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삶의 허무함을 느끼는 당신을 위한 조언

아이루다 2015. 3. 29. 08:53

 
인간에게 있어서 허무하다는 말은 그리 좋은 의미로 해석되는 표현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이 허무함을 빗겨갈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살아가는 동안, 어떤 목표를 가질 수 밖에 없고, 그 목표는 각자만의 기대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 목표를 달성했다고 해서 반드시 원하던 기대치인, 가치, 의미, 행복 등을 얻을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할 상황이 될 때, 그 동안 했던 시간, 돈, 노력 등이 무의미해짐을 경험함으로써 결국 허무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한 여자가 행복한 삶을 위해 혹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 결혼을 했다. 하지만 이 결혼생활이 자신의 상상과 달리 서로에 대한 불신과 언어 폭력, 물리적 폭력 등으로 얼룩지게 되는 상황도 충분히 발생할 여지가 있다.


이때 이 여자는 원래 목표인 결혼과 아이 얻기를 달성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신이 기대했던 가치와 의미는 얻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 여자는 결국 깊은 허탈과 허무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허무함은 언뜻 생각하면, 목표 자체를 달성하지 못하는 순간인 좌절과 비슷한 느낌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허무함과 좌절은 좀 다르다. 쉽게 설명하면, 좌절은 목표 자체를 달성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고, 허무함은 목표를 달성한 후, 그것이 자신의 기대치에 못 미칠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꼭 오르겠다고 마음먹고 높은 산을 열심히 오르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좌절이지만, 힘들어도 이겨내고 올랐는데, 결국 오르고 보니 볼 것도 없고 황량하기만 그지없을 때 허무함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오른 후, 또 바로 내려가야 한다면 더욱 그럴 수 있다. 이때 도대체 왜 산을 올랐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종류만 다를 뿐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 허무함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즉,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내내 갖게 될 모든 목표가 스스로 가진 기대치에 부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거나 크게 실망을 하면서 허무함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런 허무함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게 된다. 즉, 이것은 우리 인생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 진짜로 큰 문제가 하나 있다. 그 허무함의 대상이 어떤 크고 작은 목표가 아닌, 삶 자체, 즉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그것으로 인해 느껴지는 이성적, 감정적 혼란스러움은 개인이 감당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살아가보면 어쩔 수 없이 삶 그 자체의 허무함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들로 인해 느껴지기도 하고, 직접적으로 자신의 일로 인해서 경험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느 날 우연히 들려온 젊은 지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 삶의 허망함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을 통해 일해왔던 직장에서 어느 날 전혀 예상치 못한 정리해고를 당할 때 허무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자신의 많은 것을 희생했다고 믿으면서 지켜온 가족에게 있어서, 그 자신은 단지 돈을 벌어다 주는 용도로써만 가치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 깊은 회환과 허무함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정말로 힘들고 치열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암에 걸려서 1년도 안 되는 시간만이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렇게 살아온 삶 자체가 허무할 수 있다. 우리는 오랜 시간을 걸쳐 쌓아온 친구와의 우정이 얼마 안 되는 돈 때문에 서로 실망하고 어긋남을 경험할 때 사람에 대한 허무함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스스로 깊은 회한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삶이 이렇게 된 많은 다른 이유들에 대한 깊은 분노를 느끼고, 겨우 힘들게 숨겨둔 상처가 덧나서 너무도 큰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이 고통이 단기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들과 계속 함께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지도 모른다.
 
삶의 허무함은, 우리가 그 동안 경험했던 허무함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만들어 낸다. 크고 작은 목표에 대한 허무함은 그 순간은 힘들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해냄으로써 상쇄될 수 있다. 산을 올라서 허무했다면, 바다를 가면 된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는 두 번째 기회란 없다. 우리는 오직 단 한번 시도할 수 있으며, 그것이 허무함의 결과를 가져왔다면, 사실상 이것을 복구시킬 방법이 없다.
 
그런 이유로 너무 힘들어서 주변을 돌아보면, 이 세상은 자신만 제외하면 모두 행복하게 사는 듯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자신은 행복하기 까지도 바라지 않고, 단지 불행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인데, 그것 하나 조차도 이루어지지 않는 서글픈 운명이 저주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찾아 온 허무함은 머리에서 시작되어 발끝까지 마치 독버섯처럼 퍼져나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두려움의 독이며, 무기력함의 독이다. 의욕이 사라지고 어떤 일을 해도 그것이 희망이 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선뜻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다가 이런 자신의 태도가 좀처럼 어떤 다른 변화의 계기가 없이 계속 이대로 죽는 순간까지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찌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뭔가 이렇게는 살면 안 된다고 느끼긴 하지만, 무엇인가를 시도했다가 혹시나 실패하면 현재 자리마저 지키지 못하고 살까 봐 전전긍긍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은 마치 외통수 걸린 것처럼 꼼짝달싹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자니, 매일 바닥에 새겨진 균열은 점점 더 진해져 가고 있다. 성장이 끝난 모든 생명체에게 있어서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매일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매일 줄어들고 있다.
 
한때, 우리 자신에게도 희망이 있었고, 꿈이 있었고, 인생에 있어서 좋은 일만이 일어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너무 오래되어서 희미해진 것들이지만,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그때도 힘들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나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면서 살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기대조차 하기가 힘들어졌다. 지금은 너무도 많은 것이 고정되었고, 그 딱딱해진 껍데기를 깨고 나설 힘이 없다.
 
그래서 주저앉는다. 그리고 그냥 주변을 바라본다.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살던 시절엔 앞만 보고 달렸는데, 삶이 힘들고 고달프고 허망해서 그냥 주저앉고 나니, 그제서야 주변이 보인다. 그리고 거기엔 자신처럼 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들이 또한 자신처럼 초점이 사라진 텅 빈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위로도 되지만, 사실은 더욱 더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스스로를 생각할 땐, 착각이라도 해서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객관적인 시선으로 다른 이들의 공허함이 가득한 눈을 바라보니, 그것이 부질없는 희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욱 힘들고 두려워지니 서점을 찾아본다. 다행히 거기엔 삶의 허무함을 위로해주는 책들이 즐비하다. 하나를 집어 들고 읽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맺힌다. 그 책들은 그렇게 말해준다.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 '당신은 다른 이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만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다'
 
잠시 눈물을 흘리고 나니, 마음 속 한 구석이 후련해지긴 한다. 하지만 이 약효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우리는 오래지 않아 다시 또 허무함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쳇바퀴 같은 삶을 텅 빈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또다시 다른 책을 찾는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든다.
 
왜 삶이 허무하면 안되지?
정말로 왜 삶이 허무하면 안되지?
삶이 허무하면 안 되는 이유는 뭘까?
 
세상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삶을 안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남들이 하는 정도는 하고 살아야 한다고 한다. 모든 것은 때가 있으니 제 때 그것을 해야 한다고 한다. 돈을 벌고 가정을 일구고 자녀를 낳아서 키워야 한다고 한다.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한다. 노후를 걱정하지 않으려면 젊었을 때 고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삶을 이미 정해진 공식에 맞추지 말고 그 자신만의 가치를 찾으면서 충만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절대로 삶을 그렇게 타성적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하고픈 일을 찾아서 열정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한다. 사는 것 그 자체를 위해 한번뿐인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한다. 자신만의 꿈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안주하기 보다는 도전해야 한다고 한다.
 
이 두 입장은 삶에 대해서 안전함의 행복과 열정의 행복이라는 서로 다른 해석을 하긴 하지만, 양 편 모두 삶을 허무하게 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은 동일하다. 우리가 듣는 어떤 조언에서도 삶은 허무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우리 인생에서 허무함은 절대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잘 해석해보자. 좀 더 이해하기 쉽게 건강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누구나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프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건강을 강조할까? 당연히 우리는 원래가 아프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래 가만히 있어도 늘 건강한 존재라면, 우리는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모두 같은 원리로 적용이 된다. 우리는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원래 거짓말을 잘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가 너무도 정직해서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거짓말 좀 하고 살아야 한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해야 한다고 말할 때는, 그것이 원래 부족한 상태가 원래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면 그렇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노력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 원리를 적용하면, 우리가 허무함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이유는, 원래 삶이 허무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우리는 불행함이 본질이기에 열심히 노력을 해서 행복을 얻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본질은 불행함, 허무함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든 노력을 통해서 이것을 이겨내야 한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매일 늙는다. 우리는 매일 매일 나빠진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운동을 해야 현재의 건강을 조금이라도 더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건강함, 행복함, 가치 등을 본질로 가정해버리면 그 반대편에 있는 아픔, 불행함, 허무함 등은 모두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며, 절대로 그 상태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 된다. 즉, 우리는 의도와 상관없이 그런 상태에 놓일 수도 있는데, 그때가 크게 잘못된 상황으로 인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만, 노력해서 쉽게 해결될 것이라면 처음부터 고민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여 보려고도 하지만,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상태 자체가 아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받아들일 때는 그것이 원래 그럴 때여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머리를 완전히 밀고 다니는 곳에서 태어나서 자라면, 왜 그런지 묻기 보다는, 자신도 머리를 밀고 다니게 된다. 하지만 머리를 기르고 살다가 그것에 가면, 도대체 그들이 왜 그런지 이해하기가 힘들어지며, 자신이 왜 머리를 밀어야 하는지 받아들이기가 힘들게 된다.
 
타고난 외모가 그리 좋지 않는 사람과, 아름답게 태어났으나 사고로 인해서 얼굴이 망가진 사람이 각자 현재의 자신이 가진 외모를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로 큰 차이가 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보통은 타고난 외모가 부족한 사람이 훨씬 더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고 포기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외모에 문제가 있었던 사람은 그나마 사회 생활을 하고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어떤 시기에 외모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 순간부터 모든 사회적 활동이 정지되고 인간관계 역시도 모두 끊기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례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이 본질이 될 때,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포기할 수 있을 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만약 불행함이나 허무함을 우리의 본질로 가정하게 되면, 우리가 불행하거나 허무한 것은 일단 당연한 것이 된다. 그리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노력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사실 불행과 허무함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무기력함이다. 우리는 불행하더라도 허무하더라도 다른 시도를 할 수 있는 의지와 욕구가 있다면 힘들지만 꾸준히 노력해서 벗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불행함이나 허무함은 그 의지와 욕구 자체를 망가뜨려버린다. 즉, 우리는 아무런 의지나 욕구가 생성되지 않는 무기력함에 빠진다.
 
하지만 불행과 허무함은 현재의 상태일 뿐이다. 이것은 무기력함이 아니다. 우리는 당장 배가 고파서 불행하더라도 미래엔 맛난 식사를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한, 그것을 견뎌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 아무런 의지가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절망에 빠질 뿐이다.
 
즉, 불행이나 허무함에 빠지면, 우리는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한없이 절망에 빠져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것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럴 수 있는 것이라면,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우리는 왜 우리의 삶이 행복해야 하며, 허무하지 않아야 하며, 의미 있어야 한다고 믿을까?
 
이것은 단순한 말 장난일 수 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인간의 삶이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입장일 뿐이다. 우리는 충분히 똑똑하지만, 자신의 삶이 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어야 하는지 절대적 관점에서 그것을 설명할 아무런 근거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나마 우리는 종교를 통해서 그것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모든 가치 근거는 상대적 관점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가족의 가치나, 사랑의 가치, 평화의 가치, 믿음, 신뢰, 용기, 정의와 같은 것들 모두 단지 인간의 기준에서만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종교 조차도 인간의 입장에서 머물고 만다. 인간이 없는 종교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논리적으로도 우리의 본질은 불행함과 허무함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허무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안다고 해서,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사실은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타고난 키, 외모, 성격, 부모님, 형제 자매, 태어난 나라, 성별에 대해서 큰 불만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미 정해지고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허무함이 이런 것들 중 하나라면, 우리는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즉, 허무함을 긍정적 영역에서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허무함을 느끼기에 가지고 있는 욕심을 버릴 수도 있다. 우리는 허무함을 느끼기에 남들을 속이거나, 자신의 작은 이득을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관점에서 보면 허무함은 삶을 사는데 있어서 참 좋은 것이 될 수도 있다.
 
허무함은 우리가 가진 많은 불필요한 욕망과 무게를 없앨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된다. 비록 허무함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힘들고 고통스럽게 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거나 혹은 포기할 수 있다면, 허무함은 사실 행복함으로 연결이 된다.
 
행복을 얻는 방법은 욕망을 실현해내는 것도 있지만 욕망 자체를 줄일 때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허무함은 상황에 따라서 욕망을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된다. 비록 그것이 긍정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욕망을 줄일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허무함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냐는 것에 대한 부분이다. 물론 처음부터 허무함을 아예 느끼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수 있다. 그렇지만 허무함이 이미 느껴졌다면, 그것을 다른 해결 방법을 통해 벗어나려고만 하지 말고, 그것을 잘 이용하는 것도 현명한 선택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오늘 자신의 삶이 허무하다고 느끼는가? 그리고 그것이 문제라고 느끼는가?
 
허무함은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문제로만 느끼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불필요한 집착을 없애고, 어떻게 살아야만 한다고 믿는 행복의 공식들을 머리 속에서 지워나가면 된다.


우리는 꼭 비싼 외식을 하지 않아도 되며, 우리는 해외 여행을 안가도 된다. 우리는 비싼 명품 제품을 안 사도 되며, 우리는 꼭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 필요는 없다. 우리는 행복한 사진을 찍어서 남들에게 공유하지 않아도 되며, 우리는 많은 채팅 알람이 도착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우리가 심심하게 산다고 해서 인생을 잘못 사는 것은 아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온전한 행복  (0) 2015.04.03
무뎌짐  (0) 2015.03.30
모두 자신의 행복을 위해 돈을 쓰지만..  (0) 2015.03.23
한정된 자원, 돈과 시간  (0) 2015.03.21
말하는 자와 듣는 자  (0) 2015.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