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무뎌짐

아이루다 2015. 3. 30. 13:40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는 시장에 개를 메어 놓으면, 그 개는 어느 순간부터 멍한 눈으로 오고 가는 사람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 모습은 원래 그 개의 모습은 아니었다. 처음에 그 개는 여느 개와 다름없이 오고 가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꼬리를 흔들기도 하고, 짖기도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던 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반응이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결국엔 마치 아무런 의욕도 없는 듯, 혹은 세상에 달관한 듯 무표정함과 무반응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 개는 왜 그렇게 변했을까?
 
사실 이것의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시장은 개가 있기엔 너무도 복잡한 곳이다. 이것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시장에서 매시간마다 발생하는 정보의 총량은 개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많다. 그래서 시장 안에서 개를 키우는 것은 개에겐 너무도 큰 고통일 수 있다.
 
개는 냄새를 아주 잘 맡는다. 그런데 사방에서 냄새는 나지만, 목에 묶인 목줄은 개를 붙잡아 두기 때문에,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확인 불가능한 정보에 매일 감당하기 힘들만큼 접하게 될 때, 개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즉, 점점 외부 자극을 무시해야 하는 것이다.
 
개는 원래 인간의 방문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하게 되어 있다. 친밀하다면 꼬리를 흔들고, 뭔가 불안함을 느꼈다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릴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가끔 올 때 그럴 수 있다 . 하루에서 수천 명이 오고 가는 시장 길에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선별적으로 반응을 드러내는 것은 개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개는 자신에게 도착하는 그 많은 정보들을 자연스럽게 차단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개가 미치지 않기 위해서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보호의 동작 원리일 수도 있다.
 
결국 이런 전개로 인해서, 개는 더 이상 자신에게 입력되는 정보를 필요한 정보로써 해석하지 않으려고 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정보가 해석되지 않고 무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반응도 무뎌지게 된다. 즉, 이 개는 결국 사람이 와서 머리를 쓰다듬어도 그 사람의 얼굴조차 바라보지 않는, 일명 바보 개의 모습이 된 것이다.
 
사실 이 현상은 개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 역시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을 넘어선 환경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도 시장의 개처럼 자신도 모르게 정보를 차단하고 있는 중이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될 수 있느냐고 되물을 수 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실은 우리에게 필요할지도 모르는 정보조차도 무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차단으로 인해서 우린 좀 더 단순하게 살 수는 있지만, 그 차단으로 인해서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뺏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말하고 있는 정보의 차단이란 작동이 외부 정보의 물리적 습득 단계의 차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미 오감을 통해서 습득된 정보를 뇌가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지 능력은 오감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닌, 오감을 통해 얻어진 정보를 뇌가 해석함으로써 얻기 때문에, 당연히 뇌에서 차단된 정보는 아예 처음부터 입력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에 우리가 어느 한적한 시골길을 걷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지금처럼 봄 햇살이 따뜻한 어느 날 우리는 시멘트나 아스팔트가 아닌, 오래된 흙이 깔린 좁은 길을 걷고 있다. 누구와 그 길을 함께 걸을지는 각자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 정하고, 딱히 신경 쓸 거리가 없기에 그냥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걷고 있다.
 
그러다가 우연히 길가의 잡초에서 핀 꽃 한 송이를 발견했다. 새로운 봄에 핀 새로운 꽃, 비록 그 크기는 작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봄이 온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 꽃 하나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싱긋 웃음을 지을 수 있다. 물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길을 걷다가 보면, 조금 심심해지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작은 변화에도 민감해지게 된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시골길엔 아주 가끔 벌레가 지나가고 새가 날아가며 바람이 불고 있을 뿐이다. 즉, 시골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에게 매 순간 도착하는 정보량은 도심이 그것에 비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엔 무시했던 별 필요 없는 정보들조차도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정보량 자체가 아주 적기 때문에 뇌가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다. 비록 자극이 없어서 심심하긴 하지만, 마음은 편안해질 수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작은 꽃이 도심에서도 피었다고 했을 때, 우리 중 그 누구도 이 꽃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정보를 인식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다른 정보들이, 상대적으로 훨씬 자극적 효과를 지닌 채 끊임없이 도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두뇌는 아주 대단한 능력을 지니긴 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믿는 의식의 세계는 매우 협소하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도착하는 정보의 아주 일부분만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정보량이 무의식조차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입력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처리하기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정보들의 해석을 그만두고 만다.
 
사실 그것을 모두 해석하려고 했다가는 미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뇌가 가진 스스로의 보호 능력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도 과도한 공포심에 노출되면 아예 외부 정보를 완전히 차단해버리기도 한다. 소위 말해서 미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나 슬픔에 놓이게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스스로 자신만의 안식처로 도망쳐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막아 버린다.
 
이것은 물론 일반적으로 미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긴 하지만, 평상시 우리들에게도 조금씩 나타나는 증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 우리는 이미 감당하기 힘든 정보량에 노출되어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너무도 많이 밀려드는 장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그들은 마치 좀비처럼 멍한 시선으로, 단지 오랫동안 해 왔기에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거의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디에선가는 다른 곳에서는 활기차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들은 당장 육체적으로 힘들어서 그런 모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또한 이들은 끝없이 밀려오는 새로운 사람과, 기존에 이미 도착한 사람들의 끝없는 요청으로 인해 그것을 다 감당하지 못해서 반응 자체가 무뎌지게 된 것이다.
 
온라인 상으로, 10분이면 수십 명에게 연락이 오는, 일명 주변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는 사람에게도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너무도 잦은 연락은 이 사람이 그것을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의 한계를 넘어서서 결국엔 이 사람 역시도 무의식적인 반응을 하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 글로 웃으면 같이 웃고, 누군가 글로 슬퍼하면 같이 슬퍼한다. 하지만 정작 그것에 반응하는 글을 쓰는 본인은 거의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주변에 무뎌지는 것은, 일종의 적응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도심에서 살아갈 때, 무뎌지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매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심은 오감이 무디고 또한 인식도 무뎌진 사람들이 좀 더 살기 편한 곳이다.
 
하지만 이렇게 무뎌진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가진 행복함도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마냥 좋은 적응이라고만 볼 수 없다. 아마도 최악의 상황은, 바로 무뎌진 예술가들일 것이다. 가장 민감한 감성을 통해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그들로써, 무뎌짐은 예술 그 자체를 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아마도 그들이 도심을 떠나 외부로 나가는지도 모른다. 언뜻 보기엔 도심이 복잡함을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모르지만, 정확이 말하면 그들은 도심에서 얻는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정보량을 피해 그곳으로 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설령 같은 환경이라도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그들에게 있어서 도심의 정보량은 일반 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더 많게 느껴졌을 테니까 말이다.
 
일반 사람들 역시도 이미 감당할 수준을 넘어선 정보량 때문에, 우리의 오감은 모두 자신을 자극하고 있는 정보만을 인식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사실 모든 종류의 광고는 자기를 바라보도록 목적 지어져 있다. 자극적이지 않은 광고는 처음부터 광고가 아니다. 자극은 광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광고만 해도 엄청난 양이 쏟아지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젠 그런 광고에도 무뎌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우리는 더 이상 파란 하늘을 보거나, 떠가는 구름을 보거나, 흐르는 강물을 보거나, 밤에 빛나는 별을 보려고 하지 못한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의 총량은 이미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늘 그런 상태에 있는 변하지 않는 듯 보이는 자연의 변화에 무감각해지고 말았다.
 
우리는 가끔 화려한 벚꽃이 필 무렵에는 그곳에 가서 사진을 찍지만, 사실 봄에 피는 꽃은 벚꽃 말고도 정말로 많은 종류가 있다는 점은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중 가장 화려하고 자극적인 벚꽃만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그럴 때 벚꽃의 광고에 몰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단 한 순간의 여유조차도 찾기 힘든 우리는 본격적으로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해야 할 것들을 머리 속에 정리해두고는 그것을 해내는 것만을 생각하고 살아가게 된다. 뇌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이 오직 계획을 실현하는 데만 쓰기고 있기 때문에,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가 된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이젠 시장에 묶여 있는 개와 같은 처지로 변하고 있다. 개는 왜 자신이 그곳에 묶여 있어야 하는지를 잊어버렸다. 주인은 낯선 이를 경계하라고 묶어놨을 지도 모르지만, 개에게 있어서 낯선 존재는 없다. 모두가 낯선 존재라서 그들을 보고 짖다가는 하루 종일 짖기만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뎌짐에는 단지 이런 원리만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 인간의 인식 능력은 매우 효율적이라서, 우리는 익숙해진 정보들은 모두 흘러 보내고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같은 경로를 통해 어딘가를 오고 갈 때, 어제와 다르게 변화된 정보만을 선별적으로 인식해낸다.
 
사실 우리는 이 능력을 인해서 이렇게 많은 정보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꼭 도심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시골 길을 걸을 때도, 길가에 피어 있는 수 많은 풀들과 그 안에 살고 있는 곤충들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을 신경 쓰는 것은 꽃이 피었거나 혹은 벌레가 우리들에게 달라들 때 뿐이다.
 
그리고 이런 효과는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더욱 더 강하게 발현된다. 즉, 우리가 인식하는 정보는 반복되어 익숙해짐으로써 무감각해지고, 그 양이 많아짐으로써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무뎌짐은 양날의 검이 되고 만다. 우리는 무감각해지고 무뎌짐으로써 세상을 좀 더 단순하고 효율적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그 정보의 양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정보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즉, 정보가 자신이 감당할 수준을 넘게 되면, 그때는 도착한 정보를 처리하는데 모든 시간이 투자되고 만다. 즉,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로써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창조적인 삶' 이나 '능동적인 삶' 등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삶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자극에 반응하는 평범하고 수동적인 것도 삶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창조적일 때, 능동적일 때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만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무뎌짐은 문제가 될 수 있다.
 
또한 모든 종류의 자극은 결국엔 또 다른 더 강한 자극에 의해서 무뎌지게 된다. 그래서 모든 매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한다. 하지만 그것에는 명확하게 한계가 있다. 여자의 벗은 몸이 남자를 자극시킬지는 모르지만, 여자는 결국 언젠가는 더 벗을 수 있는 옷이 없다. 다 벗은 후에는 더 이상 벗을 것이 없는 것이다.
 
사실 모든 것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자극은 점점 강해지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자극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자극에 익숙해지다가 결국엔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 그리고 더욱 더 심각한 것은, 우리가 자극에 실증을 내는 시간이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들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지금처럼 지속적으로 자극을 높여가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점점 더 무뎌져 가는 것이다. 우리는 대화에 무뎌지고, 선물에 무뎌지고, 행사에 무뎌질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대충 흘러 넘길 것이며, 생일날 받는 선물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며, 우리는 지인의 결혼식을 거의 일처럼 다녀올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무뎌져 갈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자극이 없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몰라서 헤매게 될 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길은 이 무한 반복되는 고리를 끊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정보가 유입되는 것을 막고 스스로 쉴 틈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것은 가능하면 한적한 공간에 머무르는 시간을 최대화 시켜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모이면 정보가 생산되기 때문이다. TV 같은 매체는 말 그대로 정보의 덩어리이다. 거기엔 자극적인 소재와 광고가 늘 흘러 나온다. 요즘의 스마트 폰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이런 환경에 놓여서 점점 무뎌지고 있는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좀 다른 일들을 하고 사는 것을 선택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우리가 너무도 많은 정보에 노출이 되어서 멍해지고 수동적인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삶은 심심할 수도 있다. 자극이 없으면 편안하기 때문에 좋긴 하지만, 지루하고 심심할 수 있다. 그러면 그때 조금씩 시도를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래될 때, 우리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