 비로소 뚫린다.

 
물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능력만 된다면 비싼 것을 사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절약정신이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돈을 아끼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럴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좀 심각해진 사람은 돈의 가치가 무엇보다도 높아져서 아예 돈과 다른 것을 바꿀 엄두를 못 낸다.
 
이것이 우리가 소비를 하면서 돈을 지불할 때 가장 원칙적으로 작동하는 원리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점은 거의 돈에만 맞춰진다. 그래서 얼마를 줬는지 만 계산한다. 사실 우리는 가치를 샀지만 그 결과물인 제품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제품은 모두 같더라도 가치는 다르게 인식되기 때문에, 사람마다 모두 다른 결과가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은 오직 가격만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들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그 제품에 대해서 과연 얼마만큼의 가치를 느끼는지 알 방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느낀 가치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이 산 제품의 가격을 매긴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소비가 낭비로 보이는 경우가 흔하게 일어난다. 어떨 때는 돈이 썩어나서 하는 짓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원리적으로 틀린 계산 법이다. 누군가는 수천 만 원짜리 오디오를 사고, 누군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위해서 수천 만원을 쓴다.
 
이것을 서로가 가치를 매기게 되면 당연히 쓸데없는 돈을 썼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사실은 그들은 모두 자신들만이 가치 있다고 믿는 것에 돈을 쓰는 것이다. 우리 자신들도 그런 원리로 돈을 쓰면서도 왜 우리는 다른 이들의 소비에 대해서 쓴 소리를 할까? 우리는 왜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일까?
 
돈은 원래 우리의 욕망을 해결해주는 도구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일 경우, 가진 욕망을 실현하기에는 돈이 늘 부족하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보통 욕망을 줄이기보다는 돈을 늘리려고 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누구나 돈을 원하기에, 돈을 두고 벌어지는 경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는 돈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치고, 배신을 하며,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이젠 돈은 욕망을 해결해주는 도구로써 역할을 넘어서 돈 그 자체가 욕망화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돈을 욕망한다. 원래 돈은 욕망을 충족시켜줘서 만족을 얻게끔 하는 수단으로써 의미를 가졌지만, 우리는 이제 돈 자체를 가치화 시키고 그것을 욕망한다. 이것은 마치 좋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 보다는 물감 그 자체를 구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우리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이들의 돈을 쓰는 대상에 대한 판단이다. 즉, 본격적으로 돈이 가치화 되자, 우리는 모든 판단 기준을 돈으로 하려고 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살 때, 얼마나 만족스러웠는지를 따지지 않고,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여부를 따져서 그것의 적정한 가치를 결정한다. 하지만 사실 가치라는 것은 결국 행복으로 이어지는 개념이다. 원래 우리는 가치를 통해서 행복함을 얻는다. 그래서 이 과정을 다시 정리하면, 결국 우리는 돈을 지불하고 행복을 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행복은 사람마다 모두 다른 모습을 지녔다. 우리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행복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이야기라서 따로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돈은 행복을 사는 과정이다. 우리는 돈을 써서 만족해야 한다. 이것은 돈의 액수의 문제가 아니다. 만족감의 문제일 뿐이다. 충분히 만족스럽다면, 많은 돈을 써도 그리 아깝지 않다. 돈이 아까울 때는 만족감을 얻지 못할 때뿐이다.
 
그런데 그 만족의 기준이 바로 그 자신이다. 화가는 좋은 물감을 사는데, 연주자는 좋은 악기를 사는데, 여행가는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데,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에게 좋은 것을 사주는데, 게임을 하는 사람은 게임 아이템을 구입하는데 돈을 쓰면서 만족감을 얻는다. 이것은 당연히 행복의 종류만큼 많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 뿐만이 아니라, 상대를 바라볼 때도 자신의 주관적 기준을 적용한다. 즉, 자신이 행복한 것에 다른 이들이 돈을 쓰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자신이 그리 행복을 얻지 못하는 곳에 돈을 쓰면 아깝다고 느낀다. 물론 작은 돈은 그냥 넘길 수 있다. 하지만 큰 돈을 쓰는 모습을 보면 이해하기 힘들어하고 그래서 비난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비난에는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다. 사치스럽다든가, 더 나은 가치들을 구입하는데 쓸 수 있다든가, 심하면 그럴 돈이 있으면 남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이런 비난의 근거들은 매우 조악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따지면 그 자신도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에 쓰는 돈을 모두 남을 위해 기부를 해야 할 처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을 들어도 계속 그 태도를 유지한다. 그러면서 결국엔 자신의 행복은 가치가 있다고 결론 내고 상대의 쓸데없는 돈을 쓰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폄하한다.
 
하지만 행복의 가치에 대해 아무리 정의를 내려도, 그것은 오직 그 자신만이 상대적 입장일 뿐이다. 즉, 어떤 근거를 대면서 그것을 설명하려고 해도 그런 설명은 그냥 주관적인 의견이 되는 것뿐이다. 물론 어떤 의견들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숫자가 많다고 해서 그것이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숫자로만 따지면,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가 얻었던 지지를 기반으로 해서 히틀러도 옳다고 할 수 있다.
 
돈의 쓰는 것에 대한 이런 숨겨진 심리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이 어디에 어떤 돈을 쓰는지에 대해서 그다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비난할 일도, 칭찬할 것도 없다. 그 돈을 유흥을 즐기는데 다 쓰거나, 그 돈을 남을 돕는데 다 쓴다고 해서 이것을 다른 관점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행복 선호도의 차이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생각보다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현상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행복에 대해서 관대하지 못하기에, 다른 이들이 행복을 얻는 과정, 즉 돈을 쓰는 대상에 대해서도 끝없이 자기 위주의 판단을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행복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게 되는 큰 원인이 된다. 만약 우리가 다른 이들이 어느 곳에 돈을 쓰든 모두 그 자신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의 다양한 행복추구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대상에 대해서 인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행복 추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 경우엔 범죄가 될 수 있으므로 비난을 하고 처벌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종류가 아닌 바에야 특별히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행복추구와 그것에 따른 돈의 쓰임 처에 대해서는 딱히 판단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돈에 대한 만족감을 얻기 위해 절약을 하고, 세일을 한다고 하면 먼 길을 찾아 가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 이런 행동을 할 때, 그 자신이 돈을 절약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큰 착각이 바로 우리가 돈의 다양한 쓰임새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우리는 결코 돈을 절약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모든 행동을 할 뿐이다. 아껴 쓰는 것도 만족감이며 먼 길을 가서 싸게 사오는 것도 만족감이다.
 
사실 치약을 쓰다 보면, 그것이 정말로 얼마도 되지 않는 가격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끝까지 쓰려고 한다. 한편 우리는 사실 한끼에 수만 원을 지불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돈이면 거의 몇 년치 치약 값이 되고도 남는다. 우리는 하루 세끼 중 단 한 끼를 위해서 그 돈을 지불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한 끼에 수만 원을 쓰고나서 집에 돌아와 이를 닦을 때 치약을 아낌으로써 돈을 덜 쓰고 있다고 믿는다. 사실 이런 예는 수 없이 널렸다.

 

이 말이 치약을 마구 쓰자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비싼 밥을 먹지 말자는 소리도 아니다. 아낄 것은 아끼고 쓸 데는 써야 한다. 문제는 그 아낄 것이나 쓸 데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자신만의 가치관이다. 그래서 남들에게 그것을 강요하거나 혹은 남들이 하는 자신과는 다른 아낌과 쓰임새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는 입을 닫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돈을 절약해서 쓴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다른 이들의 돈의 다양한 사용처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구두쇠일수록 사람들을 더 비난한다. 사실 구두쇠가 구두쇠로써 비난 받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비난의 태도를 감추려 하지 않기 때문에 고약하게 느껴진다. 구두쇠의 행복은 돈 그 자체이다. 그들은 돈의 가치가 그 모든 것보다도 우선한다. 그래서 돈을 가지고 있는 그 상태가 행복하다. 그런데 그런 돈을 자신의 기준에서 마구 쓰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속이 뒤집힌다.

 
물론 이것이 좀 딱해 보이는 삶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입을 열어서 다른 이들의 낭비를 비난하고 자신이 가진 돈의 가치로부터 느끼는 행복을 자랑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것보다는 조금 나은, 자신을 구두쇠가 아닌 절약가라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은 현명한 소비를 하며, 돈을 제대로 잘 쓰고 산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구두쇠라고 하면 화를 내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은 아낄 것은 아끼고 쓸 데는 잘 쓴다고 믿는다. 그러고 그런 형태의 소비를 하는 그 자신이 꽤나 세상을 잘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것 역시도 단지 사람이 느끼는 행복 중 하나일 뿐이다. 돈을 잘 쓰는데 얻는 행복이 있다면, 돈을 아끼는데 얻는 행복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선입견은 결국 돈 그 자체를 이용해서 행복함을 결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즉, 우리는 딱히 행복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면 돈을 근거로 한다. 그래서 돈이 많을수록 행복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돈을 아낀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것을 행복하게 느끼기에, 그 자체가 가치화 되면서 전체적으로 돈이 바로 행복함을 결정하는데 일조를 하는 것이다.
 
사실 부자들이 돈을 쓰면서 행복해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사실 돈을 쓸 때 행복하니까 그렇다. 실제로 그들이 진짜로 행복하든 말든 상관없이, 아무튼 행복하다고 하니까 인정해 줄만 하다. 그래서 이들은 돈이 바로 행복이 된다. 문제는 부자도 아니면서 절약하고 사는 것이 가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돈을 써서 행복한 것도 아니면서 돈의 가치를 부자들처럼 높인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끝없이 설득을 한다. 돈을 아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조언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 돈을 아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그렇게 아낀 후 남은 돈은 과연 어디에 써야 할까? 어떤 사람들처럼 평생 모은 돈을 대학교에 기부하고 마무리를 해야 할까? 아니면 자식이 좀 더 풍족하게 살기 위해서 유산으로 남겨줘야 할까? 도대체 돈을 아낀 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
 
이것은 거꾸로 된 것이다. 원래대로 되려면, 행복한 것을 찾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다른 곳에 들어가는 돈을 아껴야 한다. 하지만 행복을 찾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이미 가치화 된 절약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도 절약을 하는 것에 만족감을 얻는 사람들은 단지 돈을 아끼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사회적 요구에 부흥했고, 또한 그래서 남들보다 돈을 더 아꼈다는 만족감을 얻는 것에 집착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사실상 부자나 절약가나 모두 돈의 가치를 최대화 하여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같다. 차이라면 돈이 많아서 그런 것과 돈도 없으면서 그런 것의 차이이다. 그리고 현재 이 세상엔 부자보다는 절약가가 훨씬 많다. 그리고 이들은 입만 열만 절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자신의 행복 기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돈을 쓰는 사람들을 끝없이 비난을 한다.
 
하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돈을 잘 쓰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돈을 벌거나 절약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능력이다. 사람들은 모두 같은 돈을 쓰지만, 그것으로부터 얻는 만족감은 큰 차이가 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작은 돈을 써서도 큰 만족감을 얻지만, 어떤 사람들은 큰 돈을 쓰고도 그것의 1%도 안 되는 만족감을 얻는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는 큰 돈을 들여서 해외 여행을 가야만 얻는 만족감을 어떤 사람은 뒷산만 올라가도 얻는다.
 
그래서 좀 더 현명 하려면 돈을 많이 벌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가진 돈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돈을 많이 벌 필요도, 돈을 아낄 필요도 없다.
 
예전에 전화기가 집집마다 한 대 있던 시절에 '통화는 간단히' 라는 문구가 유행했었다. 사실 어떤 급한 전화가 올지 모르니, 통화는 간단히 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통화를 하는 이유가 반드시 어떤 급한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행복하기 위해서 통화를 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싶기에 통화를 한다. 그런 종류의 통화들에는 딱히 어떤 유용한 목적이 없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지만, 머리 속에 통화는 간단히 라는 것이 박힌 사람은 길게 통화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한심하게 여긴다. 전화 통화나 하면서 시간을 낭비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돈과 완전히 그 원리가 같다. 도대체 그렇게 시간을 절약한 후, 무엇을 하려고 해야 제대로 한 것일 될까? TV를 볼까? 책을 읽을까? 영화를 볼까?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할까?
 
사실 시간이 낭비되는 것은 없다. 아니, 낭비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낭비가 된다. 행복한 시간은 행복했을 뿐이지 낭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자신의 많은 시간을 쓰는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남들 돕거나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것이 낭비라면 낭비가 된다.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낭비가 된다. 그 따위 것에 쓸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이 낫다고 믿는다.
 
그래서 낭비는 없다고 믿는 것이 낫다. 안 그러면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일조차도 모두 낭비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이것을 확장하면 인생 그 자체가 낭비가 되는 것이다. 자신이 가치 있고 제대로 보냈다고 믿는 시간은 낭비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 사람은 낭비되었다고 믿는 태도는 돈을 대하는 입장과 완전히 동일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이나 돈은 한정된 자원이다. 우리는 시간을 투자해서 돈을 벌고, 다시 그 돈을 쓰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끝없이 반복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살아간다. 누구도 시간을 투자해서 돈을 벌지도 못하고, 없는 돈을 쓰면서 불행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모두 그 자신처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차이점은 단지 과연 무엇을 행복하게 여기느냐 뿐이다. 그래서 그렇게 다양한 시간과 돈의 사용처가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종류의 시간과 돈의 쓰임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비난하는 순간 그것은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는 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